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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36. 이로(李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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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408회 작성일 03-10-2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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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로(李魯, 1544∼1598)의 자는 여유(汝唯)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며,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4년(중종 39년)에 의령 부곡리(孚谷里: 현재 부림면)에서 인의공(引儀公) 효범(孝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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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문집 및 저술은 『송암집(松巖集)』 6권 3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이로는 13세(1556년)에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고, 17세(1560년)에 부친의 명으로 당시 거제에 귀향 온 정황(丁熿)을 찾아가 글을 배웠다. 정황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 1547년(명종 2년)의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곤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1548년) 거제로 다시 이배되었으며 천품이 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을 생활의 신조로 삼았던 인물이다. 19세 때(1562년) 아우 보(普), 지(旨)와 함께 최영경의 문하에서 글을 익혔다.
급문 : 이로는 20세(1563년)에 두 아우와 함께 덕산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수업을 받았다. 남명선생이 한 번 보고 마음으로 허락하여 정성껏 가르쳤다(『南冥集』, 「編年」 63歲條; 『松巖集』, 卷5, 附錄, 「年譜」 20歲條)고 한다.
과거 및 벼슬 : 이로는 21세(1564년)에 진사회시(進士會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47세(1590년) 10월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41세(1584년)에 봉선전(奉先殿) 참봉에 제수되었고, 48세(1591년)에 종7품 벼슬인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다.
50세(1593년) 가을에는 형조좌랑에 제수되고 이어 창원가수(昌原假守)에 임명되었으며 51세(1594년)에는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다. 53세(1596년)에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나 체찰사 이원익이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54세(1597년)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강학 및 교유 : 이로는 25세(1568년) 봄에 성주로 가서 김우옹, 정구(鄭逑) 등을 방문하였고, 30세(1573년) 봄에 오건을 방문하였다. 41세(1584년)에 권도(權濤)가 와서 공부하였다.
의병활동 : 이로는 1592년(선조 25년) 49세에 서울에 있었는데, 왜구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종도와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오다 5월 초 4일에 함양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을 만났다. 이 때부터 그는 김성일을 따라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초 10일에는 김성일을 따라 산음(山淸)에 도착하여 소모관의 직책을 맡아 삼가, 단성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하고, 삼가로부터 단성을 거쳐 진주에 도착을 하였다. 진주에서 초유사와 왜적을 막을 방책을 마련하고, 또 인근 의령 합천 지역을 돌며 의병들을 격려하는 등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관찰사 김수(金睟)가 곽재우(郭再祐)를 무고하자 김성일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곽재우를 변호하였고, 7월에 왜적이 진주에 쳐들어 오자 초유사를 따라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어 김성일의 추천으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 김성일이 좌도 관찰사로 옮겨가자 그는 초계에서 송별하고 다음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9월에 김성일이 우도 관찰사로 다시 오자 지리산에서 나와 산음에서 오장(吳長)과 함께 김성일을 맞이하였다. 10월에 창원, 부산, 김해에 주둔한 왜적이 진주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진격해 오자 이로는 김성일을 따라 길목인 의령으로 가서 왜적을 무찔렀다. 이 때 진주성에서는 판관이었던 김시민(金時敏)이 승진하여 목사가 되어 진주성을 사수하였다.
이로가 50세(1593년)되는 해에 김성일이 진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이로는 위독한 김성일 곁에서 주야로 간호하였다. 이로는 김성일의 시신을 염한 뒤 임시로 지리산에 매장하여 7개월이 지난 뒤 그의 고향에 안장하였다.
저술 : 이로는 28세(1571년) 여름에 구촌 유경심의 신도비(神道碑)를 지었고, 48세(1591년)에 『사성강목(四姓綱目)』을 편찬하였으며, 54세(1597년) 3월에는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완성되었다.
스승추존활동 : 이로는 33세(1576년)에 최영경, 하항(河沆),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광우, 이조 등과 서원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竹閣集』).
문인신원과 관련하여 이로는 26세(1569년)에 충현(忠賢)의 신원(伸寃)을 상소하였고, 47세(1590년)에 스승 최영경이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자 신원 상소를 올렸다. 이 때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1589년)에 연루되자 그는 박제인, 이정(李瀞), 오장, 문위, 하혼 등과 더불어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문경호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이로는 1598년(선조 31년)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仁祖實錄』 3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3·16·17.
李 魯, 『松巖集』 6권 3책(『韓國文集叢刊』 54), 民族文化推進會,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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