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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30. 이종욱(李宗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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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91회 작성일 03-10-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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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이종욱(李宗郁, 1553~1623)의 자는 희문(希文)이고 호는 화헌(和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는 1553년(명종 8년)에 태어났고 이종영과는 재종간이다.
그는 재종형인 종영과 더불어 남명선생에게 급문하였고, 임진왜란 때(선조 25년, 1592년)에 군공(軍功)을 세워 주부(主簿)에 배해졌으며,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후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동에 강정(江亭)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났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李宗郁).
1611년(광해군 3년) 6월 19일 실록에 의하면, 이종욱은 정인홍(鄭仁弘)과 조식(曺植)의 무함을 밝히는 소(疏)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 신의 스승인 찬성 신 정인홍이 성대(聖代)를 만나 벼슬이 이공(貳公)에 이르렀는데 사직하면서 차자를 올리는 날을 맞아,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수호하는 정성을 드러냈습니다. 그 언어와 문자 사이에 마치 두 선현의 심적(心迹)을 평론하는 듯한 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인홍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꺼낼 수가 없고, 두 선현이 아니고서는 인홍으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 .
대체로 조식은 시골에 묻혀 살면서 학문을 함에 있어 오로지 경(敬)‧의(義)를 중시하였고,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을 시종 도에 따랐습니다. 이황은 한 시대에 함께 태어났고 뿐만 아니라 도(道)도 똑 같았으나, 이미 한 번도 서로 만난 지면(知面)이 없는 처지이면서도 도리어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우리 학문에는 깊지 못하다’는 말로 현저하게 헐뜯고 나서면서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스승을 존숭하는 인홍의 마음으로서는 어찌 꾹 참고 입을 다문 채 한 마디 변명하는 말을 안 하고자 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황의 무진년 자핵(自劾) 차자에 이르기를, ‘일시의 물정이 신더러 이름을 좋아한다고 하기도 하고, 산짐승에 비하기도 하고, 이단(異端)으로 배척하기도 한다’하였고 보면, 그 당시에 그를 비난하던 자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를 유적에서 삭제하고 죄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는 듣지 못했으니, 어찌된 것입니까 …… (『광해군일기』 3년).

향사 : 이종욱은 1847년(헌종 13년)에 도계서원(陶溪書院)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光海君日記』 3년.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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