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學派의 出處大義와
이 時代 學者出身 官僚들의 處身과 言行

權 仁 浩
(本院 常任硏究委員, 大眞大 敎授)

1.

몇 년전 이른바 ‘6공’이 끝날 무렵 소위 ‘얼굴 총리’로서 수십여 년간 ㄱ대학에 교수로 있으면서 보직교수, ㅅ대학과 ㅎ대학의 總長으로 있었던 ㅎ씨가 최근 4.19 혁명에 대한 어떤 중요한 모임에서 1960년 4월 25일 교수데모에 대한 이상한 발언을 한 것이 뉴스시간에 방영되었다. 그 요지인 즉 ‘당시 美國 측과 軍部로부터 데모를 해도 불상사가 없을 것이라는 暗默下에 진행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그가 ㄱ대학 학생처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발언내용과 함께 그 時點이다. 수유리 진정한 先烈들의 墓所 아래에 4.19 혁명 희생자(순국선열) 墓域이 최근 聖域化되고 정부가 공식행사를 하는 이 때에, 1960년 4월 26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그 職을 고수하기 위해 갖은 술수와 마지막 몸부림에 대해 쇄기를 박아 下野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인 교수데모에 대해 ㅎ씨의 발언내용과 시점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당시 그는 교수데모 대열에 참가하였는가? 그 해 4월 18일 시위 ㄱ대생에 대한 정치깡패들의 피습에 당시 그는 학생처장으로서, 교수데모에 대해서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무슨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고 제자들의 보호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의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보다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시점에 항상 그가 묘한 발언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당시의 민주화에 보탬이 되는 발언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이중적 아니면 기회주의적이면서 민주화를 물먹이고 끝내는 저해하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한 예를 더들면 일찍이 5공이 무너지는 결정적 국민들의 저항인 1987년 6월 항쟁 이후 몇 년간 다소나마 민주화가 진행되려는 시점에, 그는 조선일보에 ‘대학에서 국민윤리·한국사·체육·교련은 維新科目이므로 교과목에서 배제해야 된다’는 요지를 대서특필하였다. 一見 維新(원래 뜻이야 『書經』에 나오는 대로 새롭고 좋은 정치개혁이지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헌법을 바꾸자고 발언하면 긴급조치 9호에 저촉되어 20년 징역에 처해지는 維新은 글자대로 한다면 反維新이지만)시대를 비판하고 대학교수로서 그리고 대학총장으로서 대학을 올바른 교과목 배정을 위해 외부의 문교부나 정치적 강압을 배제하고 학문의 자유가 있는 곳(여기에서 요즈음의 교육개혁과 대학의 학부통합과 교과목 개정도 생각해 볼 일이다)으로 이끄는 발언같았다. 참으로 용기있고 양심이 있는 학자 같았다. 그도 그러한 것을 의도한 발언이었을 것이라고 일단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발언 목적은 그러한 하찮은(아니면 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이후 대학에서 이 과목들이 교양필수 과목에서 교양선택 과목으로 변경되어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다른 과목은 차치하고 국민윤리와 한국사가 문제인데, 다른 교양과목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과목은 대부분 젊은 강사가 강의하고 있다. 논자인 본인도 당시 철학과 함께 국민윤리(한국전통철학, 동서양철학, 정치학, 경제학, 공산주의 비판 등으로 구성)를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ㅎ씨는 당시 젊은 대학강사들이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의식화(올바른 의미에서 모든 교육은 의식화이다. 대학은 진리적 실체를 인식하고 건전한 비판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현재 그나마 여타 존속한 교양과목은 파리를 날리고 콤퓨터 교육과 영어회화와 수업은 수강신청이 폭발적이라 시간표 작성이 어려울 정도로 파행화 되었다. 물론 이 수업도 필요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대학은 외국어학원이나 직업연수원이 아니다)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이들을 차단시키려는 목적을 교묘하게 당시 反維新 분위기를 틈타 維新에 실어 날려버리려는 의도의 발언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 개인적으로도 피해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 철학·사학·정치학 등을 전공한 의욕있고 실력있는 소장학자들이 아직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열악한 대학강사 처우에 노출되어 이른바 ‘보따리 장사’ 신세를 못면하고 그것도 대폭축소되거나 폐지된 강좌 때문에 허덕이고 있다.

아무튼 과연 그의 의도대로 8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사회는 대학에서부터 사회전반에 걸쳐 우왕좌왕하며 헤매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나 학자관료 출신의 後光이 스러지지 않고 아직도 텔레비젼 화면을 수놓고 이상한 발언을 통해 다시 反民主와 守舊勢力의 이익을 연장하려는 음모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지금의 대학 분위기와 교과과목 구성 그리고 학생들의 수강실태 나아가서 지금 대학생들의 우리의 전통 사상이나 역사·사회·정치·문화 등 전반에 걸친 인식정도나 의식상태는 한심한 지경에 놓여있다. 콤퓨터에 치고 영어로 지껄일 학문내용과 그 알맹이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국제화나 세계화가 논의되자 70년대부터 독일이나 일본 등은 대학에서 인문과학을 강화하고 프랑스는 초등학교에서의 콤퓨터 교육이 창조적인 사고발달에 방해가 된다고 폐지하고 기타 모든 선진국들이 어린애들 때부터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오늘날 방송이나 언론에서 그리고 교육개혁을 빙자하여 자행되는 沒價値的이며 無主體的이고 無國籍이며 서구(특히 미국)지향적 가치인식 기준이 만연된 현실은 앞으로 국가 장래를 생각할 때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콤퓨터 키펀칭하는 사람과 엑스포의 도우미(그들의 일도 중요한 것이지만 획일화가 문제)만 존재하는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 속빈 젊은 엄마(최근 TV 광고 탓도 있지만 그러한 광고가 버젓이 방영되도록 한 자들의 의식이 일차적으로 문제지만)가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한국말부터 시작하면 영어발음 나빠진다고 영어(미국어)부터 가르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言語라는 것이 개인의 의식과 사상, 나아가 국가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日帝 때 우리말 지킬려고 감옥에까지 간 선열(조선어학회 사건)들에 부끄럽지 않는가. 아무튼 이러한 젊은이와 학생들이 다음 시대인 이른바 ‘21세기, 세계화, 국제화’ 운운하는 세대에 한국의 올바른 主役이 된다는 것은 緣木求魚다. 차라리 나의 생각이 杞憂이길 바랄 뿐이다.

여하튼 ㅎ씨가 그러한 인물이기에 그가 수십 년간 보직교수로 재직한 ㄱ대학에서의 4.18문제와 ㅅ대학 총장시절 마지막에 학생들의 퇴진요구데모 그리고 노태우 前대통령(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임기 말기의 ‘얼굴 총리’인 그가 무슨 얼굴로 감히 지금도 신문과 방송 등에 나와 함부로 발언을 하는가. 그의 발언대로라면 당시 교수데모에 앞장섰던 임창순 교수나 변희용 교수 등은 들러리였던가.

2.

현재 여러 가지로 혼란한 우리의 사회정치적 모습을 보면서 儒學思想 가운데 出處思想에 투철한 선비정신이 아쉽다. 왜 옛날부터 領議政이나 大提學보다도 出處에 엄정한 處士나 先生을 더 귀하게 여기고 존숭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나 학자는 끊임없이 배운 학문으로 세상을 맑게 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 즉 민중과 사회를 위해 淸議로서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속을 감시하여 잘못 되었을 경우 탄핵하고 교화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또한 儒學을 공부한 자가 이 출처에 분명하지 않으면 선비로서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바로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王과 朝廷에 학자의 양심과 명예를 팔아먹는 꼴이 되고, 나아가 백성과 세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에 군림하는 비리와 악의 무리에 동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듣는 朝廷일수록 지조있는 학자를 끌어내어 그들의 정권조직에 참가시키려 한다. 그것은 바로 비판세력을 무마하고 또 학자를 우대한다는 미명하에 그 학자의 재야적 명성을 퇴색시켜 버리고 끝내 올바른 비판세력마저 잠재우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전두환 前대통령과 노태우 前대통령의 비자금 문제와 12.12 군사 쿠테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살문제’로 두 사람이 구속되어 재판받는 모습이 텔레비젼에 시끄러운 이 때에 그 당시 전후 그 정권에 참여한 학자들의 出處는 관심있는 문제이다. 왜 군인출신들만 재판대에 세워야 하는가. 그들을 이론이나 정신적으로 지원해 온 학자나 총리 장관으로서 노골적으로 참여하여 지지한 학자출신 관료가 더욱 문제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재판하고 처단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어도 과거의 정치비리나 사이비 학자관료들을 비판하는 통과의례가 있어야 민주화 운운하는 현재의 대명천지에 다시 국가의 중요한 직책(ㅎ씨는 최근 노사조정위원장인가 하는 직책을 맡았다)을 맡거나 매스컴에 나와 국민의 귀를 더럽히고 나라를 誤導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소위 ‘元老’라는 자들 때문에 한 마디로 학문에 가치 기준과 논리적 근거가 상실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學者官僚들에게는 한결같이 옛날 선비의 出處가 새삼 아쉬운 점이다.

당시 매스컴을 통해서만 그를 판단한 사람은 혹시 앞서 거론한 ㅎ씨만은 이제까지 다른 학자출신 관료보다는 그래도 좀 나은 인물이라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익히 아는바 대학 교수가 대학에서 補職에 연연하여 學·處·總長 자리를 轉轉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당시 연일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하고 방송이 시끄럽게 떠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이니 ‘인품이 고매한 학자’이니 하는 것은, ‘선비’와 ‘학자’라는 단어가 진정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지껄이는 記者들의 천박한 아부의 言辭였다. 그러한 인물이 선비라면 조선조 올바른 선비들은 무엇인가. 그와 함께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의식이나 지식도 없이(아니면 교활하게 ‘민주’를 이야기 하면서 ‘反民主’를 목적)언어를 농하거나 국민을 오도하는 기자들도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라 생각된다. 不義를 보고 목숨까지 걸고 直言을 하는 것이 선비이지 기회주의적으로 이중적인 僞善의 발언으로 改革이 아닌 保守로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만들 소지가 다분한 발언을 하는 것이 분명 선비는 아니라 생각한다.

6공 말기 그가 끝내 벼슬을 固辭하지 못하고 총리 임명을 수락하면서 한 말인즉 ‘대통령의 부름에 두 차례 이상 거절하는 것은 국가원수 모독이라고 생각 운운’한 것이었다. 그런데 『孟子』에 보면 “백성이 가장 귀하고 社稷(국가)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는 말도 있고, 『荀子』에서도 “임금은 배고 서민은 물이다. 물이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고 하였다. 南冥 曺植 선생도 「民巖賦」에서 이를 재확인하고 있다. 하물며 王朝時代인 당시에도 來庵 鄭仁弘 선생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는 맹자의 민본사상에 근거한 60여 차례에 걸친 절실한 사직상소와 수 차례는 아예 사직상소도 없이 벼슬을 던지고 낙향한 것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명시(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하고 있는 데도, ‘국가원수 모독죄’(刑法 제104조의 2항을 類推한 것인가? 그는 더구나 비록 西洋法制史와 民法專攻이긴 하지만 법학자 출신이니 형법의 上位法이 무엇인지를 알 것인데도, 왜 그렇게 말했을까? 바로 그것은 학자의 出處思想을 모르는 소치일 것이다)를 운운하는 것인지(刑法의 관련조항은 ‘국가모독 등 죄’로 ‘內國人이 外國에서’란 단서조항이 있으니 그의 행위는 범죄 구성요건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大統領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나, 여하튼 선비나 學者로서 세 번도 벼슬을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면서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참고로 來庵은 右議政이 제수되자 무려 15번을 사퇴하였다.

요즈음 명색이 學者라는 사람 가운데 고려대 總長을 지내고 5공에 의해 총장직을 강제 퇴임당한 元老 史學者인 김준엽 교수 외에, 과문의 탓인지 모르나 그 어떠한 사람도 정부의 총리나 장관직을 끝내 固辭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더구나 南冥과 來庵은 劉備의 三顧草廬에 의해 나아간 諸葛亮마저 비판하거나, 帝王과 신하 사이의 의리나 결과적으로 功業이 있어 백성이 인정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일정 부분만 인정하는 마당이다. 그런데 들은 바로는 王朝時代 帝王도 아닌 오늘날 民主時代의 ‘國民의 公僕’이라는 역대 大統領이란 사람들이 직접 한 번이라도 찾아가지 않고 아들을 보내거나 비서실장을 보내는 無禮한 짓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한 德이 없고 무례한 대통령들인데도, 명색이 敎授나 學者라는 사람들이 “얼씨구나”하고 總理나 長官으로 나아갔다면, 바로 이런 데에서부터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안되고 혼탁해지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大權’을 가진 사람(왕이나 대통령을 불문하고)은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이에 대한 논리는 중국 明末淸初 시대 黃宗羲의 [明夷待訪錄]에 잘 나와 있다). 그래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에 經綸이 있는, 즉 經世思想이 있는 사람을 모셔오려고 한다면 극진한 예를 갖추어야 하고, 또 아무리 예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軍事政權과 같은 정부에 참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朴政熙 前대통령의 권위주의 정치에 대해 옹호하고 군사 쿠테타 이후 ㅅ대 총장을 하면서 대학에 대한 통제와 교수·강사들에게 처우개악을 한 형법학자 ㅇ씨가 있는가 하면, 유신말기까지 그와는 다르게 자유당 시절부터 계속 박정희 정권 시대에 ㅅ대와 ㅅ대 법대교수로 있으면서 독재정권을 비판해 왔던 ㅎ씨는 ㅅ대 총장직을 채 6개월 정도에 웬일인지 維新政權 말기에 입각하여 문교장관과 법무장관을 지냈다. 그대로 학교에 남아 교수와 총장의 길을 갔다면 아마 5공 6공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교육이 일정부분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제대로 정년을 맞이한 교수가 없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수학자들의 出處가 어떠하다는 反證일 수 있다.

이를 볼 때도 선비와 學者의 出處는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민중과 나라에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안다면 함부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잘못된 출처는 그가 유명한 교수이고 碩學일수록 더욱더 반민중적이고 악의 세력에 동조하여 반역사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물론 儒學의 宗旨가 ‘修己治人’이라 했으니, 선비학자로서 벼슬을 固辭하는 것만이 能事는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修己’되지 않았거나 시대가 올바르지 않으면 재야에 남아서 현실을 비판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인재를 길러야 한다. 그리고 때를 만났으면 태평성대를 위해 당연히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국가를 교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領議政’ 3명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1명의 ‘大提學’(弘文館 藝文館, 成均館 등의 정2품 벼슬: 대개 당대 벼슬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학문이 높은 자를 임명)이고, 3명의 대제학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1명의 ‘處士’(왕의 召命이 있어도 나아가지 않은 재야의 선비)이며, 3명의 처사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이 1명의 ‘先生’(진정한 학문사상과 出處 그리고 많은 제자를 올바르게 길러 후세에 모범이 되는 인물)이라는 말이 있었다.

오늘날도 훌륭한 스승(先生)과 大義에 기초한 기개있는 선비(處士)를 대학총장(大提學) 9명보다도 총리 27명보다도 더 영광스럽게 느낄 때, 올바른 사회와 정치 그리고 윤리와 나라의 紀綱이 확립될 것이다. 大學에서 補職이나 맡으려 하고 政府에서 長官이나 總理職을 주면 거침없이 사양하거나 부끄러움 없이 벼슬자리에 나아가 그들이 과연 이 역사에 어떻게 무슨 짓을 했던가?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아야 한다.

이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의 責務와 出處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것을 모르고 지식을 팔아 명예와 이록을 탐하는 것은, 일찍이 南冥 선생과 來庵 선생이 당시의 명망있던 학자관료들의 출처와 학문경향과 출처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어 말한대로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欺世盜名)’하는 것이고, ‘이익을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嗜利無恥)’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3.

論者인 본인은 학위논문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책과 논문이나 글들을 통해서 발표한 것과 평소 발언이 과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의 염려와 우려를 많이 사고 있다. 그러나 南冥 曺植 선생과 來庵 鄭仁弘 선생의 出處思想에 관한 硏究 논문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지만, 哲學이란 ‘時代精神의 精華’라고 한다면 그 시대의 인물에 대한 출처에 대해 올바른 褒貶이 없이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의 현실이라는 시대 정신이 투여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다.

왕조시대에도 어떠한 상소문도 왕이 읽어보아야 한다. 상소문이 시의적절한 忠義의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가와 과격하거나 온건하냐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외형의 포장된 것이 거칠다하여 내용을 보지 않고 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중간에 그것이 차단되는 朝廷이거나 읽지 않는 왕이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던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앞 시대 400년 가까이 눈치보며 웅크리고 南冥文集의 글 내용까지 고쳐가며 남명의 참 모습과 올바른 정신을 가리고 흐려가면서 과연 무엇을 얻었던가? 乾坤一擲! 과감하게 떨치고 일어서서 항상 出處大義에 기준을 두고 言行一致 한다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南冥精神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현실론과 타협론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줄 안다. 이완용 등의 친일매국노도 이등박문의 얘기를 끌어와 ‘동양삼국의 평화’나 ‘황실의 안위’를 운운하였다. 그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일제 말기의 친일파들도 ‘대동아공영권’이나 ‘미영귀축’을 운운하다가 해방 후에는 친미파로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獨裁誤國과 經濟破綻 그리고 買辨敎育의 원흉들이 되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임진왜란 때 來庵이 왜 柳成龍의 主和誤國을 탄핵하게 되었는지, 인조쿠테타와 병조호란 때 김상헌의 斥和論이 왜 尊明事大와 小中華論으로 끝내 誤國亡氓이 되게 하였는지, 즉 기준이 없는 현실타협론이나 시대상황을 모르는 명분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한다.

옛날의 선비나 오늘의 학자를 불문하고 잘못된 현실과 출처가 분명치 못한 인사에 대해 춘추대의의 정신으로 비판하지 않고 온건을 논하는 자는 이미 선비나 학자가 아닌 줄로 알고 있다. 그들은 사회나 국가의 안위보다 일 개인의 명예지위나 이익 그리고 일 가문의 일에 이미 눈이 어두운 인물이 아닌가 한다. 물론 君子는 德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지 않아야 政丞大臣도 하고 ‘有德作王’이니 大權도 쥘 지 모르지만, 선비학자는 모름지기 大義를 더욱 숭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 감히 南冥 선생과 來庵 선생께야 비길 수 없지만, 조선조 선비들이 상소문에서 정승대신의 불의와 비리 그리고 似而非 中庸의 處身을 한 인물인 漢代 胡廣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탄핵했는데, 이 시대가 그래도 ‘민주’시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인데, 얼마전에 政府의 總理지낸 사람과 당대 有名無實한 학자출신 관료들의 그 出處가 불분명하고 발언이 국가의 안위와 미래에 우려되는 바를 春秋大義의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 과격하다는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우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러한 변명의 글을 蛇足으로 적는 본인 스스로가 먼저 반성해야 될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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