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파에 대한 400년간 지속된
진실의 왜곡날조에 대한 변무(辨誣)

-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에 대한 글을 중심으로 -

權  仁  浩
(대진대 철학과 교수)

1. 머리말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을 잠시동안 속일 수 있어도, 많은 사람이나 다수의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그렇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수의 사람을 영원히는 아니지만 400년이란 오랫동안 진실을 왜곡날조하여 무고하고 속인 것이 있다. 더구나 그것이 역사적으로 추앙받는 선현(先賢)의 일이기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계된 선현들 스스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훌륭한 삶과 정신을 올곧게 계승발전하여 어려운 시절에 귀감(龜鑑)이 되고 더욱 존숭(尊崇)과 추념(追念)의 감정이 일어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못난 후손과 제자사숙인(弟子私淑人)들의 후손 및 후학(後學)들이 선현을 높힌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선현의 참모습을 훼손하고 욕보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울러 학문의 기본적 소양도 없는 이들의 왜곡날조된 유언비어와 언어문자가 수백년 계속되어 오늘날 공식적인 학회에서나 이 글에서 거론되는 것에 이르기 까지 그 무식하고 무지막지하게 함부로 떠들고 글을 쓴 일에 대해서는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이 글은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그 조금이나마 해명하고 역사의 진실과 관계된 선현들의 학문사상을 간단히 피력하여 다시는 무고날조의 폭거(暴擧)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동안 남명학파(南冥學派)에 관해서는 수 많은 원전자료와 역서 및 저서와 논문들이 학계와 일반에 발표공개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왜곡날조와 무고가 아무런 꺼리낌이 없는 글과 말들이 횡행하고, 이 세상의 진리는 자신들과 자신들이 추종하는 선현 외에는 없다는 방약무인한 풍토가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더 이상 은인자중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1차적으로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이 글에서 거론하는 것은,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이순형 교수의 글([신동아] '98. 5월호 <한국의 종가 탐방 5> 「퇴계 이황 종가」) 내용 가운데서 남명학파의 선현에 대한 구체적인 왜곡날조와 무고, 그리고 그 글에서 관련된 기타 내용들의 무책임한 오류와 모순을, 박사학위를 지닌 아동학자이며 대학교수, 즉 국가사회에 책임과 의무가 있는 공인(公人)으로서 가지는 말과 글의 책임성을 문제 삼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수 개인에 관해서는 추호도 사심도 없이 객관성을 가지고 논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이교수도 6월호에서 ‘본의’는 아니라고 사과하고 있는 점을 볼 때, 고의적인 악의에서 출발한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교수의 표현대로 과연 이교수 자신의‘실수’였는지는, 본인의 이 글을 보고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2. 과공(過恭)은 비례(非禮)

 이교수는 "공자는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하고 싶은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자연인 공자의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퇴계는 아마도 40세 이전에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고 도산서원에 오를 때마다 생각했다"(p.572)고 하였다.

이교수는 앞서 말한 글을 이렇게 시작하면서부터 단순하고 소박한 감정을 글로 세상에 발표하면서 그 지나침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아무런 점검과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여 그 글이 구체적으로 퇴계와 그 종가 그리고 남명학파의 선현에 대해서는 끝내 왜곡날조와 무고의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우리는 참다운 교훈과 진리를 일깨워 영원한 귀감이 되는 이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한다. 그리고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공자를 이야기한다. 유학의 도통(道統)을 말할 때 공자가 없는 유학을 논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인(賢人)인 퇴계를 성인 공자보다 개인적으로 존숭하는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이나, 퇴계가 공자의 후학이며 공자를 닮으려고 노력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수가 도산서원을 오르면서 생각한 것을 글로 쓴 내용은 퇴계를 숭앙하는 표현이 아니라 제대로 알지를 못해서 오히려 퇴계를 민망케 하였다고 본다. 이교수는 공자의 나이 일흔(예순이 아니라)이 되어서야 가능했다는 경지를 퇴계가 불혹의 나이도 되기 전에 그러한 경지(깨달음과 실천에서)에 도달했다는 것이 왜 퇴계를 민망케 할 수 있다고 하였는가. 인간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 때, 나이의 노소와 성별의 차이에서 그 사람의 탁월함을 자주 비교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자가 스스로에 대해 10년 단위로 말한 것은 그 깊이와 넓음에서나 마음의 깨달음과 실천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40대가 할 수 없는 70대의 그것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것을 공자는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은 나이들면 들수록 노욕 (老慾: 돈, 권력, 명예)과 망령으로 추해져서 사회와 가정에 부정적 요소로 짐이 되게 된다.

 '지나친 공경(過恭)은 예의가 아니라(非禮)'고 했으며,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한 것이다. 조선 시대 당시 퇴계를 일러 공자보다 더한 성인이라고 했다면, 유학(주자성리학)에 대해서 이단배척(양명학)에 과감한 퇴계로서 '큰일 날 일'이라고 손을 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다 후대의 일이라면 온전히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릴 수도 있는 표현을 이교수가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항상 겸양과 온건한 표현을 한 퇴계가 이를 수용할 수 있었을까. 이교수의 그러한 표현은 우리나라와 그 전통사상 그리고 유학을 올바로 알지 못한 국수주의적 태도로서, 전래의 학문사상과 그 인물들의 삶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개인의 귀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비판분석하여 미래전망을 하는데 장애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나라를 과거 중국에서 보아 '해동(海東)'이라 칭하고 고려의 최충(崔庶)을 '해동 공자'로 백제의 의자왕을 '해동 증자(曾子)'로 퇴계 이황을 '해동 주자(朱子)'로 통칭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중국이 항상 1등이고 우리는 2등이라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부하는 묘한 사대주의적 표현일 수 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서양화의 물결로 인하여 '동양의 누구'라거나 '한국의 누구'라고 하면서, 암암리에 미국과 서구의 훌륭한 인물을 1등으로 하고 동양이나 한국을 2등으로 하는, 즉 서양과 미국에 대한 왜곡된 사대주의적 표현이 횡행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예순과 퇴계의 마흔의 경지를 비교하는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사숙고를 요한다고 본다.

또한 최근 한국학의 연구풍토에서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진리를 외면한 채, 과거의 인물과 학문사상 그리고 관계된 전통가문을 과대하게 존숭하고 평가하거나 반대편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폄하하는 태도가 횡행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적인 학문연구를 외면하는 것으로서, 국학이 이른바 '일개 가문의 조상을 위한 추숭차원의 학문인 가문학(家門學)'차원으로 추락하게 되어 부정적 방향의 수구와 복고적 태도를 조장하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3. 인간의 상정(常情)과 경의(敬義)사상

이교수는 "퇴계가 제자를 받아들이는 데는 몇가지 원칙이 있었다. 우선 본인의 가문과 격(格)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상정(常情)을 보았다. 문하생으로 찾아온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문하생이 스승에게 절과 폐백(幣帛)을 올리면 그것을 받아주는 것으로 입소의식을 치뤘다.
  어느 더운 여름날 멀리서 걸어온 정인홍과 정구(鄭逑)의 행동은 유달랐다. 정구는 인사를 올린 후 웃옷을 벗어 부치고 물을 끼얹는 데 반해 정인홍은 갓과 도포를 입은 채 줄지어 땀방울이 흐르는 데도 정좌하고 있었다. 퇴계는 정구의 폐백은 받아들았으나 정인홍에게는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폐백을 돌려주었다. 아마도 퇴계가 인간의 상정(常情), 즉 자연스럽고 소박함을 중히 여긴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퇴계에게 퇴짜를 맞은 정인홍은 후에 광해군 때 영의정까지 오르나 옥사의 장본인이 되고,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던 남명 조식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p.574 왼편)라고 하였다.

이교수는 퇴계가 제자를 받아들이는 데 그 본인과 가문의 격을 중요시 했다고 하면서 대장장이 배순(裵純)을 내치지 않고 뜰아래에서 글을 읽게 한 사실을 들고 퇴계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순의 학구열을 높이 샀다고 한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당시 멸시하던 호향(互鄕)지방의 사람들도 속수(束修) 한 묶음으로 제자의 예를 갖출 수 있었다. 즉 공자는 일찍이 '유교무류 (有敎無類)' 라하여 가르침에는 신분계급을 따지지 않은 교육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내암과 한강이 퇴계에게 올렸다는 '폐백'이란 무엇인가? 결혼식을 했는가? 폐백은 보통 신부가 처음 시부모를 뵐 때 올리는 대추나 밤 그리고 포 따위를 말하기도 하고, 신랑이 신부집에 보내는 채단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예를 갖추어 보내거나 가지고 가는 선물을 통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에 나오는 대로 유학자로서 제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물 혹은 수업료란 비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말린 고기 한 묶음' 이란 뜻으로 '속수'라고 해야 할 것이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죽순 한 묶음을 바치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이교수가 말하는 '인간의 상정(常情)'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통의 인간 감정으로서, 성리학적인 표현으로는 사단칠정(四端七情) 가운데 칠정(七情:喜怒哀懼愛惡慾)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욱 단순히 말한다면 식색(食色)으로서, 배고프면 먹고 싶고 성인 남녀가 정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상정을 사단과 도심(道心)이나 거경(居敬)과 신독(愼獨) 등의 수신지결(修身持潔)로써 조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날씨가 덥다고 처음 제자가 되려고 찾아간 사람이 더위를 참지 못하고 스승으로 모시려고 한 분 앞에서 웃옷을 걷어부치고 물을 끼얹는 것이 과연 당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내암(來庵) 정인홍을 앞뒤가 꽉막힌 인물로 폄하하기 위한 날조된 이야기지만, 오히려 퇴계와 한강(寒岡) 정구가 성리학의 도학자로서의 품위에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남을 해치게 되면 먼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남을 무고하고 비방하면 자기 입이 먼저 더러워진다는 인간의 기본 상식과 윤리도의에 비추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퇴계의 평소 언행과 태도에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그 이야기 속의 인내하는 내암을 제자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는 평소 그 언행에 있어 성리학적인 '경(敬)'에 바탕을 두어 시종여일하게 경건신독(敬虔愼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항상 그 몸가짐과 말투 그리고 상소문에까지 조심스럽고 함부로 하지 않은 분이었다. 한강도 또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조선조 성리학자 가운데서, 인간이 외형적으로 하는 행동과 예식에 대한 학문인 예학(禮學)의 대가로서 이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는 영남의 대표적 예학자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볼 때 16세기 말 여름 어느날 도산서당에서 있었다는 퇴계, 내암, 한강의 고사는 날조된 허구에 불과하다.

분명히 내암은 퇴계 문하에 나아간 바가 없다. 한강은 13세 전후에 당시 성주(星州) 교수로 있던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사사하여 나중에 24세 때 덕계의 안내로 남명에게 나아가고, 21세 때에는 퇴계에게로 나아갔으므로 양(兩) 선생의 제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교수는 퇴계가 내암의 사람의 됨됨이와 그 본성을 알아보고 제자를 삼지 않았다. 그런데 내암은 광해군 때 옥사를 일으켰고, 그러한 내암을 몰라 보고 제자로 삼은 남명이 그 때문에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빠개고 죽은 시체를 다시 목을 침)'를 당한 것은 당연하다는듯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먼저 남명은 생전과 사후를 통털어 그 어떠한 형벌도 받은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학덕과 고상한 인품 그리고 조선조에서 가장 훌륭하고 성공한 교육자로서 교육이념과 사상면 및 교육방법과 그 가치에서 당시의 여타 성리학자를 압도하였다(이만규,『조선교육사』Ⅰ, 거름, 1991(1947), pp.246-251. 참조). 남명은 그의 훌륭한 학문업적(實學的 經世思想)과 출처대의 그리고 뛰어난 제자를 길러 졸(卒) 후에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에 최고의 벼슬로 추숭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청원한 상소(請 疏)'가 각 기관과 각 도(道)에서 35차례나 있었다. 그러므로 이교수가 남명이 부관참시 당했다는 것은 날조된 것으로 무고 및 명예훼손적인 말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교수가 앞서 말한 용어 가운데 '폐백', '상정', '옥사' 등의 용어가 정비석씨의 책에 그대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정비석씨는 인조반정과 내암의 참형과 가산적몰을 말한 다음, "정인홍의 스승이던 조 남명도 참혹한 추형(追刑)을 받았으니,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퇴계의 사람을 식별하는 눈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鄭飛石,『退溪小傳』,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1992, p.113. 7-8줄)라고 하여 남명학파에 대한 노골적인 폄하의도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상식적으로 '부관참시'란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때 죽은 이들까지 추형을 하면서 악형을 가한 것이다. 이 이후 수많은 사화와 당쟁에서 반대당을 참혹하게 숙청하고 형을 가했지만 '부관참시'라는 악형은 가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남명이 부관참시 당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 수가 없다.

그리고 내암이 '옥사의 장본인'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옥사를 말하는지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내암은 임해군이 세자책봉과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분명히 반란의 조짐을 보이자 할은설(割恩說)을 주장하여 그 비호세력과 함께 징치를 상소하였다. 그렇지만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계축옥사 때 당시 내암은 향리에 있으면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충렬 교수의 『내암집』해제(아세아문화사, 1983)와 본인의 글(권인호,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 한길사, 1995, pp.191-219)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4. 남명의 현실인식과 출처사상

 '출처(出處)'라는 것은 세상에 나아가(出) 벼슬을 하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물러나 재야(在野)의 산림(山林)에 머물면서도(處) 정신적 지조를 지키고 후학을 가르쳐 올바른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유학의 정치철학적인 용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의 출처론은 곧 실천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자도 "군자(君子)로다, 거백옥(} 伯玉)은 나라에 바른 도(道)가 행하여지면 벼슬하고, 바른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물러나서 도(道)를 마음에 간직하고 숨어서 살았다"라고 하였다. 즉 정치가 올바르게 행사될 적에는 나아가 출사(出仕)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물러나서 숨어 살면서 후세를 위하여 진리와 도덕을 지키고 간직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출처에 관한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주자(朱子) 또한 이 문구에 대한 주(注)에서 "백옥(伯玉)의 출처는 성인(聖人)의 도에 합하였으므로 (공자가) 군자라 하셨다"고 하여 이것은 성인의 도에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학이란 인간세상에 관한 학문사상적 체계이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으면 의롭지 못하다(不仕無義)'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출사'가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함이 없이 과거와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능사(能事)로 아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히려 천하의 진정한 유학자 선비는 천하의 긴 이익을 위하여 재야에 처(處)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글의 첫머리(p.572 첫단락)에서 최근 한 대학교수의 입각 요청을 뿌리친 사실을 두고 존경의 념을 표하면서, 그러한 출처대의(出處大義)의 인물로서 퇴계를 거론한다. 물론 당시 수십회 벼슬을 사양하며 은퇴를 거듭하여 학문정진과 제자양성을 주로 삼았으니 다른 인물보다는 훌륭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과거로 발신하여 벼슬살이 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응시와 낙방을 거듭하다가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훗일 그 벼슬이 이미 우찬성(右贊成,종1품)이라는 이상(貳相)이라 통칭되는 정승급, 즉 지금의 부총리급에 까지 이르렀다. 이로 볼 때 분명 이교수의 이야기는 출처사상에 대해 그 본질과 의의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 때문에 [신동아] 6월호에서도 남명의 출처사상에 관하여, '출처관'이 아닌 '출사관(出仕觀)'이란 불분명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일찍이 본인이 [南冥院報] 제3호(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1997)를 통해 요즈음의 대학교수(총장)나 학자출신의 관료의 입각과 그 행태를 남명의 출처대의 사상을 가지고 통렬히 지적비판한 바 있다. 요즈음 이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부정부패와 입신출세 그리고 치부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를 모르는 무리들이 횡행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까지 파탄으로 내몰아 치게 된 것도 바로 출처의리를 모르는 데에서부터 라고 생각한다.

분명 출처대의를 올곧게 실천한 인물로 당시 수많은 벼슬천거를 거절하고 단 한차례의 벼슬에도 부임하지 않은 남명을 거론함이 마땅할 것인데도 퇴계를 거론한 것은 이 교수의 무식과 과문탓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왜곡인가? 당시 남명이 평생 처사(處士)로 있었고 퇴계가 과거로 발신하고 우찬성으로까지 벼슬한 기묘사화 이후의 중종 말년과 명종 22년간의 그 시대가 과연 온전한 뜻을 가진 선비가 벼슬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던가는, 이교수가 [조선왕조실록]이나 한국사를 통해 그 시대상황을 다시 읽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당시 사림의 모범으로 추앙되어온 이들도 그 출처가 분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남명은 구체적인 벼슬살이와 민중을 위한 정치행위와 사회적 실천에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논의마저 회피하면서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그리고 이기(理氣), 사단칠정,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사변적인 논쟁으로 '세상을 속이면서 유명한 선비라는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欺世盜名)'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명종실록』에서도 사관(史官)은 그 밖의 다른 사림파 인물들과 남명을 비교하면서 남명을 높히 평가하고 있다. 즉 "당시 유일(遺逸)에 가탁(假托)하여 실제 학덕을 갖추지 않고 한갖 허명(虛名)으로 도명기세(盜名欺世) 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식(植:조식 곧 남명)은 지신수결(持身守潔) 하여 초야(草野)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이 누차 제수되었으나 안빈자락(安貧自樂)하여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식은 결코 세상을 잊지는 않았다. 진소항의(陳疏抗義)하여 시폐(時弊)를 극론함에 있어 그 말이 간절하고 의(義)가 올바르게 하였고 시대를 상심하고 난(亂)을 우려하여 임금을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풍화(風化)를 왕도의 극치에 두려 하였으니 우국지성(憂國之誠)이 지극하다. 오호라! 평소의 가진 뜻을 임금 앞에 다 개진(開陳)하고 끝내 처사(處士)로서 일생을 마치니 그 마음이 충성(忠誠)하고 그 절의(節義)는 높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즉 남명은 당시 기묘·을사사화가 거듭되는 정치상황에서 비록 초야에 은퇴하여 있으면서도 세상을 잊지 않는 유학자의 모습을 견지하여 세상을 맑게하는 '숙세유(淑世儒)'의 소임을 다했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해 당시 시대적인 현실인식을 정확히 하여 출처에 엄정하였다.

그리하여 대곡은 남명의 묘갈문에서 "오호라!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그와 견줄만한 이가 드물어 또한 선현들에 추배(追配)하여 후세 학자들의 종사(宗師)로 삼을 만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판은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백세 먼 훗날 아는 이가 나와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제까지 수백년을 묻혀왔고 최근 많은 이들이 남명을 기리고 언어문자로 옳게 표현하려 하고 있으니,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암 또한 스승 남명의 일대기(「行狀」)에서 "출처를 심히 군자의 큰 절의로 삼고 고금의 인물을 두루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그 행사의 득실을 논하여야 한다고 하셨다"고 하고 "선생께서는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으셨다. 아는 이는 비록 좋아하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못 치우치게 이를 미워하였다. 은퇴하셨으나 시대현실을 자세히 살폈고 스스로를 지켰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자랑하지 않았으며 깎아지른 요새의 높은 바위 구멍에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천길을 높히 나르는 봉황새라 하면 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23세 때 남명의 모습같이 과업을 폐하고 24세 때 남명의 문하를 찾았던 된 한강의 만년제자이며 근기실학(近畿實學)의 개산조(開山祖)로서 우뚝한 산인 미수(眉) 허목(許穆)이 지은 남명의 신도비에서도 남명의 모습을 "구차하게 복종하여 따르지 않았고 스스로를 가볍게 해서(굽혀서) 쓰이기를 구하지 않았고 높고 뛰어나게 우뚝 섰다."라고 표현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도 남명의  신도비문에서 "사림이 구차하게 되어 습속이 더욱 간교하게 되니 식견이 있는 이는 선생을 사모함이 더욱 심하다"하면서 또한 "모든 사람이 의를 귀하게 여기고 이익을 천하게 여기며, 느긋하게 은퇴함을 숭상할 만하고 욕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할만하다라는 것을 아직도 알고 있으니 선생의 공적은 진실로 크다"라고 하여 남명의 출처대의를 높혀 그 숭앙을 표현하였다.

진정으로 남명의 출처는『주역』에서 말한대로 '왕과 제후에게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그 하는 일이 고상하여(山風蠱卦 上九, 不仕王侯 高尙其事)' 많은 후세 사람들이 출처의 대의를 깨닫게 하였다고 본다.

5. 역사와 픽션의 사이

그런데 문제는 이교수의 이번 글이 작고한 소설가 정비석씨가 쓰고 퇴계학연구원이 발행한 『退溪小傳』(1978초판, 1985 개정증보, 1992년 9판)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이 교수의 해명이 필요하다. 아무튼 그러면서도 그 용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확대해석 및 왜곡날조하여 더욱 문제의 소지가 있다. 번거롭게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지만 몇가지 중요한 오류를 지적한다면, 『퇴계소전』(pp.109-117)에 실려있는 [서당시절의 두 일화]로서 첫째 일화가 바로 내암과 한강의 퇴계방문 이야기고, 둘째가 당시 영의정이었던 쌍취헌(雙翠軒) 권철(權轍)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여부가 퇴계의 인품과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소박한 생활태도를 드높히기 위해 아직도 안동지방의 일반인이 이야기 삼아 입에 올리거나 퇴계를 흠모하는 요즈음의 학자들이 심심찮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비로 전래된 이야기나 소설적인 픽션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꼭 맞지 않는다고 해서 교훈적 의미와 진실여부를 바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명작가거나 대학교수가 쓴 글이 일반인에게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이 픽션적인 설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비록 전래된 이야기의 교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숭앙하는 사람의 선현을 위해 아무런 죄와 혐의가 없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 선현에 비견되는 다른 선현을 악의적으로 폄하하여 자신이 숭배하는 선현의 명성을 높이려는 것은 그 선현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고 후인들의 소인같은 행동을 나무랐을 것이며, 끝내는 높히고자 하는 선현마저 같이 폄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 두 이야기 가운데 몇가지 이교수 글과 관련된 것과 정비석씨의 잘못 알고있는 지식과 오류에 대해 밝혀보도록 한다. 먼저 정비석씨는 '내암과 한강이 성주에서 삽십대에 퇴계의 제자로 입문하기 위해 도산서당을 찾아가는 것'(p.109. 셋째줄)으로 서술하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내암은 안동의 도산서당에 가지도 않았고, 한강은 21살 때 벌써 퇴계에 급문했다. 1543년생인 한강이 30대라면 우리 나이로 쳐도 1572년이 되는데, 퇴계는 이미 1570년에 졸(卒)하였다. 귀신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인지, 아무튼 모를 일이다. 이런 오류가 있는 책을 퇴계학연구원에서 9판까지 발행하여 20년간 그대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강은 성주출신이지만 내암은 합천출신이다. 그리고 정인홍의 호인 내암(來庵)을 '내암(萊庵)'으로 표기해 놓았다. 이렇게 '래(來)'자를 '래(萊)'로 잘못 표기한 것은 정비석씨 만이아니다. 이것은 남명학파를 반대하는 학파들의 의도적인 짓으로서 근현대에 와서도 한국철학사나 유학사를 서술한 학자들마저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광해군의 민본적인 개혁정치로 보수파들의 이해관계가 얽히자 인조반정이라는 궁정쿠데타로 왕위찬탈을 한 자들과 그 추종자나 후예들이 올곧은 남명학파가 두려워 이런 잔재주를 피운 것이다. 더 나아가 남명을 순자(荀子)에 비기고 내암을 이사(李斯)에 광해군을 진시황에 비유하는 상징조작으로 그들의 쿠데타(인조반정)를 합리화 하려고 했다.

한편 정비석씨의 글 가운데 퇴계의 일화는 그 서술과 표현 그리고 용어에 문제점이 많지만, 본인의 이 글이 갖는 원래 의도와 어긋날 수도 있고 지면관계상 일일이 거론 할 수 없어 한가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처조부인 쌍취헌(雙翠軒) 권철(權轍)을 '장인영감'으로 표현했으니 백사의 진짜 장인영감인 충장공 권율(權慄)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 또한 옛날 양반들의 기본적인 예절이 '조상 제사를 잘받들어 모시고,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奉祭祀 接賓客)'인데, 명색이 일국의 재상인 영의정 권철이 550리길을 마다않고 퇴계를 만나러 왔는데도 퇴계는 보리밥과 소찬을 내놓아 음식이 입에 안맞는다고 권철을 일찍 상경하게 만든 것이 퇴계의 소박한 생활태도와 그 인품을 드높히고, '영의정을 훈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랬다면'(p.115. 9줄) 참으로 가히 웃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선조 초년에 정국이 일신되어 훈구파가 옴추려들고 사림파가 조정에 나아갈 수 있었던 분위기 조성은 당시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과 쌍취헌이 재상으로서 한 역할은 지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에 의해 "덕이 많은 거공(鉅公)"이라 일컬어졌던 쌍취헌은 일국의 내외적 국난을 극복한 인물인 충장공 그리고 백사를 아들과 손녀사위로 둔 인물이다. 그러한 쌍취헌이 퇴계를 만나려고 당시 교통이 불편한 그 때 며칠을 걸려 내려온 그가 밥과 반찬 때문에 부랴부랴 상경한다는 이야기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과연 이 이야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알 수 있다.

6. 유학의 전통사상과 종가의 교훈

이교수는 퇴계의 인내심과 그 인품을 강조하기 위해서 "퇴계가 며느리를 얻고자 향반인 안동 권씨에게 청혼했을 때 그 집안에서는 퇴계와 학문적 명성만으로는 흡족지 않았던지 퇴계가 와 앉았던 탁상을 깎아내고 방바닥을 물로 닦았다는 후문이 있을 만큼 하대했다. 그러나 퇴계는 굴욕을 묵묵히 참았다."(p.574. 오른편)라고 하였다. 이것은 『퇴계소전』가운데 [사돈댁의 괄시](pp.36-39)라는 글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퇴계소전』에서는 맏아들 이준(李寯)의 부인이 된 '봉화 금씨(琴氏)'와의 혼인 예식이 끝나고 이러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퇴계의 선조가 고려말에 안동의 진보현(眞寶縣) 아전으로 국가에 대한 공로 때문에 이족(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진출하였는데, 안동 지방에서는 이것을 문제삼아 설왕설래한다. 그러나 퇴계 가문은 당시에 이미 당당한 사족으로서 벼슬과 학문이 있는 가문으로 성장해 있었고, 안동 지방의 명문 사족들과 통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퇴계의 고조부 이운후의 부인(고조모 안동 권씨)은 사헌부 감찰 권희정(權希正)의 딸로서 세종때 좌의정이었던 경재(敬齋) 권진(權軫)과는 남매간이다. 경재의 사위는 배소(裵素)이고, 배소의 사위는 권옹(權雍)이며, 권옹의 사위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고조부인 유소(柳沼)이다.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의 전처(의성 김씨)는 예조정랑 김한철(金漢哲)의 딸이고, 김한철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종고조부이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명문들이 혼인한다면 그 절차가 까다롭고 시일이 오래 걸리며 소문이 양쪽 집안과 일대에 퍼지게 마련인데, 어째서 혼인날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교수는 퇴계 종가를 서술하면서 퇴계와 그 가문을 정확하게 서술하여 독자로 하여금 교훈이 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퇴계의 며느리 성씨를 '봉화 금씨'에서 '안동 권씨'로 남의 족보까지 날조하고 있다. 당시 퇴계 생전에 안동 권씨로서 퇴계 종가에 시집온 부인은 퇴계의 후처(그 친정 조부가 화산(花山) 권주(權柱)로서 사림파 출신의 학자이자 경삼감사 등 높은 벼슬을 하다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죽음을 당했다)와 맏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부인으로 열녀문이 세워졌던 퇴계의 맏손부이다. 퇴계 가문과 봉화 금씨와의 혼인관계도 앞서 본대로 퇴계의 맏손부 뿐만 아니라 맏손자 이안도의 둘째 사위도 금산군수 금개(琴愷)로 계속 되고 있었다. 아무튼 정비석씨는 이항복 처가의 장인과 처조부를 동일인으로 만들더니, 이제 이교수는 퇴계 종가의 고부사이를 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안동 권씨가 향반(鄕班)'이란 이야기는 이교수 글 외에 읽거나 들어 본 기억이 없다. 향반에 상대되는 것이 국반(國班)이라 할 수 있는데, 향반이란 뜻을 이교수가 글자 그대로 '그 고을이나 시골 동네에서만 양반 행세하는 미미한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서술했다면 이는 안동 권씨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다른 왜곡날조와 함께 모독일 수 있다. 왜냐하면 퇴계 시대인 조선 중기 당시와 조선조 전체를 통해 단위 본관과 성씨 별로 학문업적과 과거급제자수 그리고 고관대작의 벼슬 등과 사시(四始:나라 전체에서 처음 시작하는 네가지로서 族譜, 文衡,  杖 혹은 耆老社, 湖堂)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안동 권씨는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이교수의 글 p.578 왼편에 '퇴계 종가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방에 부적을 붙이려니 방향이 맞는 방이 안방뿐이라서 젊은 종부가 안방을 차지하고 시모와 시조모가 건넌방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학자 선비 집안, 그것도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종가에서 '부적'을 사용한 것을 드러낸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이교수가 주부의 경제권과 안방 사용에 대한 권한 이동을 잘못 왜곡되게 표현한 것으로 퇴계 종가에 대해 모독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가(儒家)란 괴력난신(怪力亂神)이나 내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 제자백가 시절부터 다른 학파의 사상에 비해 비교적 미신보다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해왔다. 그래서 조선조에 유학이 국가철학 내지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된 이후 왕실의 불교 숭배와 내불당을 사림파가 계속해서 반대해 왔고, 궁정 내부의 푸닥거리나 미신숭배(저주사건과 부적 등)를 사림파는 철저히 배제하려고 하였다.   바로 그 구체적 사건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소격서(昭格署) 혁파 사건으로서, 이것을 빌미로 정치적으로 왕권과 훈척파들이 결탁하여 사림파들을 숙청하는 꼬투리가 되었던 것이다. 퇴계는 정암을 존숭하였고 우리나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말할 때 필히 거론되는 분이 정암이다. 그렇다면 퇴계 종손 며느리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이교수의 날조인가? 여하튼 이렇게 전후좌우의 논리가 안맞고 오히려 선현의 종손가를 폄하훼손할 수 있는 글이 어찌하여 나오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교수는 종손 이동은씨와 함께 '미래 종손' 이근필씨 운운하는 글이 자주 나오는데, '미래 종손'이란 말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모르겠다. '미래 종손'이란 말그대로 본다면 이근필씨는 현재는 아직 종손이 아니라는 뜻이다. 왕가라면 왕과 세자란 뜻으로 세자는 '미래의 왕'이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종가에서는 종손의 맏아들, 맏손자, 맏증손자도 모두 종손으로 통칭하는 것이지, 지금은 종손이 아닌데 어떻게 미래 종손이 될 수 있는지? 혹 종손이 직계후손이 없는, 곧 무후(無後)해서 가까운 친족 가운데 항렬에 맞는 이를 종가의 양자로 입양해서 종가의 代를 이을 것을 내정하고 그 사람이 아직 종손으로 정식대우를 받기 전의 신분일 때라면 아마도 미래 종손이란 용어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퇴계 종손인 이근필씨가 그런 상황에 있는지 의문이다.

이처럼 이교수의 이번 글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수는 간단히 문자로서 사과([신동아] 6월호)만 할 것이 아니고, 과연 어떤 자료를 참고하고 어떤 이들의 구술을 들어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되었는지 녹음 테이프나 비디오 테이프를 밝혀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밝혀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이 발행한 정비석씨의 글도 소설가의 픽션(허구)으로서 문학적 상상력과 그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글이 실린 책을 "鄭飛石 著"라 하였고 책 내용에는 '퇴계철학의 개요'라든가 '동양삼국학자들의 퇴계학관' 등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 창작물로서의 문학 작품(作品)류가 아닌 저서(著書)류로서 구체적인 역사인물의 사실을 무고날조했으니 당연히 그 책임소재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남명과 내암에 대해 아는 바가 없거나 알면서도 의도적인 왜곡날조를 일삼는 이들과 특히 공식적인 학회 등에서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일반인과 관련 학문의 많은 학자와 교수들을 위해 간단히 두 선생의 년보(年譜)를 참고로 뒤에 약술한다. 그리고 남명학파 학문사상 전반에 대한 원전 및 번역본 자료, 단행본과 학위논문, 일반논문, 논설, 근간논문 등을 오이환 교수가 정리작성한 「南冥學 關係 旣刊文獻 目錄」(『南冥學硏究論叢』제4집,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1996, .pp.253-291)을 참고하기 바란다.

 

# 이 부분은 남명조식 및 내암 정인홍의 연보가 원문에 실려 있으나 지면 관계상 필자와의 합의에 의해 생략함.

 

3. 맺음말

이교수 글의 핵심은 요즈음 우리 전통이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선현을 높히고 그 종가에 대해 일반인이 참고할 만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목적인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과 전통사상의 진실이 왜곡날조되어 무고에 가까운 글을 써서 선현들을 올바로 알지 못하게 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또한 퇴계의 훌륭한 인품과 종가의 모범이 되는 규범질서도 이교수의 잘못된 표현으로 인하여 남명학파의 선현들과 함께 오히려 폄하훼손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본인의 이 글은 이를 비판해명하여 바로 잡고자 중요한 몇가지 남명사상을 간단히 소개하고 아울러 남명과 내암의 연보를 실었다. 즉, 선현의 올곧은 삶과 높은 학문사상의 향기 그리고 국가사회와 역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모습들을 흠모하는 처지에서, 요즈음 횡행하고 있는 이 사회의 가당찮은 모습을 보고 한가닥 정의감과 분발심에 기인하여, 아무런 두려움이나 의심도 없이 계속되고 있는 남명학파에 대한 왜곡날조와 무고의 재발방지를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5월 중에 완성되어 6월호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기타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7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원고보다 이교수 개인이나 왜곡날조와 무고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비판의 목소리를 많이 배제하거나 낮추게 되었고 문장과 그 용어 선택에 있어 신중히 하였다. 여기에는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의 원장과 상임연구위원들의 정확한 원고 교정과 도움되는 견해가 많았음을 밝힌다. 또한 남명의 후손 가운데 한 분도 노자(老子) 가 말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노자』76장)라고 하면서, 강하게 되받아 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하였다. 가히 대현(大賢)의 후손이라 생각하였다. 일찍이 본인도 이 노자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에 의한 전쟁을 비판하고, 을지문덕과 톨스토이가 노자를 인용하며 평화를 추구한 이야기를 하면서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글을 잡지에 발표한 바 있다. 그리하여 크게 깨닫고 수백년간 왜곡날조와 무고의 울분을 참으면서 비판해명하고 한 것을 모두 피력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교수나 이미 고인이 된 정비석씨 개인에 대한 감정은 추호도 없음을 다시 한 번 밝히며, 혹시라도 평자 본인의 글에서도 오류나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다면 하시(何時)라도 질정(叱正)해 주기를 바라고, 서로의 견해 차이로 인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공개된 석상에서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권인호(權仁浩)
1955년 경남 고성 생
1981년 성균관대 유학과 졸업
1991년 동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대진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저서:『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등 다수
논문:「남명 조식의 현실인식과 출처사상 연구」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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