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주년 특집]

南冥·退溪 탄신 500주년에 생각한다

薛  錫  圭
(문학박사,경북대강사)

<글싣는 차례>

1. 남명학연구원에 바란다.
2. 남명과 퇴계의 관계 - 동반자적 경쟁관계 -

3.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 - 지리산과 청량산 -
4. 남명과 퇴계의 인품 - 剛毅直方과 剛柔兼全 -
5. 남명과 퇴계의 학문 - 누가 實學者인가 -
6.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 - 分對論과 隨乘論 -
7.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 ) - 君子小人論과 調劑蕩平論 -
8.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I ) - 共存이냐 換局이냐 -

1. 남명학 연구원에 바란다.

  내년 2001년은 남명이 이 땅에서 탄생한 지 5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면서도 퇴계가 탄생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들의 탄신을 기념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준비작업이 그들 학통의 중심인 진주와 안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남긴 족적이 현재에도 여전히 크게 남아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공자나 석가나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다. 그들은 분명 현재 살아 있다. 그들이 종교적 교조가 아닌 학자였음에도 이토록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살아 있어도 어떻게 살아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들은 과연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안동지방에는 오래 전부터 우스개 같으면서도 결코 웃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얘기 하나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사망했다가 되살아 난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이 죽어 있는 동안 잠시 저승구경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퇴계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난 퇴계는 그야말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온통 찢어져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데다 살은 군데군데 파여져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평소 퇴계의 생활습성이 검소한데다 간소한 것을 좋아했다고 듣긴 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무슨 고생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지경이 되었는지 그 사람이 물었단다. 그러자 퇴계가 지상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에 내 피와 살을 뜯어먹고 사는 인간들이 저렇게 많은데 내가 어찌 온전하겠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지금 안동에서는 안동대학교 모연구소를 중심으로 퇴계 탄신 500주년을 계기로 대대적인 행사를 기획 중이다. 1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중간보고서에 의하면 국제유교문화제 개최뿐만 아니라 '새천년, 퇴계와의 대화'를 주제로 마당놀이 등 각종 이벤트성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거창한 행사비용 조달에는 자치정부 예산과 함께 국가예산 지원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기념행사 준비는 주최측의 판단과 사정이 충분히 고려된 것이기 때문에,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국외자의 위치에서 그것을 지켜보노라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저승에서의 퇴계의 그 같은 말을 결코 지울 수가 없다.

  퇴계 관련 논문이 천 편을 넘게 헤아릴 정도로 방대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마당에 왜 그러한 자조적 얘기가 다른 곳도 아닌 안동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그 많은 연구성과가 결과적으로 퇴계의 학문과 삶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퇴보시켰다는 자성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퇴계학 연구자들은 그의 우산 속에 안주하며 그의 학문을 자신의 출세나 입지확보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500년전 퇴계가 갖고 있던 사고와 학문의 범주에서 맴돌 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저승에서 퇴계는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고, 16세기의 중세적 퇴계는 있어도 21세기의 현대적 퇴계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탄생을 기념한답시고 퇴계학의 국제화를 표방하고,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밤낮없는 축제마당을 벌인다면 저승에 있는 퇴계의 표정은 과연 어떠할까?    

  이런 말은 퇴계 탄신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구태여 여기서 먼저 하는 이유는 남명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데 혹시 참고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남명학연구원을 비롯한 관련기관을 중심으로 발족한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회'가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구체적인 기획안을 보지 못해 말할 상황은 아니다. 단지 퇴계의 경우를 교훈삼아 저승에 있는 남명의 지금 형상은 과연 어떠할 것이며, 그가 기념사업회를 지켜보며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죽어보지를 못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분의 성품에 비추어 추측컨대 모르면 몰라도 이렇게 충고할 것이다. "이제 나의 진면목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테니, 성대한 현양사업보다는 나의 학문과 삶의 철학을 올바로 승화시켜 도덕과 양심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현하는 초석으로 삼는 방안을 모색하는게 어떻겠는가?"고. 연구사 정리 하나 없을 정도로 체계화와 정체성(正體性)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데다,  퇴계학이나 율곡학과 같은 인접학문과의 유기적 관계보다는 배타적 관계 속에서 남명학의 위상정립에 치중하고 있는 현실을 남명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남명과 퇴계는 동년배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처지면서도 막상 이승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저승에서조차 만나지 않고 여전히 서로 등을 지고 있을까? 그들이 살아생전 만나지 않았던 것은 미묘한 경외심과 경쟁심이 작용했던 것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편지나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적 방법으로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보완하며 남모르게 서로에 대한 친숙성과 신뢰성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을 숨겨주기 보다 그것을 지적하여 비판해 주는 사이가 진정한 친구인 법이다. 더욱이 남명의 확고한 배타적 성품은 소인배만을 표적으로 한 것이지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성품이 퇴계에게 적용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두 사람이 저승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며 나란히 정원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연상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의 학문의 접점을 찾아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중국적 주자성리학이 영남성리학 또는 조선성리학으로 변모하여 발돋움하게 되는 양대 지주를 구축했음을 자부하고 있음직도 하다.

  그런 그들이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를 별도로 준비하고 있는 지금의 현상에 대해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퇴계탄신 기념행사 중간보고서에는 '율곡학·실학에서 본 퇴계학' 부분은 있어도 '남명학에서 본 퇴계학'은 빠져 있다. 그 의도가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퇴계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축제분위기를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축제가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퇴계학이 환골탈태하는 계기로 삼기 보다, 퇴계학만이 불변의 완성된 학문이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남명학과 퇴계학은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서로의 학문자세에 대한 부단한 비판을 통해 이룩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의 학문이 종교적 성격을 갖는 만고불변의 신성불가침한 학문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변화에 따라 비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자기변신을 도모해야 생명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그 같은 자세가 각각의 학맥을 잇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고, 미묘한 경쟁 속에서 공존의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부단한 자기변신의 결과 그들은 오늘날처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등의 엉뚱한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남명이나 퇴계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서슬퍼런 얼굴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반대로 "니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으로 대응했을까? 아니면 그런 비판에 따른 한계를 자각하고 서로 힘을 합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각도의 방안을 모색했을까? 전례없이 전통에 대한 도전이 다방면에서 만만찮게 대두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자기변화를 도모하지 않고 공존을 지향하지 않는 전통의 운명은 과연 어떠할 지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명학은 인조반정 이후 단절되었다가 지금에 와서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인정권의 탄압 속에서 퇴계학파로 표방된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남인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며 면면히 생명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퇴계학파가 율곡학파의 서인정권에 대응해 강력한 견제세력의 위상을 확보하고, 잠시나마 정권교체로 정국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명학파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남명학파가 서인세력의 혹독한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끈끈하게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퇴계학파와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남명학이나 퇴계학이 앞으로도 생명력을 갖고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학문의 경쟁과 조화 속에서 일차적으로 영남학을 태동시켜 한국학으로 승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작년 경북대 퇴계연구소와 경상대 남명학연구소가 주관하여 '퇴계와 남명의 만남'을 주제로 시도된 바가 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학술대회는 서로의 학문의 특성만을 부각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만남에 의미를 찾았을 뿐, 당초 목표로 한 동반자적 협력 및 경쟁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하는 등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남명학이나 퇴계학에 대한 작금의 연구가 두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서로의 담장에 안주하며 그것을 높이는데 기여했을 뿐, 그것을 허물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협력관계를 전혀 모색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지역감정'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에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해소되어야 하지만, '지역경쟁'은 자신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오히려 조장되어야 한다. 학문간 감정적 대립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선의의 경쟁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남명·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는 학파간 우열을 판가름하고 분열을 촉진하는 감정적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명학과 퇴계학의 동반자적 관계를 확인하는 진정한 축제마당이 되어야 한다. 경쟁 속에서 조화를 모색하는 공동의 축제마당이 펼쳐져야 한다. 그것이 저승에서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던 남명과 퇴계가 누더기를 벗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자, 남명학과 퇴계학이 다같이 21세기의 영남학과 한국학을 주도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부여받는 길이다. 남명학과 퇴계학을 넘나들며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기생충 한 마리가 우선 남명학연구원에나마 주제넘게 드리는 고언이다.   


2. 남명과 퇴계의 관계  - 동반자적 경쟁관계 -

  1570년 12월 8일 밤,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세찬 눈바람이 산천재(山川齋) 문을 부술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리 지리산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지만 낮까지도 햇살이 비치며 겨울답지 않은 멀쩡하던 날씨였다.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동사(凍死)하는 사람은 없어야 할텐데." 예나 다름없이 가난에 찌든 백성을 걱정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리던 남명의 머리 속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이 이렇게 통곡하다시피 하는 것을 보니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은 아닐까? 한낱 기우였으면 좋을텐데. 그러나 그의 예감은 불행하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예안 온계에서 퇴계의 임종소식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남명의 심정은 허탈하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퇴계가 남긴 족적을 생각하면 이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겠지만, 남명의 그 말은 가슴에 파고드는 비수로 인한 신음과 같은 소리였다. 그만큼 퇴계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동년배이자 같은 경상도 땅에 살면서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처지면서도 막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지척이 천리라고 했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못 만날 이유도 없었는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70년 동안 만남의 기회를 미루기만 하도록 했을까? 물론 저승에서야 만나겠지만 얼굴도 모른 채 퇴계를 보내야 하는 남명의 심정은 가족을 떠나 보내는 것만큼이나 찢어지듯이 아프기만 했다. "조만간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남명이 퇴계의 임종소식을 듣고 가졌을 법한 솔직한 심경이었다. 남명은 그렇게도 내심으로는 퇴계를 만나고 싶었고 할 말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한 심정은 먼저 이승을 하직하고 떠나는 퇴계도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그러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생동안 만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었을까? 물론 그들은 서로 등지고 살만큼 원수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학문이나 이념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들 사이를 왕래하며 배운 제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만날 시간적 여유가 없을 정도로 각자의 갈 길이 바빴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당대 사림의 학풍을 주도하던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은 것은 외부적 요인에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 이유가 그들 내부에서 찾아진다면 여기에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쟁심과 경외심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경원시하며 만나기를 기피하면서도 학문적 우열을 다투는 대립적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잘못을 비판하고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보완적 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상대방의 지적과 비판에 직접 나서 반박한 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단지 거기에는 그들의 성격에 따른 비판의 방식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남명은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는 식의 분명한 성품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퇴계에게 직접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등 직선적 방법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이에 반해 퇴계는 남 앞에서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명과 입장이 달라도 직접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보다는 남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의 우회적 방법을 주로 선택했다. 이러한 차이가 그들이 서로 만나기를 기피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겠지만, 방법이야 어떠하든 그러한 자세는 그들이 상호 신뢰감과 친밀감을 갖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간헐적이지만 상호 견해차를 드러내며 비판하게 되는 사정은 어디에 있었을까?

  남명과 퇴계는 원시유학에서 성리학을 관통하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근간으로 삶의 철학을 확립했고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학문을 삶의 철학 형성에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서로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남명은 유학의 학문 및 사상체계는 주자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간주해 더 이상의 저술이 필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더 이상의 저술은 유학의 본질을 훼손할 뿐으로 그것이 지향하는 도덕적 이상사회 건설만이 후세에게 지워진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많은 유학관련 서적을 읽도록 장려했고, 스스로도 독서를 통해 선현의 말씀 가운데 귀감이 될 만한 것을 일일이 기록하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겨하지는 않았다. 자의적 토론과 해석이 선현의 본의를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유학경전을 모범으로 하여 그에 입각한 실천방안을 수립한 교과서적인 골수 유학자였던 셈이다. 그가 강조하는 실천은 유교적 이념의 현실적 적용을 의미하는 실행이지, 그 범주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표방하며 실용성을 지향하는 실천은 아니었다. 그는 유교적 실천만으로도 충분한 실용성이 보장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퇴계는 제자들과 부단하게 토론을 전개하는 한편 특히 성리학에 관한 많은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러한 그의 자세에는 학문이란 물과 같아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으로, 부단한 해석을 통해 흐르게 해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가 기대승과의 성리학적 이기심성 논쟁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논쟁은 각자의 삶의 철학을 성리학의 우주적 논리에 적용하여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초래될 수 있는 해석의 자의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남명이 유학의 본질을 천착하며 그에 토대를 둔 원칙적인 삶의 방식을 견지하고 있었다면, 퇴계는 활발한 토론을 통해 새로운 논리개척으로 탄력적인 삶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분법적 가치구분에 치중하는 주자성리학의 고수 내지는 응용이라는 그들의 관점상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성장하면서 형성한 강의직방(剛毅直方) 내지 강유겸전(剛柔兼全)의 인품상 차이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남명이 퇴계에게 편지로 기대승과의 논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 것은 그것의 사변성과 관념성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논쟁의 장기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유교적 가치기준의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는 충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칠정을 매개로 한 이기심성 논쟁을 전개한 퇴계와 기대승의 관심의 본질은 성리학의 철학적 구조화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출처(出處)의 문제를 성리학적 범주에서 해결하려는데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논쟁을 통해 각자의 출처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호익이 퇴계의 출처를 옹호하면서 그에 이의를 제기한 기대승을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 비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명은 유교적 가치기준에 입각한 출처의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는 기대승의 학문적 자세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기대승은 논쟁과정에서 선악(善惡)을 겸한 기(氣)의 작용성을 강조함으로써 모순된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선(純善)한 군자의 리(理)가 지배하는 세상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기는 궁극에 소멸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남명으로서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기대승의 주장은 현실에 아부하여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의 자기변호에 불과한 것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남명과 기대승이 살아생전 원수같이 서로 미워하며 상종하기를 거부했던 속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명의 그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기대승의 주장을 단호하게 꺾지 않고 설득으로 일관하는 퇴계의 자세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작심하고 퇴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성리학의 철학적 궁구보다는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빗자루가 청소하는 도구이며 그것을 갖고 청소를 할 줄 알면 됐지 거기에 무슨 철학적 논리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퇴계에게 출처의 원칙이 정해져 있으면 실제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면 되는 것으로, 그것을 우주적 원리에 입각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할 필요까지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는 퇴계의 제자 금란수가 찾아왔을 때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재차 강조하며 반드시 전하도록 당부했다.

  퇴계는 남명의 출처관에 원론적으로 동감하고 있었지만, 선·악의 이분법적 가치기준만으로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치판단 없이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는 기대승의 논리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퇴계의 본질적 고민은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양극의 입장을 포용하는 새로운 출처의리를 확립해야 하는 과제가 그에게 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군자〔理〕가 지배하는 사회건설을 지향한다는 점에 남명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명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대승과의 논쟁을 중단하는 한편 제자들에게도 남명의 편지를 보여주며 평생토록 명심할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기준마련을 위한 유학의 철학적 탐구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칙과 도리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유학의 본질을 왜곡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었다.

  결국 남명과 퇴계는 다같이 도덕적 가치가 지배하는 유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하는데 목표를 두고 그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남명이 전통적인 유학의 가치기준을 통해 현실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면, 퇴계는 현실문제에 비중을 두고 유학적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남명이 만년에 "퇴계의 학문은 금문(今文-성리학)에 비중을 둠으로써 성취한 바가 있었으나, 나는 고문(古文-유학)에 치우쳐 이룬 바가 없었다"고 평가한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의 학문이 실용적 면보다는 원론적 경향이 두드러짐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곧 퇴계의 성리학적 해석이 우주의 원리를 토대로 인간심성의 다양성을 찾아내 그 가운데에서 탄력적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었다면, 남명의 유교경전 탐구는 인간으로서의 당위의 도리를 확인하여 원칙적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구현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소인이 지배하는 훈척정권에서 퇴계가 다소의 운신의 폭을 확보한 것과는 달리 남명이 운신의 여지를 마련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그들의 학문이 동질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의 적용방법에 있어 시각을 달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퇴계가 남명의 학문경향을 두고 노장(老莊) 또는 육왕학(陸王學)에 물들은 이단(異端)의 혐의가 있다는 지적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실제 퇴계는 그런 지적을 한 적이 없었으며, 단지 남명의 계부당명(鷄伏堂銘)을 간접적으로 얻어보고 "그 설이 끝간데 없이 넓고 아득하여 노장의 글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고 했을 뿐이다.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그것은 분명 남명의 사고체계가 심오하다는 표현이 될 지 언정 남명의 학문방향을 둘러싼 논란의 매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 퇴계는 남명의 시를 얻어보고는 일상성보다는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쳐 있다(例甚奇險)고 평가하는 등 남명의 원칙에 투철한 삶이 현실과 괴리된 측면을 지적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명의 학문성향에 대한 논란은 남명학파에 의해 유학적 이념에 투철하지 못한 것으로 지목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 의한 역공세이거나, 아니면 남명학파의 과잉반응 내지는 역설적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문묘종사를 실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학문과 삶의 철학은 이질적이지도 않았고 대립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독자적인 학문방법으로 각각의 학문의 한계를 극복하여 중국적 유학이 한국적 유학으로 새로이 태동하는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곧 남명은 치인(治人)의 학문으로 인정되던 전통유학의 경전연구를 토대로 스스로의 사유체계를 확립하여 수기(修己)의 방안을 개척함으로써, 형이하학의 유학에 철학성을 가미하여 명실상부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퇴계는 수기의 학문으로만 간주되던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를 통해 그 속에서 치인의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형이상학의 성리학을 현실과 연계하여 또다른 '수기치인'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중국적 유학과 성리학이 갖고 있는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여 고금을 관통하는 학문체계 수립이 가능해지게 됨과 동시에, 철학성과 실용성이 겸비된 진정한 한국적 유학체계가 확립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제 남명과 퇴계에게 남은 것은 그들이 독자적 탐구를 통해 확립한 각각의 학문체계를 하나로 묶는 접점을 찾아 영남학뿐만 아니라 한국학으로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간접적으로 상호 조언과 비판을 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직접 만나서 논의를 통해 합일점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성을 남명과 퇴계가 모두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야 그들의 본의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알력을 벌이고 있는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 힘을 합쳐 그들의 학문을 발전 내지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퇴계의 부음을 전해들은 남명이 허탈해 하고 못내 아쉬워한 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긴장된 관계이기는 했지만 서로의 학문에 관심을 가져주고 또 본질과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비판적 시각에서 조언을 해주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것을 털고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며 서로의 합일점을 찾아야 할 단계가 아닌가.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남겨둔 채 퇴계는 훌쩍 가버린 것이다. 퇴계가 남기고 간 공백은 남명에게는 가족의 그것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사실 퇴계가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고, 자신이 있었기에 퇴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가 힘을 얻어 이제까지 살아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퇴계의 장례를 치른 얼마 뒤 결국 남명도 병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는 제자들의 수개월에 걸친 병수발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1572년 2월 8일 이 세상과 하직했다. 저승에서 빨리 퇴계를 만나 회포를 풀고 그들이 못다한 일을 이루려고나 하듯이.  

                  [다음호에 계속]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