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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61. 정복현(鄭復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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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507회 작성일 03-10-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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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정복현(鄭復顯, 1521∼1591)의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매촌(梅村)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1년(중종 16년) 4월 18일에 아버지 신(愼)의 아들로 거창(居昌) 무등리(無等里) 죽곡(竹谷)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48.jpg

그는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며, 그가 남긴 자료는 『매촌실기(梅村實紀)』 2권 1책이 전한다.
급문 : 정복현은 13세(1533년)에 당곡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22세(1542년)에 덕천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며칠간 머무르면서 시서(詩書)를 강질(講質)하였고, 일찍이 남명선생은 ‘군(君)은 나와 더불어 상장(相長)할 만하다(『南冥集, 「編年』 42歲條; 『梅村實紀』, 卷下, 附錄, 「年譜」 22歲條)’고 하였다.
강학 및 교유 : 정복현은 10세(1530년)에 함양의 대수촌(大樹村)에서 독서하였고, 15세(1535년)에 『상서』를 공부하였다.
30세(1550년)에 오건과 더불어 경호수(鏡湖水)로 남명선생을 모셨고, 33세(1553년)에 노진, 강익, 오건과 더불어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41세(1561년)에는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 강익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43세(1563년)에는 운학정에 머물러 있었고, 3월에 남명선생이 남계(灆溪)로 와서 일두(一蠹, 鄭汝昌)선생의 사당을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의 강론을 들었다. 이 때 그는 문경호, 강익, 정유명, 임희무 등 이 지역 선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여 남명선생과 같이 온 하항(河沆),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강론하였다(『嶧陽集』). 45세(1565년)에는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를 유람하였는데 당시 오건, 도희령, 권문임, 정구(鄭構) 등이 모였고, 또한 단속사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9월에 오건, 조종도 등이 운학정(雲鶴亭)으로 찾아왔다. 46세(1566년) 5월 13일에는 강익, 노관, 양홍택, 김우굉, 김우옹 등이 남계서원에 모였다. 49세(1569년)에는 조식(曺湜)이 찾아와서 이기론(理氣論)을 변질(辨質)하였다.
51세(1571년)에는 남계서원을 배알하고 원근의 선비들이 모였는데, 이 때 「백록동규도」를 써서 보여주었다. 52세(1572년) 에는두 아들 길(吉)과 오(吾)에게 오건(吳健)을 사사(師事)하라고 명하였다. 53세(1573년)에는 뇌계(雷溪) 위에 지은 제광정(霽光堂)에서 『주역』을 공부하였고, 54세(1574년)에는 갈천(葛川)선생을 방문하였다.
저술 : 정복현은 47세(1567년)에 『심학전서』를 저술하였고, 『역리연설(易理演說)』을 지었다.
서원창건활동 : 정복현은 31세(1552년)에 강익, 노관(盧祼), 임희무, 박승임(朴承任) 등과 더불어 일두선생의 서원을 창립하였다.
향사 : 정복현은 1591년(선조 24년)에 세상을 떠난 후 1777년(정조 1년)에 거창의 영빈서원(瀯濱書院)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鄭復顯, 『梅村實紀』 2권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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