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주년 특집]

南冥·退溪 탄신 500주년에 생각한다

薛  錫  圭
(문학박사,경북대강사)

<글싣는 차례>

1. 남명학연구원에 바란다.
2. 남명과 퇴계의 관계 - 동반자적 경쟁관계 -

3.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 - 지리산과 청량산 -
4. 남명과 퇴계의 인품 - 剛毅直方과 剛柔兼全 -

5. 남명과 퇴계의 학문 - 누가 實學者인가 -
6.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 - 分對論과 隨乘論 -
7.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 ) - 君子小人論과 調劑蕩平論 -
8.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I ) - 共存이냐 換局이냐 -

 

3.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 - 지리산과 청량산 -

  16세기가 시작되는 1501년. 낙동강을 경계로 한 경상도의 우도(右道)와 좌도(左道)에는 조선후기 영남사림의 학풍과 삶의 철학을 규정하는 두 명의 인물이 각각 탄생했다. 경상우도의 합천 삼가(三嘉)에서 출생하여 남명학파의 종장(宗匠)으로 존숭받게 되는 조식(曺植:1501-1572)과, 경상좌도의 예안 온계(溫溪)에서 태어나 퇴계학파의 종장으로 받들어지게 되는 이황(李滉:1501-1570)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각각 학파의 상징적 인물로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탁월한 학문적 체계나 막강한 정치·사회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게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문제인‘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명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 있었던 것 뿐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유학 및 성리학의 범주 속에서 자신들의 인품을 형성함과 동시에 인생관을 확립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현실대응의 자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구조적 모순을 척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고 있던 사림에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근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은 당시 그들이 목격하고 경험해야 했던 모순된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었다. 두 사람이 살고 있던 시기의 조선왕조 사회는 그야말로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각종 정변(政變)과 왕권을 배경으로 정권을 잡은 소수의 훈구·척신 세력에 의해 초래되고 있었던 폐해가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훈척세력은 배타적이고 독점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에게 사화(士禍)의 방법을 동원해 살육을 자행하는 등 정치적 파탄을 초래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독점적 권력을 앞세워 무차별적으로 농장을 확대하며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데 주력하는 등 국가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농장확대에 따른 면세전의 증가로 인해 이미 조정에서 소요로 하는 세출이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이는 세입을 초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가중시켜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을 촉진시키고 있었다. 명종대 임꺽정(林巨正)의 난으로 대표되는 각종 민란사건은 그 소산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훈척세력이 국가경영 철학과 능력을 근원적으로 결여한데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국가적 위기극복 능력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 그들은 소규모의 왜구가 전라도에 상륙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노략질을 자행해도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있을 뿐이었다. 왜구가 스스로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내륙까지 침투했다면 나라가 망할 뻔했다는 게 당시 사림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그 같은 참혹하고 암담한 현실은 당시를 살아가고 있던 사림에게 적지 않은 고민을 안겨 주었고, 남명과 퇴계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보기 싫어 숨어서 세상을 조롱하며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한 현실을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같은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자면 먼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소상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근원적 해결책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현실에 대처하는 확고한 삶의 철학을 확립해야 한다. 거기에서 개혁의 방향이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명과 퇴계가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깊은 철학적 사색에 침잠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그 같은 학문과 사색의 무대는 다름 아닌 지리산과 청량산이 되었다. 곧 지리산이 남명학의 산실이었다면 청량산은 퇴계학의 발원지가 되는 셈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던 그 산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고 내면적 수신을 통해 삶의 철학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과 청량산은 그 규모나 산세(山勢)에 있어 모든 면이 비교가 된다. 주봉인 천왕봉이 1,915m에 이르는 등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되고 그 폭이 45km나 되는 지리산은, 높고 깊으면서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사람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산이다. 그리하여 이 산은 화담(花潭:徐敬德)이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라고 읊을 정도로 신비스럽기조차 하여 사람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했다.

  지리산 자락 삼가 토동(兎洞)에서 태어난 남명은 그 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격을 함양하는 한편, 산의 자태를 닮아 가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 산에서

請看千石鐘           非大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천 석이나 나가는
종을 보시오
큰 것으로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그 장중함이 두류산
(지리산)과 다투는 듯
천둥이 요란하게 울려도
전혀 울지를 않소

라 음미하며 웅장하고도 고고한 기상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일생동안 12차례나 이 산에 올랐던 것도 그 같은 매력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명산에 오른 자 치고 소인이라 자처할 사람은 없겠지만, 필경 군자는 군자가 되고 소인은 소인이 되는 법으로 열흘 추위에 하루 볕을 쬐었다고 득이 될 것은 없다"며 이 산을 한 번 찾은 것만으로 군자로 행세하는 것을 경계했다.

  남명은 지리산이 군자의 위용을 갖춘 산이며, 그것과 혼연일체가 될 때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군자란 속이 깊고 장중하면서도 기암절벽처럼 예리하고 곧은 면모를 보이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었다. 강직하면서도 의연하고 직선적이면서도 절도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 그의 성품은 여기서 형성되었다. 나아가 그는 만년에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덕산(德山)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안으로 밝혀야 할 것이 경(敬)이고 밖으로 단호해야 할 것이 의(義)’라며 이 두 글자를 창 벽에 써놓고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으며 내외를 관통하는 삶의 철학을 확립했다.

  반면 해발 870m의 청량산은 규모면에서는 지리산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외형상 아담하고 단정한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갖도록 한다. 남쪽 축융봉(祝融峯)을 오르다 보면 겨울에도 문자 그대로의 산이름답게 맑고 신선한 바람이 온 몸을 스쳐 지나가고, 청량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낮으면서도 넓게 펼쳐져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신재(愼齋: 周世鵬)가‘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여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산’이라 하듯이, 깎아지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은 곧은 기상을 드러내는 듯하여 누구라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우리들의 정상부분은 다시 평평하게 구성되어 암벽을 감싸고 있는 듯하여 외형상으로는 온후한 느낌마저 주고 있기도 하다.

  청량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합해지는 도산(陶山) 자락 예안 온계(溫溪)에서 태어난 이황은 그 산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철학적 진전을 모색하기 위한 탐구에 매진하는 한편, 틈틈이 이 산을 유람하면서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느니 나와 백구(白鷗)뿐"이라며 자신과 산이 일체가 되었음을 노래했다. 그리하여 그는 독서가 등산이자 등산이 곧 독서라며 청량산 곳곳을 유람하는 한편,

泉石烟霞事未寒  
暮年身誤入槐安  
那知更藉遊仙枕
去上淸凉福地山
 
냇가의 바위와 피어오르는     안개는 아직 차지가 않은데
늙으막한 몸은 꿈속의 개미나라로 잘못 들어갔네
어찌 유선침을 다시 베고 누웠는지 알았겠는가
털고 일어나 청량산 복받은 땅을 오르네

라 읊으며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려는 마음가짐을 가다듬기도 했던 것이다.

  퇴계는 청량산이 군자적 면모를 갖춘 산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닮아 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안으로는 깊은 계곡과 높은 절벽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낮고 완만한 형상을 드러내는 청량산의 모습에서 내면의 강직성과 외면의 유연성을 겸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겉으로는 온후하고 포용적 풍모를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강고한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외유내강한 성품은 여기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가 청량산을 스스로 '오가산(吾家山)'이라 부른 것도 산의 형상이 자신의 품성에 투영되어 일체화되었음을 자부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결국 남명과 퇴계는 지리산과 청량산을 배경으로 각각 독자적인 군자로서의 품성을 갖추어 갔던 셈이다. 그것은 그들이 다같이 철학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군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희구하며 그에 맞는 스스로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훈척의 소인배들에 의해 초래되고 있던 당시의 모순된 상황은 당연히 타개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타개의 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일정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었다.   

  남명은 산천재에서 성리학보다는 그것의 근원이 되는 유학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진하다, 때때로 지리산을 유람하며 깊고 높고 오묘한 학문적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꿈꾸는 사회도 모순이 없고 소인배가 사라진 유교적 이상사회였다. 그가 지리산을 유람하며 푸른 학이 산다는 유교적 인간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나선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기에 자신의 안주처를 마련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사회가 실현 가능한 것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찾지 못했다는 청학동을 자신은 쌍계사 위쪽 불일폭포가 있는 곳으로 알고 직접 찾아가 그 신비스러움을 맛보기도 했다. 그에게 이상향은 꿈속에 그려지는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상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소인들은 철저하게 척결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군자의 확고한 비판정신과 함께 소인과 정면 충돌을 불사하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가 평생을 처사로 일관하면서도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자신이 보고자 했던 이상사회를 보지 못했고 스스로 건설하지도 못했다. 그가 백성들의 처참한 삶을 목격하고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고문(古文)에 치우치다 보니 퇴계에 비해 이룬 것이 없었다고 회고한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한편 퇴계는 유학의 본질보다는 성리학의 철학적 구조 속에서 현실타개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그는 도산서당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면서 수시로 청량산에 들어가 청량정사(淸凉精舍; 吾山堂)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현실의 난국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을 성리학에서 찾고자 한 것일 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탐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중국적 주자성리학은 16세기 조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많은 성리학 이론은 사실상 자신이 살고 있던 조선의 현실에서 그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철학적으로 논리화하고 구조화한 것이었다.

  결국 퇴계는 청량산의 모습 속에서 외유내강한 그의 인품을 확립했고 그것을 성리학의 철학적 구조 속에서 체계화했던 것이다. 그가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전개하며 자신의 탄력적인 출처를 정당화하는 내용의 편지를 함께 보낸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군자가 지배하는 이상사회이기는 하지만 그에 반하는 소인은 척결의 대상이 아닌 포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군자가 우위에 있으면서 소인으로 하여금 이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현실적으로 소인과의 일정한 타협은 불가피하다. 그가 훈척정권에 소극적으로나마 참여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골짜기가 깊고 험준한데다 계곡물이 경호천(鏡湖川)과 덕천(德川)을 이루어 급하게 흘러가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강의직방(剛毅直方)의 기질을 양성한 남명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으면서도 완만한 형상의 봉우리, 계곡을 급하게 흐르던 물이 순강(循江)에 합류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청량산을 배경으로 강.유의 양면의 품성을 내외에 겸비한 퇴계의 삶의 철학은 국난과 평상시의 상황에서 각각 빛을 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남명의 확고하면서도 단호한 철학이 적용되어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사림의 통합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퇴계의 확고하면서도 포용적 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리산과 청량산에서 각각 얻어낸 그들의 삶의 철학은 어느 하나만 선택 또는 배척될 수 없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역사적 상황변화는 만고불변의 유일한 삶의 철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으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fact)일 뿐 진실(truth)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일관된 것이고, 사실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불변의 진리로 간주되는 종교가 배척당할 수 있는 것이 역사적 상황변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관통하며 지배하는 진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한국전쟁 당시 반공이념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다 남북의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는 현재 통일이념이 우위를 보이듯이 말이다. 지금도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이 함께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적 상황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삶의 정당한 방식이 그 속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산과 청량산은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이자 오늘날까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온 쌍두마차였던 셈이다.

4. 남명과 퇴계의 인품 - 剛毅直方과 剛柔兼全 -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덕산 면면산 자락. 가파르게 내려오는 산등성이에 남명의 유택(幽宅)이 자리잡고 있다. 높지 않은 곳에 있는 데도 그곳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낀다. 여느 무덤이나 다를 바 없이 조촐하게 다듬어진 그 묘소에 서면 앞이 탁 틔어 있고 지리산에서 모인 맑은 물들이 덕천을 이루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남명은 죽어서도 묘소를 찾는 후인들에게 자신의 인품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남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하고 예리한 면모와 티없이 맑으면서도 곧바른 자세가 절로 연상되는 것이다. 남명은 살아생전에도

全身四十年前累
千斛淸淵洗盡休  
塵土能生五內  
直今腹付歸流  
  
사십년 동안 더렵혀진 온 몸
천 섬의 맑은 물로
모두 씻어버린다
먼지가 다시 몸 속에
생겨난다면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며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洗心) 티없이 맑고 깨끗한 정신과 삶을 통해 이상세계 구현을 위한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청량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도산 자락. 완만하게 내려오는 산등성이에 퇴계의 유택이 자리잡고 있다. 오르는 길은 계단 탓이기도 하겠지만 별로 힘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묘소 역시 생전의 그의 검소하고 간결한 성품을 보여주듯 조촐하기만 하다. 그의 묘소 앞에도 낙동강과 합류하는 퇴계가 흘렀지만 지금은 안동댐 때문에 물이 고여 호수를 이루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람을 포용하는 온후하면서도 완곡한 면모와 조용하면서도 유연한 자세가 그 속에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已著遊仙枕        還開讀易窓  
千鐘非手搏        六友是心降

꿈에 신선이 된다는
유선침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돌아와 주역(周易)을
읽는 창을 연다
천근 무게의 종은 손으로
잡을 것이 못되는 것이니
여섯 벗만이 서로
마음이 통할뿐일세

라며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연꽃 등 자연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일상의 현실과 고요한 정신에서 삶의 지혜를 찾았다.

  남명의 인품에 대해 성운(成運)은 천부적 자질과 품행이 영명하고 도량이 높았으며, 엄정하고 확고한 자세를 유지하며 그 행동에 항상 법도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신계성(申季誠)은 그의 직선적이고 준엄한 성품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교유함이 드물었다고 회상했다. 실제 그는 사람을 대할 때도 선한 사람은 반기는 기색을 보였지만 악한 사람일 경우 원수를 보듯이 피했다고 할 정도로 호(好)·오(惡)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자 정인홍(鄭仁弘)은 그가 시류에 구차하게 복종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하지도 않았다고 전제한 뒤, 산림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세상을 자세히 살피고자 했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려 했으니 천 길을 나는 봉황이라 일컬을 만하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경(敬)을 통한 엄격한 자기수양과 의(義)를 토대로 한 확고한 분별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경과 의를 각각 상징하는 방울과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내외를 관통하는 일관된 강직하고도 준절한 강의직방(剛毅直方)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한편 퇴계의 제자 정유일(鄭惟一)은 그의 성품에 대해 남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별달리 모나지도 않았다고 전제한 뒤, 너그럽되 절제가 있었고 조화가 있되 휩쓸리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아 순수하기가 깨끗하고 질좋은 금·옥과 같았고 광명정대하기는 맑고 푸른 하늘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조호익(曺好益)은 그의 인품이 순수하고 온화하여 화기가 있었다면서도, 젊어서 요순(堯舜)시대를 구현할 의지가 있었으나 시세(時世)가 불가능함을 알고 학문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지 뜻이 나약하여 일을 기피한 때문은 아니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나아가 이국필(李國弼)은 그가 남들과 다투지는 않았지만 고관들과는 반드시 정색하여 끝까지 따져 시비를 가려내고야 말았음을 강조하는 한편, 불의를 보면 미워하되 성내지 않는 처신의 방법을 가르쳤다고 회상했다. 이로써 보건대 그는 내면적으로는 지경(持敬)을 통해 확고하고도 엄격한 삶의 철학을 확립하면서도, 외면적으로는 온유하고 포용적인 인상을 보여주는 강유겸전(剛柔兼全)으로 외유내강하는 양면을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명의 내외를 관통하는 강직한 인품과 퇴계의 강과 유를 겸비한 인품의 차이는 그들의 출처관(出處觀)의 형성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남명은 일상에 곧은 정신자세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확고하고도 분명한 태도를 견지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고금의 인물을 평가할 때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살핀 후 행사의 득실을 따졌고, 죽기 전에도 정인홍.김우옹(金宇)·정구(鄭逑) 등 제자들에게 군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에 있을 뿐이라 유언할 정도로 무엇보다 출처의리를 강조했다. 특히 그는 대장부란 처하여서는 산과 같이 무겁고 만길 절벽처럼 우뚝 서있다가도, 출하였을 경우 천 발의 화살로 만 겹의 단단한 벽을 뚫을 수 있도록 많은 사업을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 결코 생쥐를 잡기 위해 쏘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그 자신도 용을 잡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희생을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듯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은 패도정치(覇道政治)를 하는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라며 훈척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지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과 타협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퇴계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나아가는 것이〔出〕순리이고,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나아가지 않는 것이〔處〕순리라며 출과 처에도 탄력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출처에 대해 관직이 낮을 때 임금이 부르면 달려갔지만 높은 관직에 부를 때는 반드시 사양했고, 마지못해 나아가더라도 주어진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굳이 오래 머물려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출처의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은혜를 내세워 물러나지 않는 것은 군신관계가 도덕적 의리가 아닌 관직과 재물로 맺어진 때문이라 비판했다. 이에 따라 이덕홍(李德弘)도 그가 도(道)에 만족해서 세상을 비루하게 여긴 것이 아니고 출과 처의 사이에서 열심히 노력했다며, 성현의 출처는 시운의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지 사람의 힘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고 옹호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소수의 간신배들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훈척정권 하에서 진퇴를 반복한 것은 파행적 정국운영이라는 현실적 상황에 의해 부득이했던 것으로 내면적으로는 확고한 출처대의를 확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출처관의 차이는 사림에 의해 소인배로 규정된 훈척세력의 정국주도라는 당시의 모순된 상황에 처한 그들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폐단을 초래하면서도 그것을 비판하는 사림에게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훈척정권에 동조할 수 없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응해야 하는 현실적 요구에 직면하여 타협을 배제하며 정면 대응하거나 사화를 예방하기 위한 다각도의 방안을 모색하는 선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명종 10년 남명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문정대비를 '궁중의 일개 과부'라 한 직설적 표현에 대해, 퇴계가 준절한 언론행사에는 공감하면서도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손하지 못한 혐의가 있다는 견해를 표명한 것은 두 사람의 대응방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그들의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대응태도의 차이는 제자들의 공론형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명종 20년 8월 권심행(權審行)을 중심으로 한 퇴계의 제자들과 김우굉(金宇宏)을 중심으로 한 남명의 제자들이 안동 경재소(京在所)에 모였다. 훈척정권의 후견인인 보우(普雨)의 축출을 위한 행동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문정대비가 사망한 이후로 조정에서는 이미 남명과 퇴계의 문인들이 주축이 된 언관들이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집중 탄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언관들을 직접 지원하고 싶었지만 훈척정권에 역공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유생들의 정치참여가 수용되고 있는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조정의 시비나 관료의 탄핵에 개입하는데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가의 안위(安危)'와 '오도(吾道;유학)의 성쇠'에 대해 유생들은 말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승려인 보우의 축출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언관과 유생들이 훈척정권의 척결에 역할분담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공조를 이루게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유생들 사이에서도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곧 권심행 등 퇴계의 제자들의 주동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나가버리는 공관(空館)을 단행한데 반해, 김우굉 등 남명의 제자들은 전후 22차례에 걸쳐 보우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리는 한편 대궐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활동에는 퇴계와 남명의 견해가 크게 반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유생들의 집요한 상소와 연좌시위에 남명이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가 평소 훈척정권에 대해 극한적 반감을 갖고 있던 점이나 제자들에게 사지가 분해되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말 것을 촉구한 점 등으로 미루어 그의 개입 내지는 그와의 교감가능성이 점쳐질 수 있다. 나아가 김우굉이 소두가 된 상소에 참여하고 있는 44개 읍의 유생들이 대부분 경상우도 유생이었다는 점도 그것이 최소한 그의 묵인 하에 전개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과거 훈척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는 그가 여기에서 다시 전면에 나설 경우 자칫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제자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숨기고 있는 것일 뿐 사실은 그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안동과 멀지 않은 예안에서는 보우처벌에 대한 유생들의 활동방향을 두고 퇴계 등 향촌의 원로와 제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퇴계는 유생들이 보우의 축출을 촉구하는 상소는 유학의 보호의 차원에서라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 시기가 적절하다는 점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는 대궐 앞에서의 연좌시위나 성균관에서의 수업거부와 같은 과격한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것이 오히려 군주나 훈척세력의 반발을 초래하는 빌미가 되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소의 표현도 극단적 내용을 삼갈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퇴계의 조언에 조목(趙穆) 등 그의 핵심제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훈척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격렬한 방법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의가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전후 사정으로 비추어 보우의 처단을 촉구하는 유림의 상소를 왕에게 봉입하되 납득할만한 조치가 없을 경우 공관을 단행한다는 쪽으로 정리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명과 퇴계의 제자들이 안동 경재소에 모인 것도 각기 그들이 지향하는 행동방향을 조율하여 효율적인 공세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들의 활동은 조직적이면서도 단계적인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우선 퇴계학파가 중심이 되어 보우를 주살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왕이 이에 대해 완강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그들은 곧바로 공관에 돌입했다. 공관소식을 전해듣고 놀란 왕이 승지를 그들에게 보내 성균관에 다시 들어올 것을 지시하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주장은 수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는 남명학파가 나서 그들의 주도로 파상적인 상소공세를 펴는 한편, 대궐 앞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언관과의 역할분담을 통한 그 같은 조직적인 공세에 의해 결국 명종도 손을 들고 말았다. 윤원형의 관작을 삭탈함과 동시에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세는 이후에도 계속되다 윤원형이 자살하고 보우가 제주도에서 피살되어 훈척정권의 붕괴가 확인된 다음에서야 종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훈척정권의 와해와 사림정권의 수립이라는 정권교체는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의 효율적인 연대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어느 일방의 주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거기에는 그들이 외형상 보여주고 있던 현실판단의 미묘한 견해차가 극복되면서 절묘한 조화가 이루어진 것이 커다란 작용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차이는 궁극적으로 남명과 퇴계가 가진 인품과 삶의 철학에 근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남명의 강의직방을 토대로 한 확고한 이분법적 자세와 퇴계의 강유겸전을 통한 탄력적 자세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성품상 차이가 학파의 분화를 초래하는 대신 오히려 조화를 이루어 상승작용을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사실 이분법적 자세는 선악의 가치분별에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나, 포용력이 결여된 한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탄력적 자세는 포용을 통한 공존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물론 훈척정권의 붕괴라는 결과는 그들과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 남명학파의 가치분별적 성향이 크게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훈척세력에 의해 왕권을 보호받고 있던 명종이 그들과 결별하며 사림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은 퇴계학파의 포용적 성향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남명과 퇴계와 인품이 동질성과 함께 상호 보완성을 갖는 것이자 그들이 주축이 된 학파 역시 그러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부하고 배타적 아집에 빠질 경우 돌아오는 결과는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해 뿐이었다. 그러한 교훈은 인조반정으로 정국주도권을 상실함과 동시에 서인정권에 의해 철저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경험이 있는 남명학파에게 특히 실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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