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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43. 이대기(李大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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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313회 작성일 03-10-2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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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대기(李大期, 1551∼1628)의 자는 임중(任重)이고 호는 설학(雪壑)이며, 본관은 전의(全義)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그는 1551년(명종 6년) 3월 초 3일에 아버지 득분(得)의 아들로 초계군(草溪郡) 성산리(城山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34.jpg

그가 남긴 문집은 『설학집(雪壑集)』 4권 2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대기는 7세(1557년)에 외조부인 황강(黃江, 李希顔)선생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였고, 9세(1559년)에는 남명선생과 최영경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桐溪 撰, 「墓碣銘」).
39세(1589년) 봄에는 우곡재(尤谷齋)에 가서 모임을 가졌는데, 문경호, 하혼, 조응인, 김두남(金斗南), 강익문(姜翼文), 정인준(鄭仁濬), 정인함, 박수종(朴壽宗) 등과 함께 모였다. 최영경을 모시고 하혼의 집으로 가서 김면, 박성, 조응인, 문위, 박정번 등과 더불어 담화하였고, 유세온(柳世溫)이 와서 배웠다. 76세(1626년)에는 이형원이 와서 공부하였다.
급문 : 이대기는 13세(1563년)에 승지공(承旨公)을 따라가서 진산선추(晉山先楸)를 돌아보고, 뇌룡정(雷龍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뵈었다(『南冥集』, 「編年」 63歲條; 『雪壑集』, 卷3, 「年譜」 13歲條).
과거 및 벼슬 : 이대기는 31세(1581년) 여름에 성여신, 이대약(李大約), 이종영 등이 방문하여 며칠간 토론하고 함께 강양시(江陽試)를 치루었다(『浮査集』).
이대기는 44세(1594년)에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에 제수되었고, 45세(1595년)에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제수되자 그는 임지로 내려가 고을을 잘 다스려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49세 때(1599년) 8월 21일에 형조좌랑이 되고 12월 3일에 형조정랑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32년).
강학 및 교유 : 이대기는 17세(1567년)에 최영경을 모시고 남명선생을 따라 학문을 익히고 김우옹과 함께 공부하였다.
24세(1574년)에는 합천의 지곡재(智谷齋)에서 동향 선비인 조응인, 문경호 등과 더불어 『중용』을 공부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전치원을 방문하여 성명(誠明)을 강론하였다. 25세(1575년)에는 이천수(李天受), 전우(全雨)와 더불어 『심경』을 공부하였고, 안극가(安克家)를 방문하여 『성리대전』을 탐구하였다.
32세(1582년)에는 하혼, 조응인과 더불어 덕천서원에 참배하러 갔으며, 가을에 안극가, 노극성(盧克誠)과 더불어 글방에 모여 공부하였다. 자굴사에서 성여신, 곽재우와 더불어 강마하면서 겨울을 지냈다(『浮査集』). 35세(1585년)에는 서실을 설학(雪壑)이라고 편액하였다. 37세(1587년)에는 도동정사(道洞精舍)에서 최영경을 뵙고,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 하수일과 더불어 『주례』를 공부하였고, 38세(1588년) 가을에는 최영경이 찾아와 며칠간 머물면서 대화를 나누고 포산(苞山)으로 가서 박성(朴惺)을 방문하였으며, 여러 선비와 더불어 우곡재(尤谷齋: 문경호의 재실)에서 공부하였다.
40세(1590년) 6월에 최영경이 정여립(鄭汝立)의 무옥(誣獄)으로 화를 입었다. 이천경이 방문하였다. 56세(1606년)에는 박인(朴絪)이 찾아와 여러 날 머물면서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의병활동 : 이대기는 1592년(선조 25년) 42세에 왜란이 일어나 열군(列郡)이 와해되자 전치원과 더불어 창의하여 토적(討賊)할 것을 약속하였고(『濯溪集』), 이 때 전치원과 더불어 향병을 모아 곽재우와 합세하였다. 43세(1593년) 정월에는 김면을 만나러 갔으며, 의령에 이르러 곽재우, 오운 등과 일을 논의하였다. 46세(1596년)에는 동향의 선비이자 함께 의병을 일으킨 전치원이 세상을 떠나자 의흥에서 공무 때문에 직접 오지는 못하고 아전을 보내 애도를 표하고 조문하였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 전 좌랑 김면(金沔)·박성(朴惺), 전 참봉 노흠(盧欽),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전우(全雨)·이대기(李大期) 등이 변란을 듣고 소매를 걷어 붙이고 일어나 모의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기어이 왜적의 무리들을 섬멸하기로 작정하였다 …… (『선조실록』 25년).

저술 : 이대기는 70세(1620년) 『속잡록(續雜錄)』에, ‘초계 전 군수 이대기가 상소문을 올려 정온(鄭蘊)을 신구(伸救)하면서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므로 백령도로 귀향갔다’고 하며, 그가 남긴 저술은 『백령지(白翎志)』, 『설학수문(雪壑謏.聞)』 등이 있다.
스승추존활동 : 이대기는 26세(1576년)에 덕천으로 가서 서원 창건을 논의하였다. 이는 최영경이 ‘[이곳은] 남명선생이 만년에 공부한 곳이므로 서원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도내의 선비들과 산천재에서 서원의 창건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77세(1627년) 10월에는 성여신 및 제현들과 청계서원(淸溪書院)에서 만나 「원록(院錄)」을 수정하였다.
문인신원에 관해서 이대기는 40세(1590년)에 7월 11일 이로, 오장(吳長), 하응도, 박제인, 하혼, 이정(李瀞)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茅村集』).
52세(1602년) 2월에 강익문, 정인준 등과 더불어 청계서원(淸溪書院)에서 공부하였고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렸다.
62세(1612년)에 진사 하징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에 최영경도 배향할 것을 소청(疏請)하였다. 64세(1614년) 2월에 오장, 강대수(姜大遂) 등과 더불어 정온(鄭蘊)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옥사로 옥에 갇히게 되자 이를 변호하기 위한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다.
향사 : 이대기는 78세(1628년) 11월에 병으로 누워 자질(子姪)에게 엄히 명하기를 ‘충효(忠孝)와 경의(敬義)는 우리 가문이 오로지 지키는 것이니 서로 면학하면서 선업(先業)을 폐하지 마라’고 하면서 안지당(安知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민당집』에 의하면, 그는 황강(黃江)선생의 외손이며, 임진년에 향병을 모집하여 창의했으며 관직은 군수였고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无悶堂集』, 卷1, 「師友錄」)고 한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25년, 32년.
『光海君日記』 7년, 12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2·17·18·22.
李大期, 『雪壑集』 4권 2책.
金德珍, 「濯溪 全致遠과 雪壑 李大期의 義兵活動」, 『南冥學硏究』 2,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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