[제23호/2001년 8월 1일]

 南冥·退溪 탄신 500주년에 생각한다 (4)

 

설석규(薛錫圭)
문학박사,경북대강사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글싣는 차례>

1. 남명학연구원에 바란다.
2. 남명과 퇴계의 관계 - 동반자적 경쟁관계 -

3.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 - 지리산과 청량산 -
4. 남명과 퇴계의 인품 - 剛毅直方과 剛柔兼全 -

5. 남명과 퇴계의 학문 - 누가 實學者인가 -
6.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 - 分對論과 隨乘論 -
7.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 ) - 君子小人論과 調劑蕩平論 -
8.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I ) - 共存이냐 換局이냐 -

 

7.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 )  - 君子小人論과 調劑蕩平論 -

  조선시대 정치는 흔히 당쟁(黨爭)으로 규정된다. 당파싸움이라는 의미의 당쟁은 선조대 이래 사림세력이 학파를 매개로 붕당(朋黨)을 형성해 대립을 전개한 정치적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 용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이래 보편적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붕당정치(朋黨政治)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긍정적 내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반성론적 시각에 입각하여 조선왕조의 멸망원인을 당쟁에서 찾고 있다. 심지어 당쟁을 우리 민족성의 치명적 약점으로 간주하여 청산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해 오늘날의 여.야 대립을 비판하며 화합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는 당쟁이나 정당정치가 이익갈등의 조정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자세가 근원적으로 결여된 독선적 발상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그들의 침략을 호도하기 위해 한민족만이 부정적인 파벌성을 지닌 것처럼 부각한 당파성론(黨派性論)이나, 당쟁 때문에 조선이 자멸하게 되었다는 당쟁망국론(黨爭亡國論)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근세 역사는 군부독재 정치인 막부(幕府)정치의 역사였다. 장군(將軍)들이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사무라이 정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상급자의 명령에 하급자는 무조건 복종하고, 전쟁에서는 승패만 있을 뿐 적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오랫동안 물들어 있던 일본인들이 미관말직의 언관(言官)이나 관직이 없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정승이 실각당하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처신의 자세를 가르치거나 정책결정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조선왕조의 정치현상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경험한 바로는 비판이 활성화되어 있고 언론이 살아있는 조선왕조의 실상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군부독재나 전체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존재가치와 이익을 보장받으며 공존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익갈등과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라 하겠으며, 그것의 합리적 해소를 위해서는 상호 주장을 존중하며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자세와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의 다양한 이익관철을 위해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정쟁(政爭)을 벌이는 것이나, 자신들의 각종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전개되는 노사분규도 궁극에 타협과 조화와 융합을 이루기 위한 갈등과 대립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안목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은 학파를 매개로 한 사적(私的) 붕당의 대결이라는 점, 명분과 의리를 지나치게 앞세워 타협성이 부족하다는 점, 공론 즉 여론형성 자격층이 지배층인 양반사림에 국한되고 있었다는 점 등 분명 중세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쟁은 전제군주 국가체제에서 신하의 정책결정 참여를 확대하고 향촌사림이 주도하는 지방자치를 보장하는 등 정당정치(政黨政治)의 전향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정책결정과 정국운영에 있어 비판과 견제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시대 당쟁은 우리에게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서구적 정당정치가 아닌 한국적 정당정치의 토대를 구축하는 전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쟁을 부정하면 조선시대 정치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자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5천년의 유구한 역사성을 지닌 문화민족이라 자부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자 기만이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은 향촌을 무대로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면서 성리학의 깊은 연구를 통해 그에 입각한 질서정착을 지향하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소수의 훈척세력에 의해 초래된 정치·사회·경제적 혼란과 파탄은 국가경영 철학과 도덕성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성리학적 정치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이 도덕성과 명분을 갖춘 군자(君子)인지, 아니면 권력욕과 사적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소인(小人)인지 검증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때문으로, 이것은 성리학의 정치논리에서 분명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군자·소인의 분별과 군자집단의 발탁을 위한 다양하고 체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붕당의 결성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구양수(歐陽脩)의‘붕당론(朋黨論)’과, 붕당이 없으면 간신배들이 득세하여 나라가 망할 수 있음을 환기시키며 군주(君主)도 붕당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주자(朱子)의 소위‘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이 그것이었다. 남명의 제자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해, 퇴계의 제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의 붕당결성에 대한 긍정적 입장은 모두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 같이 사림세력은 군자가 지배하는 이상사회의 구현을 위해 구양수·주자의 붕당론, 곧 성리학적 붕당론에 입각한 정치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쟁, 곧 붕당정치는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한 조선시대 사림이 지향하는 정치운영의 원리이자 정치적 명분이었다. 그들이 훈척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국주도권을 확보하자 학파를 매개로 분열하여 붕당을 형성하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왕권과 결탁한 소수 권력자 대신 사림의 여론인 공론(公論)에 입각한 정국운영을 근간으로 상호 비판과 견제를 보장하는 것을 원리로 하였다. 나아가 여기에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재야사림의 공론도 수용하는 정치참여층의 확대를 지향하고 있기도 했다. 결국 조선시대, 특히 후기의 정치는 성리학적 수신(修身)을 통해 도덕적 명분과 확고한 정치철학을 겸비한 군자로 자부하는 사림이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재조 및 재야 사림의 공론을 토대로 정책을 결정하는 공론정치(公論政治)를 근간으로 하면서, 공론대결을 통해 상호 비판과 견제를 보장하며 특정 정치세력의 독점적 지배를 차단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를 운영원리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던 셈이다.

  당쟁은 사림들이 각각의 삶과 정치철학을 현실정치에 투영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대립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관념논쟁 정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 내면에는 근원적이고도 절박한 사정이 개재해 있었다. 곧 정국을 주도하는 부류의 도덕성 여부나 국가경영 철학의 존재여부가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이 결여된 부국강병의 추구는 무의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부정과 비리를 야기하며 사회의 기층을 병들게 하여 국가의 쇠망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 사림세력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 이이의 문묘종사 여부를 둘러싸고 치열한 이기심성 논쟁을 전개하는 이면에는 그들의 학통을 따르며 정국을 주도하는 부류의 도덕성과 국가경영 철학문제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 당쟁의 원조는 남명과 퇴계가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에 입각한 독자적인 삶의 철학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대립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理氣)를 분리하여 대립적으로 파악하며 선·악의 분별에 투철한 강의직방의 자세를 견지한 남명의 분대론(分對論)의 관점과, 이기를 분리하되 따르고 올라탄 관계로 해석하며 외유내강의 탄력적 면모를 보인 퇴계의 수승론(隨乘論)의 관점은 그들의 출처관의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자 남명학과 퇴계학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학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들의 학통을 계승하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각각 그들의 삶의 방식을 설정함과 동시에 정치철학을 확립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리의 자발적 작용성을 보장하듯이 군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사회건설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이를 위한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인으로 규정한 훈척정권을 붕괴시키고 과거청산에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며 사림정치의 확립에 긴밀하게 공조하게 되는 것은 그 같은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남명·퇴계학파의 군자지배를 보장하는 사림정치의 확립을 위한 훈척의 잔재청산에 모든 사림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훈척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거나 도덕적 가치기준 대신 화합의 방안을 모색하며 점진적 개혁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그러했다. 그들의 주장은 국가경영의 무능력을 드러내고 각종 파탄을 초래한 훈척정권은 와해되어야 하지만 도덕적 잣대로 그 책임을 물어 처벌할 경우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정당성은 율곡의 이기심성론에 의해 확보되고 있었다. 결국 사림세력이 남명·퇴계학파를 주축으로 한 동인(東人)과 율곡학파를 표방하는 서인(西人)으로 분열하여 붕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는 사림정치 확립을 위한 개혁의 방법에 있어 강·온의 입장차가 주된 요인이 되고 있었다.

  율곡은 남명과 퇴계의 도덕지상 내지는 우위를 지향하는 이기심성론적 처세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리와 기는 유기적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리는 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실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기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기가 선악을 겸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선의 리가 안에서 제어하기 때문에 악 대신 선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곧 리와 기는 안과 밖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묘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은 선·악을 겸비하고 있으나 내재한 리에 의해 악 대신 선으로 나아갈 여지를 항상 마련하고 있다는 이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기묘합론(理氣妙合論)의 논리적 구조의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군자와 소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군자로 자처하거나 남을 소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독선적 발상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옳으면 남도 옳고 내가 그르면 남도 그른 법으로 양시양비(兩是兩非)만 있을 뿐 시비의 분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독선에 빠지지 않고 상대방을 용납함으로써 화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율곡의 그 같은 논리는 선조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분열하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기는 했지만, 궁극에는 보합론(保合論)의 붕당론을 제시하며 사림의 통합을 주장하는 서인의 정치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시비의 분별없는 무조건적 화합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기회주의자에게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덕적 가치를 배제한 현실성은 자기 합리화를 낳고 그것은 다시 모순의 악순환을 초래하게 되는 것으로, 이는 도덕성을 우선하는 남명·퇴계학파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율곡의 묘합론적 처세관이 명실상부한 화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현실과의 야합을 정당화하는 기회주의자적 논리이자 성리학적 세계관을 왜곡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남명학파, 특히 래암 정인홍에게서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래암은 남명의 분대론적 삶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자신의 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의 정치철학을 확립했다. 그는 정치운영의 원리를 군자와 소인의 대립구도에서 파악했다. 그리하여 군자와 소인이란 물과 기름처럼 근원적으로 화합이 될 수 없는 법으로 군자당인 사림이 소인당인 훈척세력을 궤멸시켜야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래야 소인이 다시 일어나 나라를 망치거나 군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고 군자지배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소인과의 어떠한 타협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을 비호하는 어떠한 행위도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훈척의 잔재청산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는 서인세력조차 그에게는 소인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림의 보합(保合)을 내세우며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는 율곡이라고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사림에 의해 개혁을 주도할 촉망받는 인물로 기대를 받던 율곡과 등을 지게 되는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래암의 극단적인 군자소인론은 급진적 개혁이 요구되거나 국가적 비상사태와 같은 난국에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남명학파가 특히 두드러진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은 소인과의 타협을 배제하는 그들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배타적 정국운영 방식은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항구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한계는 이미 남명학파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는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의 양시억비론(揚是抑非論)이 바로 그것이다. 곧 시비의 분별을 통해 군자·소인을 확정하되 군자의 진출을 조장하여 소인이 나아가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인을 제거대상으로 간주하는 래암의 붕당론을 다소 완화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명학파의 붕당론은 강·온의 차이만 있을 뿐 사림을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시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논리상 동인이 군자당이면 서인이 소인당으로 규정되는 셈이다. 이는 결국 사림세력 내부의 극단적인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소인이라 자처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남명학파가 피해를 입게 되는 것도 그 같은 극단적인 사고가 역작용을 불러일으킨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서애 유성룡이 퇴계의 수승론적 삶의 철학을 토대로 조제탕평론(調劑蕩平論)의 붕당론을 제시한 것은 동인과 서인의 극한적 대립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에 의하면 동인과 서인이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그 내부에는 군자와 소인이 혼재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각 붕당에서 소인으로 간주되는 인물은 배제하되 군자로 인정되는 인물만을 발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를 용납하게 되고 화합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서애의 이러한 조제탕평론은 동인과 서인의 존재가치의 보장을 전제로 한 일종의 조정책이었다. 이는 훈척세력과 연계된데다 그들의 척결에 소극적인 이유로 남명학파에 의해 소인당으로 규정되던 서인세력에게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과거청산을 지향하는 남명학파로서는 개혁의 변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그것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다. 남명학파와 퇴계학파가 정치운영상의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자체 분열하여 각기 독자노선을 걷게 되는 사정이 여기에 있었다.  

8.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I ) - 換局이냐 共存이냐  -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는 더 이상 학파를 표방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정치보복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이 광해군대 정치적 책임을 남명학파에게 묻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광해군대 제반 정치적 현상이 남명학파의 정치철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명의 이기분대론에 토대를 둔 남명학파의 군자소인론은 철저한 훈척정치의 잔재청산과 임진왜란에서의 주도적 의병활동에 의해 시대적 명분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조대 후반부터 남명학파가 포함된 북인(北人)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소북(小北)계열이 선조의 후계자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획책하자, 그들은 대북(大北)계열인 이이첨(李爾瞻)·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된 바 있는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남명학파가 정국주도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철학이 명분으로 적용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 같은 상황은 광해군의 즉위명분과 남명학파의 집권명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광해군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남명학파가 주축이 된 대북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비판세력일 수는 없으며 군주의 존재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체제부정 세력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에 군자소인론을 적용하면 그들은 당연히 소인 내지 역적으로 규정되어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광해군을 축출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정권교체를 획책하는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南)을 중심으로 한 소북세력이 바로 그러했다. 그 가운데 선조의 총애를 받으며 세자교체를 주도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광해군대 제기되는 토역론(討逆論)은 남명학파의 분대론적 군자소인론이 반영된 것으로 그 같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해군을 보호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소북의 핵심세력이 대부분 제거되고, 그 과정에서 영창대군도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그의 죽음은 광해군이나 정권 핵심의 의도와 무관하게 과잉충성파가 저지른 우발적인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정국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그들이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인목대비의 극한적 반발과 그것을 기화로 정권전복을 도모하는 세력의 음모를 차단하기 위해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고 폐모(廢母)공론을 제기하게 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폐모의 공론화는 사림 일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이이첨과 허균(許筠)이 나서 유생공론을 조작하는 방법으로 공론화를 획책하게 되었다. 사실 이이첨은 처음부터 폐모를 단행할 의도는 없었다. 그는 그것이 공론화된다고 하더라도 광해군이 허락할 리가 없고, 설령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종주국인 명나라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쉽사리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폐모공론을 조작한 것은 군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조장했듯이 정국긴장을 통한 정권의 영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폐모의 실행을 주도하던 허균도 제거해 버리고 독점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면서 그는 래암의 제자로 자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명학파의 군자소인론에 입각한 정치운영론이 그의 독점적 권력장악에 철저하게 악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림정치를 표방하면서도 공론을 조작하며 배타적이고 기만적인 권력독점을 지향한 대북정권에 대한 사림세력의 반감에 편승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대북정권의 명분적 취약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반정주도 세력이 대북정권의 패륜적 행위로 내세운 폐모는 '유폐모후(幽廢母后)'를 왜곡한 것으로 실재 단행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에 의해 추진된 명(明)과 후금(後金; 淸)에 대한 등거리 외교도 명분과 실리를 감안한 현실적 방책으로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다 대북정권도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반정 직후 '무실국혼(無失國婚)'을 맹약하며 외척과의 연대를 통한 정권의 영속성을 보장받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 척신을 배제하고 사림의 공론을 토대로 정국을 운영하는 사림정치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동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그들이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자부하며 문묘종사 운동을 전개하고, 율곡의 보합론을 근거로 남인계 인물을 발탁해 외형상 서인과 남인의 견제체제를 통한 붕당정치 구조를 확립한 것도 명분상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이나 대북정권이 비록 '살제(殺弟)'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인세력의 군주축출과 정치보복은 어떠한 형태로든 명분적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비록 남명학파가 정계에서 축출당하고 학파를 표방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서인정권이 명분적 취약성을 안고 있는 한 자발적인 궤멸의 길을 걸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인정권과의 명분대결을 통해 명예와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적극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정권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보호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이 퇴계학파와 다시 연대하여 남인의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그 같은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다. 따라서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표방되는 퇴계학파는 사실상 남명학파와 연대한 영남학파라 하겠으며, 남인은 영남사림의 공론을 결집한 영남남인의 정치세력으로 간주된다고 하겠다.

  남명·퇴계학파의 그러한 연대는 서인세력의 정치적 집권에도 불구한 명분상 취약이라는 이율배반적 현실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의 적통으로 자부하는 그들의 공감대가 확보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들이 영남이라는 공론형성 범주의 국한성에도 불구하고 강한 결집력을 보이며 서인세력과 치열한 공론대결을 전개하게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연대는 분열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남학파가 강한 결집력을 갖기 위해서는 분열의 소지를 없애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남명학파의 정치철학으로 상징화된 래암의 군자소인론은 그것이 갖는 극한성의 부작용이 확인된 이상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군자·소인의 분별없이 사림의 보합만을 표방함으로써 야기된 현실의 정치적 모순의 상황을 수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서인정권에 의해 남인발탁의 배경이 된 서애의 조제탕평론을 당론으로 견지하는 것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조제탕평론은 서인과 남인의 공존과 견제구조를 지향하다 보니 그들이 의도하는 공론대결을 통한 정권교체, 곧 환국(換局)을 보장하는 논리적 기반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퇴계학파 일각에서도 갖고 있었다. 대체로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학통을 계승하는 예안사림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학통을 따르는 사림들이 그러했다. 그것은 서애가 퇴계의 수승론을 현실과 결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한데 비해 그들은 그 출발점인 분대론에 비중을 두고 원칙에 충실한 입장을 견지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명학파가 극단성을 배제할 경우 퇴계학파의 월천·학봉계열과 긴밀하게 공조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실 월천·학봉 계열로 분류되는 인물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남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월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권익창(權益昌)은 남명이 유교적 지식을 토대로 인품을 갖춘 후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도움되는 바가 있다고 한 것이나, 자질을 믿기보다 밤중에 깊이 공부에 침잠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하는 자세라 한 것을 명언이라며 그의 학문자세를 계승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학봉의 문인인 장흥효(張興孝)는 항상 경(敬)자를 크게 써두고 좌우명으로 삼는 한편, 사위이자 제자인 이시명(李時明)에게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처신을 당부할 정도로 학문적 자세가 남명의 그것과 흡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그들의 이기심성론은 수승론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분대론에 치중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남명학파로 경도되는 양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분대론과 수승론이 갖는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창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곧 분대론은 이분법적 군자소인론의 정치철학으로 계승되었으나 그것의 극단성으로 인한 시대적 한계가 확인된 바이고, 수승론은 탄력적인 조제탕평론의 정치철학으로 이어졌으나 적극적인 현실타협을 정당화되는 논리로 오용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탐구는 남명과 퇴계의 그것을 복합적으로 계승하되 그들의 본의에 근접하는 형태의 철학구조를 확립함과 동시에 시대변화에 적합성을 부여받는 새로운 정치철학을 구조화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 결과 제기된 정치철학이 바로 양시억비론(揚是抑非論)이었다. 그것은 이미 김우옹에 의해 제기된 바가 있지만 군자소인론에 가려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소인의 척결 대신 억제를 지향함으로써 정권교체로 수반될 수 있는 정치보복의 살육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라는 점에서 시의성을 인정받아 이 때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결국 영남학파 내부에는 조제탕평론을 지향하는 입장과 양시억비론을 견지하는 입장이 병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서인정권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견제냐 대립이냐 라는 입장차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곧 견제를 통한 공존과 대결을 통한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는 입장이 역학관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차이로 인해 조제탕평론자들은 서인정권에 다소 우호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었던 반면 양시억비론자들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제탕평론자 가운데 관료로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한 인물이 많은데 비해 양시억비론자의 대부분이 처사(處士)로 남아 있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차는 과거처럼 분열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안동지방에서 벌어진 병호시비(屛虎是非)와 같은 향전(鄕戰)이 보여주듯 내부적 갈등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서인정권에 대응하는 남인의 결집된 공론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미묘한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갈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효종 원년 900여 명의 영남사림이 연명한 우율 문묘종사 반대상소와, 현종 7년 송시열의 예론을 비판한 영남유림 1,100명의 이른바 의례소(議禮疏)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상소운동에는 학파의 구분없이 영남지역의 사림 대부분이 참여함으로써 결집된 공론을 과시하며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공론형성을 주도한 계열은 달랐다.

  문묘종사 반대상소의 소두(疏頭)는 학봉의 문인인 유직(柳)이었고 제소(製疏)는 이구(李)였다. 의례소를 실제 제소한 사람은 서애의 손자인 유원지(柳元之)였고 소두 유세철(柳世哲)은 유원지의 재종질이었다. 결국 종사반대소는 학봉계열의 양시억비론자들이 주도했고, 의례소는 서애계열의 조제탕평론자들이 주도했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간의 절묘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짐으로써 서인정권의 대응에 상당한 혼선을 초래하고 있었다.

  사실 의례소는 왕실의 복상(服喪)에 관한 것이자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의 견해차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사반대 상소는 사정이 달랐다. 서인세력은 대체로 율곡학파로 자부하고 있었고, 그들 정권의 집권명분은 율곡의 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기심성론의 문제점을 들어 문묘종사를 반대한다는 것은 그의 철학을 성리학적 범주에서 벗어난 사론(邪論)으로 규정하는 것이자 그를 유교의 적통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서인정권은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게 된다. 곧 영남유림의 종사반대소는 서인정권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서인세력이 모를 리가 없는 것이고, 이는 자칫 엄청스런 정치보복을 불러 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남유림은 공론형성 과정에서 가장 과격한 것으로 인정되는 소본(疏本)을 체택하여 왕에게 올릴 것을 결의했다. 그러고는 소본을 공모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내왔고, 이현일(李玄逸)의 아버지인 석계(石溪) 이시명도 보냈다. 그는 서울에서 과거공부를 할 때 서애의 제자이자 이조판서였던 우복(尤伏) 정경세(鄭經世)가 자신의 사위인 송준길(宋俊吉)과 함께 공부할 것을 권유해도 오해를 받기 싫어 거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종사반대 움직임을 감지한 서인세력이 그것을 막아주면 출세를 보장할 것이라는 유혹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소본도 채택되지 못했다. 그보다 더 과격한 소본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문경 산양(山陽)에 살고 있던 활재(活齋) 이구의 것이었다.

  이구는 원래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처가인 산양에 내려와 정착했다. 반정으로 인해 그의 가문이 몰락한 때문이었다. 그의 조부 이돈(李惇)은 원래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산음(山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남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학문의 요체와 선·악의 분별에 대해 깊이 토론하게 되었는데, 서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산해·정인홍 등이 주도한 유영경(柳永慶) 옥사에 참여한 공으로 정운원종공신(定運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대북정권 수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공신녹권에는 그의 아들인 광옥(光沃)·광한(光漢) 형제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우율(牛栗)의 학문이 유학의 적통에서 벗어난 혐의가 있어 문묘종사를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한 이구는 남명학파의 학통을 주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남명학파는 인조반정 이후 독자적인 학파를 표방하지는 못했지만, 서인정권에 대한 퇴계학파의 강경론자들과 연대하여 영남학파 내지 남인세력 형성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온건론자들과 내부적 역학관계를 가지면서도 역할분담의 방식으로 서인정권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현종이 사망하기 직전 전격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권교체를 단행한 이른바 갑인환국(甲寅換局)은 그 소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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