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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73. 이산해(李山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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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07회 작성일 03-10-2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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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그는 1539년(중종 34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55.jpg

그가 남긴 자료는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일찍이 이산해는 「숙부묘갈명(叔父墓碣銘)」에서 ‘어리석고 못나 일찍이 책상자를 지고 스승을 쫒지 못해 집에서 배움에, 비록 훈도하여 성취한 효과를 두지는 못했지만 문호를 유지해서 죄악에 빠지지 않는 것은 모두 숙부께서 주신 것(『鵝溪遺稿』, 卷6)’이라고 하여 이지함(李之菡)으로부터 받은 훈도가 적지 않았음을 밝힌 바 있다.
그는 5세(1543년)에 천품이 뛰어나고 재예가 숙성하여 능히 대문장을 지어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쳐졌고 등과한 뒤에는 다시 재행으로써 중망을 받았다(『明宗實錄』 22년). 6세(1544년)부터는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타고난 자질이 청수(淸粹)하여 진순(眞淳)한 행실이 있었다(『明宗實錄』 18년)고 한다.
과거 및 벼슬 : 이산해는 20세(1558년)에 식년 생원 및 진사가 되었고, 23세(1561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23세(1561년)에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24세(1562년)에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대액을 썼으며, 이어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25세(1563년) 10월 1일에는 홍문관 박사에 제수되었으며(『明宗實錄』 18년), 26세(1564년)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수찬(修撰)을 엮임하여 27세(1565년)에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39세(1577년)에는 이조‧예조‧형조‧공조의 참의(參議)를 차례로 엮임하고, 대사성(大司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40세(1578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서인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윤현(尹晛)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50세(1588년)에는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51세(1589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1590년에 광국공신 3등으로 책록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의병활동 : 이산해는 54세(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나, 양사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어 백의로 평양에 이르렀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 평해로 귀양갔다(蔡濟恭, 『樊巖集』, 「鵝溪神道碑銘」).
그후 57세(1595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영돈영 부사(領敦寧府事)로 복직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61세(1599년)에 선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다시 영의정에 배(拜)하였으나 이미 동인의 세력이 약화되어 반대파의 모함이 계속되자 사직하고 충남 신창(新昌) 시전촌(柹田村)에 내려가 시문으로 소요하였다.
그는 71세(1609년) 2월에 평소 문장을 보고 기대했던 둘째 손자 구(久)가 요절하자 정신적 충격으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71세를 일기로 서울 장통방(長通坊, 현재 水標洞)에서 생애를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산수묵화(山水墨畵)에 뛰어났고, 문장에도 능하여 선조조(宣祖朝) 문장 8대가의 1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일곱 살에 능히 글을 지으므로 신동(神童)이라 불리웠다. 자라서는 깊은 마음에 술수가 많아서 밖으로는 비록 어리석고 둔한 듯하지만, 임기응변을 할 때에는 변화무쌍함이 귀신과 같았다. 오래 전병(銓柄)을 잡다가 재상에 이르렀는데, 그가 처음 여러 관직을 임명할 때에는 청탁을 완전히 끊어서 문앞이 엄숙하니, 사람들이 그 사심이 없음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선묘(宣廟)께서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검약함을 좋아하여 대우해 주며 의심하지 않았다. 좋은 명성을 얻은 뒤로는 드디어 조정의 권한을 잡고 그가 처음에 골라 등용한 두세 소인배를 심복으로 삼아, 때때로 한 밤중에 몰래 불러 은밀히 의논하면서 인물을 평가하여 뽑아 등용하거나 탄핵하여 내칠 것을 모두 결정하였다. 그런 뒤에 그 두세 사람이 모두 차례로 우익(羽翼)과 조아(爪牙)의 벼슬에 올랐기 때문에, 사람들도 감히 그 어디에서 그렇게 된 것인가를 지적하여 배척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역시 한 시대의 공의(公議)로 인정하였다 …… (『광해군일기』 1년).

□ 참고자료

『明宗實錄』 15년, 17년~20년, 22년.
『宣祖實錄』 즉위년~1년, 3년~4년, 6년~8년, 13년~14년, 16년~41년.
『宣祖修正實錄』 11년~13년, 16년~17년, 20년~28년, 30년, 32년~33년, 39년~40년.
『光海君日記』 즉위년~9년, 11년.
『仁祖實錄』 1년~2년 5년, 8년, 17년, 19년, 22년, 24년.
『孝宗實錄』 3년.
『顯宗實錄』 8년, 14년.
『顯宗改修實錄』 8년, 14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4‧5‧8‧10‧12‧14‧16‧17‧18.
李山海, 『鵝溪集』(『韓國文集叢刊』 47), 民族文化推進會, 1990.
金台俊, 『朝鮮漢文學史』, 朝鮮語文學會, 1931.
李家源, 『韓國漢文學史』, 서울: 民衆書館, 1976.
金 雄, 「鵝溪 李山海의 詩文學攷」, 東國大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0.
金種碩, 「鵝溪 李山海의 流配詩 小考」, 『安東漢文學論叢』 6, 凡溪 安秉烈敎授華甲紀念特輯號, 安東漢文學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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