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南冥·退溪 탄신 500주년에 생각한다(3)

薛  錫  圭
(문학박사,경북대강사)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글싣는 차례>

1. 남명학연구원에 바란다.
2. 남명과 퇴계의 관계 - 동반자적 경쟁관계 -

3. 남명학과 퇴계학의 산실 - 지리산과 청량산 -
4. 남명과 퇴계의 인품 - 剛毅直方과 剛柔兼全 -
5. 남명과 퇴계의 학문 - 누가 實學者인가 -
6.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 - 分對論과 隨乘論 -

7.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 ) - 君子小人論과 調劑蕩平論 -
8. 영남학파의 정치철학( II ) - 共存이냐 換局이냐 -

 

5. 남명과 퇴계의 학문 - 누가 實學者인가 -

  지금 우리 나라 역사학계와 철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해괴한 요술방망이같은 용어 하나가 있다. 모든 연구자들이 이 용어의 환상에 빠져들어 있다. 자료가 충분하든 말든 설득력이 있든 없든 모든 결론을 여기에다 갖다 맞추면 만사 형통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기를 쓰고 덤벼들고 여기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그래야 자신의 연구대상이 빛을 발하고 덩달아 자신도 학자다운 학자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논문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것이다. 그 요술방망이같은 용어는 다름 아닌 '실학(實學)'이라 일컫는 것이다. 현재 실학만큼 만능으로 인정받는 역사적 용어는 없으며 그러한 칭호가 붙어야 위대성에 설득력이 가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그 선구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더더욱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율곡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가 도덕적 가치의 리(理)보다는 현상적 가치인 기(氣)의 작용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현실적 실용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며 실학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또 퇴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호 이익 등 근기남인 실학자들이 그의 학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를 실학의 조종이라 주장한다. 그러한 경우는 남명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가 성리학의 이기심성 관념논쟁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실천을 강조했고 백성들의 고통해결에 깊이 고민했다는 점을 근거로 진정한 실학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각각의 주장들이 모두 설득력이 있다 치고 그것들을 모아 정리해 보면 과연 어떤 논리가 성립될까? 그들이 실학의 개조면 그들의 학문적 토대가 성리학에 있는 만큼 근원적 개조는 주자(朱子)가 된다. 주자의 성리학 체계는 유학에 토대를 두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조선후기 실학의 원조는 공자(孔子)가 되는 셈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실학의 역사성은 전혀 부여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인과관계와 현상을 고려하기 보다 자신의 연구대상의 부각에만 집착하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실학이 진정한 학문의 모범으로 역사의 전환을 주도한 원동력이라고 보는 용어 자체에 대한 환상이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조선후기 실학이 갖는 본질과 구체적 실상에 대한 기본적 이해보다는 부정적 현실을 타개하고 역사의 신기원을 연 대표적 사조라고만 간주하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숲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나무만 바라보고 살핀 결과였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유학은 관념으로 봉건적인 것이고, 실학은 실용으로 근대적인 것이라며 상호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향조차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실학의 원래의 뜻은 '실용성을 지닌 학문'으로,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보편적 개념일 뿐이다.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역사의 진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이념 내지 학문이 바로 실학인 것이다. 고대국가 형성의 지주가 되었던 불교가 그랬고, 중세적 정치체제 확립에 기여했던 고려시대 유교가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불교와 유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수 있는 실학으로 간주되었다. 황금만능이 지배하는 오늘날 사고에서야 물질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 실학으로 용인되겠지만,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실학은 시대에 부합하는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시대 위정자들이 관념적 가치에만 몰입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에게 백성의 안위를 위한 사회.경제적 문제는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새삼스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면 조선후기에 대두하는 실학이 역사적 위상을 확보한 것으로 인정하자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논리상 그것은 성리학의 말폐를 타파하고 신질서 수립을 위한 대안적 이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화를 촉진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사의 대전환을 초래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실학이 환상에 부응할 정도의 역사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실학에 대한 대부분 연구의 결론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이해에는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실학자들은 조선왕조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대해 부정적 내지는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성리학적 질서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리학적 사고체계에서 전혀 벗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당시는 윤휴와 박세당이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것처럼 성리학적 이념이 강고하게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실학자라 평가되는 인물 가운데 거기에서 벗어난 혐의를 받거나 시비에 말려든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한 그들에게 체제변혁을 위한 대안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비판적 자세를 가졌다면 그것은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것일 뿐이다.

  둘째,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주장에 봉건적 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 진보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실학의 개혁성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실학자들은 농업과 상업상에 있어 적지 않은 개혁안을 제시했다.

  먼저 농업의 경우 유형원의 정전제, 이익의 한전제, 정약용의 여전제, 서유구의 둔전제 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개혁안은 조선왕조가 안고 있는 농업구조상의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개혁안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중국 고대에 이미 시행 또는 거론된 적이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 나라 국가 경영자들은 그것들의 존재나 효용성을 모르고 있었을까?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모든 것을 중국의 경우를 모범으로 삼아오던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실제 이전에도 그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 그들의 기득권 보호가 전제되었지만, 거기에는 중국의 환경이 우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조선왕조의 농업구조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발상전환을 통한 새로운 것에서 모색하지 않고 중국의 경우를 토대로 하여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학은 중국의 경험을 종합하여 정리한 고증학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진보적 사고에 입각한 새로운 사조로 간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상업상의 문제해결을 위한 방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농억상 정책을 표방한 조선왕조는 중앙의 육의전(六矣廛) 외에는 일체의 상업활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이래 향촌에는 정기시장인 장시(場市)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흉년을 당한 농민들이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조성된 장시는 이후 '장돌뱅이'라 불리는 전업상인들이 이를 주도하면서 왕조의 금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전국에 1,052개의 장시가 개설되고 있었다. 나아가 그것은 5일 간격으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인근의 장시들이 개시일을 조정하면서 연계하여 5개의 장시가 모여 상설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춤과 동시에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이래 자연스럽게 대두하는 그 같은 추세에 따라 조정에서도 금압정책이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장시에 출입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둬 국가예산에 충당하려는 전향적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상업자본의 축적을 통한 자생적 자본주의화 경향을 조정이 수용한 셈이다.

  그런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장시가 번성함으로써 놀고먹는 자들이 지나치게 늘고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각기 다른 날 열리는 인근의 장시를 모두 같은 날 개설하도록 하여 5일에 하루만 장시에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장시의 정비를 내세워 발전추세를 오히려 막고 있는 셈이다. 이는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켜 통치의 효율화를 꾀하는 조선초기이래 위정자의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봉건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고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 거기에서 벗어난 근대 자본주의적 진전된 사고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실학자들이 제시했다는 개혁안은 체제변혁이 아닌 정비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실학이 한국역사 전환의 전면에 서려면 그것을 주도할 위치에 있거나 세력기반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근대화의 주역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당시 보수적인 집권세력에 비판적인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흔히 근기남인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그들이 강력한 공론적 기반을 갖고 있던 영남남인과 교유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으로 연대하고 있었다면 그 유명한 '만인소(萬人疏)'를 배경으로 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공론대결을 전개했을 것이지만 그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실학자가 주축이 되어 밑에서부터 일고 있는 개혁요구를 체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장치가 결여된 셈이다.

  요컨대 조선후기 실학은 18세기 조선왕조가 갖고 있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방책을 새로운 이념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유학적 질서의 정리와 체계화 속에서 찾았다. 따라서 거기에 근대적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유학 내지는 성리학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범주에서 변화를 모색했던 것이지 성리학을 말폐로 규정하여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실학은 18세기의 변화를 요구하는 하나의 사조로서 대두한 것일 뿐 한국사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주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성격의 실학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국의 토지제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조정이 봉건적 모순의 극복방안으로 대동법이나 균역법과 같이 조세체계의 정비에 집중하고 있는데 대해 토지소유 관계의 변화도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었다.

  정약용을 발탁한 정조(正祖)가 실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그들과 일정한 보조를 같이했던 것은 군주로서 당연히 살펴야 할 변화의 내용을 직시하면서 여타 군주보다 밑으로부터의 요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 체제변혁을 통한 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혁신적 사고를 가진 것은 틀림없지만 일차적으로 그는 조선왕조 체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군주의 위치에 있었다. 정조가 새로운 왕조의 창출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그가 추구한 변혁의 본질은 성리학의 범주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그에 의해 추진된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성리학에 근거한 문예부흥이지 새로운 사조를 포용한 창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실학의 역사성이 지나치게 부각되다 보니 조선왕조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정체성(正體性)조차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실학의 역사성을 강조한 논문치고 조선시대 역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출발하는 것이 없다. 조선시대를 관통한 지배이념인 성리학이 관념적이고 비실용적이며 반역사성을 지닌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내재한 자발적 변화를 추구하는 역동성을 무시해 버린 채 말이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멸망의 책임은 성리학의 정체성(停滯性)에 있는 것으로만 강조하지, 그것이 조선왕조가 세계 근세역사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518년의 장구한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율곡도 마찬가지지만 남명이나 퇴계는 결코 18세기에 대두하는 실학자의 원조는 아니었다. 그들은 16세기의 시대적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독자적 방책을 제시하면서 독자적 삶을 살아갔던 자기 시대의 실학자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당시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적 사고를 뛰어넘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것이 아닌 자신의 시대를 독자적 가치판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각각의 학파의 종장이 된 것은 그들의 삶의 철학이 정당성을 갖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면서도 다양한 삶의 방식이 모색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그것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는 것은 16세기 그들의 실학이 시간을 관통하는 불변의 것임을 고집하지 않고 시대적 환경에 적응하는 자기변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들의 삶의 철학도 성리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 얻어낸 것으로 성리학 내부에서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이미 그들이 보여준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법전과 같이 틀에 박힌 것이 아니었듯이 그들의 철학도 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16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의미를 부여받을 뿐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의 철학에서 오늘날 우리가 얻을 것은 당위론적이고 시대적 가치를 부여받는 현명한 삶의 방식이지, 그것을 답습하는 전근대적 맹종 또는 현창을 통한 시대착오적 계승은 아닌 것이다.

  사실 16세기가 시작되는 1501년 남명과 퇴계와 같은 경쟁자가 출현한 것은 조선왕조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있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인해 왕조의 체제유지를 위해서만 기능하던 성리학이 도덕적 가치를 전제로 한 삶의 방식을 설정하는 명실상부한 실용적 학문으로 발돋움하면서 체계화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훈척세력의 국가경영 철학부재에 따른 혼돈의 시대를 마감하고 확고한 가치기준의 정립을 통한 국가의 정체성 확립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왜란과 호란 등의 국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내부적 건전성을 보장하는 그 같은 안전장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17세기 서.남인 사이에 전개되는 이기심성 논쟁은 국가경영의 도덕성 제고를 위한 것이라면, 복상(服喪)논쟁은 전후 예적(禮的) 질서 재정립을 위한 과정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국가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부정.비리와 같은 어떠한 사회병리 현상도 쉽게 싹틀 수 없었던 것이다. 남명학과 퇴계학의 역사성과 실학성이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고 하겠다. 이는 결과적으로 도덕적 가치대신 물질적 가치가 지배함으로써 물질추구의 경향을 실학으로 간주하는 현시점에서 그것들이 역사성을 부여받으며 실학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남명학과 퇴계학이 중세적 관념학의 인상에서 벗어나 함께 존재가치를 보장받고 생명력을 유지한 요체였다.

 6. 남명과 퇴계의 삶의 철학 - 分對論과 隨乘論 -

  성리학은 그 명칭이 보여주듯 인간의 심성과 우주의 이치가 원리상 일치한다는 점을 전제로 제반 현상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순선(純善)의 리(理)와 선악(善惡)을 겸한 기(氣)를 도구로 하여 인성의 본질을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성(人性)을 우주적 원리에 적용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기심성론이었다.  

  그러나 조선 성리학의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기심성론을 바라보는 철학계와 역사학계의 시선은 결코 고운 편이 아니다. 성리학 자체가 실용성보다는 사변성에 치우친 학문일 뿐인데다 사림의 이기심성 논쟁도 현실을 도외시한 관념 내지 명분논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실학의 역사성을 부각하는 논리적 근거도 여기에서 찾고 있었다. 곧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이 갖는 관념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용성과 현실성에 바탕을 두고 태동한 것이 실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이기심성론이 형이상학이라는 선입견에 몰입된 나머지 그 속에 내재한 성리학자들의 실제적 삶의 철학과 방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은데 근원적 원인이 있었다.

  보편적인 인간이야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의식주(衣食住)의 문제이겠지만, 지식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당한가"고 하는 삶의 가치의 본질적 문제였다. 그것이 사회를 주도하는 선도적 위치에 있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이자 사회의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과 인성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결코 그 같은 철학적 탐구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현실과 결부시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설정하고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근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지식인들의 삶의 방식, 곧 처신에 대한 고민은 물론 태평성대에는 불필요한 듯이 보이지만 모순된 구조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남명과 퇴계가 살고 있던 시대가 그러했다. 16세기 훈척정권의 파탄적 국가운영은 그들의 처신에 적지 않은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처신의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곧 아예 눈을 감고 모순된 현실을 도외시한 채 모른 척 해야 할 것인가, 타협을 배제하며 모순타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인가,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되 그것과 일정하게 타협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현실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며 참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등의 다양한 방안이 모색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이 그 가운데 어떠한 처신을 하든 그것은 각자의 성향에 따른 개별적 선택의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이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자의 경우 각각의 처신에는 성리학의 이념적 토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처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념적 근거가 다름 아닌 이기심성론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성리학의 사변적 논리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과 출처(出處)를 규정하고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기심성 논쟁도 그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것인가 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쟁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처신의 방향이 다양한 만큼이나 사림의 이기심성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의 이기심성론의 토대가 되는 주자성리학이 그에 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림의 삶의 방식과 철학은 기본적으로 리(理)와 기(氣)를 도구로 하여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 같은 양상은 리와 기가 각각 순선(純善), 겸선악(兼善惡)의 속성을 갖고 있는 점을 근거로 그것을 자신이 처한 현실과 접목하여 우주적 원리를 파악한 때문이었다. 사실 리를 선으로 보면 그에 대응하는 기는 악으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 그럴 경우 리만 존재하는 곳은 천국뿐이며, 기만 존재하는 곳은 지옥뿐이다. 성리학자들이 불교를 기철학으로 규정해 이단시한 것은 세상을 '고해(苦海)'로 간주하는 염세철학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리와 기는 전혀 별개의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것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여 인성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구체적 방식이 마련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곧 리와 기를 가치론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하는가, 또는 가치의 선후(先後)는 인정하되 유기적인 관계로 보는가, 내외의 묘합(妙合)의 관계로 보는가, 상호 존재가치가 보장되는 대등한 관계로 보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각각의 관점에 서있는 선구적 인물이 바로 남명, 퇴계, 율곡, 여헌(旅軒: 張顯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기심성론을 주리론(主理論).주기론(主氣論) 또는 일원론(一元論).이원론(二元論) 등 이분법적 구조에서 파악하는 것은 사림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류방법은 일제시대 식민주의 역사 및 철학자들에 의해 적용된 이래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조선시대 사상계의 동향을 설명하는 틀로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특히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차별적 경향을 이해하는데는 유용한 것이기는 했으나, 학파 내부의 다양한 견해차나 시대적 환경에 따른 변화양상을 무시하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조선시대 사상계의 다양성과 실용성보다는 정체성(停滯性)과 관념성을 합리화하는데 활용된 측면이 강하였던 것이다.

  주자(朱子)는 "사단(四端)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한 것이다"고 하여 기와 함께 리의 작용성을 인정한 가운데 이기심성 체계를 확립했다. 이러한 그의 사고체계는 물론 완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리가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될 경우 가치론적으로 볼 때 그것은 기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 곧 리가 선이기 때문에 기는 악에 치우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세상을 선과 악, 군자와 소인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관계로 파악하는 근거가 된다. 선조 22년 기축옥사 당시 남명학파와 함께 화를 입은 정개청(鄭介淸)이 "천리(天理)의 공(公)은 리에 근본하고, 인욕(人欲)의 사(私)는 기에서 생긴다. 리를 위주로 하는 자는 군자가 되고, 기에 힘쓰는 자는 소인이 된다"라 한 것이 그러한 사고를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군자가 지배하는 이상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악의 소인은 철저하게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곧고 단호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확고한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자이래 성리학이 갖는 사고체계의 근간이었다.

  남명은 선현의 학문을 습득하면서 그 요지와 함께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학기유편(學記類編)}으로 남겼다. 이 가운데 그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는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 의하면 "四端 理發 七情 氣發"이라 하여 리와 기를 상대적이고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주자의 그것을 준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리와 기는 가치론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각자 작용성을 가지지만, 리의 능동적 작용성과 절대적 가치를 전제로 한 도덕적 규범의 절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기심성론의 구조를 확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경(敬)을 통한 엄격한 자기수양과 함께 의(義)를 토대로 한 분별적 성품과 출처관은 바로 리의 절대적 가치를 보장한 가운데 리.기를 나누어 대립적으로〔分對〕파악하는 주자의 이분법적 이기심성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남명의 방엄청준(方嚴淸峻), 강의직방(剛毅直方)으로 표현되는 외형상 풍모는 리.기를 분대하는 관점에서 철학성과 논리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그것은 이미 주자에 의해 확인된 바 있는 데다 주자성리학이 사림에 의해 실천적 도학(道學)으로 변모하면서 고착화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이론적 천착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가 주자이래 저술이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나선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행동을 규정하는 인품형성의 논리적 토대는 주자에 의해 정립된 만큼 남은 것은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실천적 자세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훈척정권과의 타협의 여지를 철저하게 배제하며 척결의지를 분명히하고 있었던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가 이기심성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기피한 것은 그것의 관념성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에서 초래될 수 있는 본질의 왜곡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대승과 이기심성 논쟁을 전개하고 있던 퇴계에게 그에 앞서 청소하는 법부터 가르치는 것이 순리라는 견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리와 기의 작용성과 대립적 관계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퇴계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었다. 그가 정지운(鄭之雲)이 작성한 [천명도(天命圖)]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四端 發於理 七情 發於氣"라 한 것을 "四端 理之發 七情 氣之發"이라 수정해 준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사림들 사이에 물의를 빚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리.기와 사단.칠정을 확연하게 분대하는 그의 사고체계가 외형상 드러나는 성품 및 출처와 모순되지 않느냐는 의혹이 작용하고 있었다. 곧 철학과 행동이 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체계라면 사림들이 소인으로 규정한 훈척세력의 척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왜 관직에 나아가 그들과 타협하는 인상을 풍기느냐는 것이다. 퇴계의 해명에도 그러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결국 기대승이 나서 그와 이기심성 논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들의 논쟁의 본질은 이기심성을 매개로 한 출처문제에 있었던 것으로 이기심성론 그 자체는 아니었다. 조호익이 퇴계의 출처의리를 옹호하면서 기대승이 그의 출처에 이의를 제기했다며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비판한 것이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그러나 기대승이 퇴계의 이기심성론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의 출처를 비판할 목적이 아니라 사실상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훈척세력과 적극적으로 타협하고 있던 자신의 현실참여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퇴계에게 리란 작용성이 없는 관념에 불과하며 작용하는 것은 기뿐이라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는 사림이 지향하는 군자지배의 이상사회는 사실상 구현될 수 없는 것으로 모순된 현실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가 악으로 흐를 가능성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승의 편지를 받은 퇴계는 두 통의 편지를 동봉하여 보냈다. 하나는 자신의 이기심성론을 정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출처관을 피력한 것이었다. 앞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가 정당함을 강조하면서도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하여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탄다(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로 수정했다. 리의 작용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리와 기의 관계를 대립일변도에서 벗어나 유기적 관계를 일정하게 인정한 것이다. 이는 도덕적 가치를 갖는 군자의 지배를 보장하되 소인은 척결의 대상이 아닌 포용의 대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는 뒤의 편지에서 자신의 출처관과 관련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그는 과거 도의(道義)가 있는 많은 선비들이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배움이 지극하지 않으면서 높은 곳에서 자처하거나 시세를 살피지 않고 경세(經世)에 뛰어든 결과로 파악하면서, 학문적 성취가 없는 현실개혁 자세는 화만 자초할 뿐으로 깊은 철학적 사유에서만 적절한 출처의 길을 찾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중종대 기묘사림의 군자.소인의 이분법적 논리에 입각한 배타적이고 급진적 개혁이 실패한 경험을 의식한 것이었다.

  퇴계의 그 같은 논리는 자신의 출처가 깊은 성리학적 사유에서 나온 것으로 리와 기를 분대하면서도 제한적으로 혼륜을 수용해 따르고 타는〔隨乘〕관계로 파악하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표방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학문이 지극하면 도덕적 규범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퇴(進退)의 탄력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 저절로 찾아지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강직한 성품으로 악을 미워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힘쓰지 않는 자가 많고, 유순하고 겁많은 자는 아첨하는 태도만 보일 뿐이다"고 개탄한 바와 같이 강(剛)과 유(柔) 일변도가 갖는 한계를 동시에 타개할 수 있는 합리적 방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강유겸전(剛柔兼全)을 통한 외유내강의 자세는 여기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의 수승적(隨乘的) 강유겸전의 자세는 주자의 관점을 충실하게 수용하는 남명의 분대적(分對的) 강의직방의 자세가 갖는 극단성을 완화하려는 측면이 강한 것이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곧 분대론과 수승론은 남명학과 퇴계학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기는 하지만, 리의 작용성을 전제로 도덕적 가치를 지닌 군자의 지배를 지향한다는 점에는 동질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도덕과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부국강병은 부정.부패 등 사회적 병리현상을 야기하여 건전한 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훈척정권이라는 파행적 정치상황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다함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훈척정권의 몰락에 이은 사림정권의 대두, 사림세력의 과거청산을 둘러싼 견해차가 드러나는 정치적 변화상황에서는 사림의 분열을 촉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기심성론이 리와 기의 묘합(妙合)을 강조하며 사림의 통합을 주장하는 율곡에 의해 비판받게 되는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이에 따라 남명의 분대론적 관점과 퇴계의 수승론적 관점도 시대적 변화에 적합성을 부여받기 위해 부단한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들이 이기심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지속하면서 율곡학파의 서인세력과 문묘종사를 둘러싸고 치열한 이기심성 논쟁을 전개하게 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적 가치 내지 현실적 가치를 우선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출처를 규정하는 실질적 논쟁이었지, 철학성에 매몰되어 현학성을 과시하는 관념의 유희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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