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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27. 임희무(林希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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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504회 작성일 03-10-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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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임희무(林希茂, 1527∼1577)의 자는 언실(彦實)이고 호는 남계(溪)이며, 본관은 나주(羅州)로 함양(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중종 22년)에 함양군 동쪽 서평촌(黍坪村: 현재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서 아버지 참봉 각(珏)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문인021.jpg

그가 남긴 문집은 『남계집(灆溪集)』 2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임희무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다.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던 임희무는 당시 함양에서 많은 선비들을 가르친 당곡(唐谷, 鄭希輔)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이 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은 인근에 자자하였다.
급문 : 그는 32세(1558년)에 남명(南冥)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과거 및 벼슬 : 임희무는 32세(1558년)에 별시에 급제하였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예(禮)를 다하여 부친상을 마치고 이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성균관 학유, 홍문관 정자, 사헌부 지평, 정언, 장령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금산, 순창, 밀양, 능주, 울산군수 등을 두루 지냈다. 능주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강학 및 교유 : 임희무는 23세(1549년) 8월 초순에 감악산으로 남명선생을 모시고 유람하면서 포연(鋪淵)을 구경하였다. 남명선생은 산수를 완상하고 포연에서 함께 목욕하면서 다음과 같이 「욕천(浴川)」이라는 시를 남겼다.

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몸,
천 섬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32세(1558년)에는 노진, 이후백, 강익, 오건 등과 학문을 연마하였고, 37세(1563년) 3월에는 남명선생이 남계로 와서 정여창의 사당을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의 강론을 들었다. 이 때 문경호(文景虎), 강익, 정유명, 정복현 등 이 지역 선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여 남명선생과 같이 온 하항(河沆),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강론하였다(『嶧陽集』).
40세(1566년) 봄에는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강익, 김우옹 등과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돌아왔다. 인근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 임희무도 참석한 것이다. 이 해 남명선생 및 동료들과 더불어 안의 화림동을 유람하였다.
서원창건활동 : 임희무는 26세(1552년)에 강익을 비롯한 이 지역 선비들과 일두(一蠹, 鄭汝昌)선생을 배향할 남계서원(灆溪書院)을 창립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마지막 벼슬인 능주군수에서 물러난 후 그는 현재 망북정(望北亭) 자리에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항상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잊지 않았지만 다시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쪽 땅에서 1577년(선조 10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참고자료

『宣祖實錄』 9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林希茂, 『灆溪集』 2권 1책.
『民族文化大百科辭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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