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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28. 유덕룡(柳德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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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47회 작성일 03-10-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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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전(略傳)



유덕룡(柳德龍, 1563∼1644)의 자는 시현(時見)이고 호는 초료당(堂)이며, 본관은 문화(文化)로 삼가(三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63년(명종 18년) 7월 14일에 아버지 홍(洪)의 아들로 진주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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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자료는 『초료당실기(鷦鷯堂實紀)』 3권 1책이 전한다.
수학 및 교육 : 유덕룡은 5세(1567년)에 육갑(六甲)을 외웠고 구수(九數)를 해독하였다. 7세(1569년)에는 책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였다. 시험하여 가르치자 잘 듣고 기록하니 선고 부장공(部將公)이 매우 기특해 하였다. 남명선생이 듣고 불러서 이르기를, ‘미우(眉宇)만 나타날 뿐 아니라 재기를 뛰어나게 품부받았다. 이는 정성으로 가르쳐야 한다’면서 부장공에게 이르기를, ‘올해 나이가 8살이니까 내가 반드시 가르쳐야겠다’고 하였다. 8세(1570년)에는 백씨(伯氏) 졸헌공(拙軒公)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찾아 뵈었다. 선생이 『소학』으로 쇄소‧응대를 가르쳤고, 다른 아이와 달라서 선생이 그를 중히 여기면서 항상 옆에 앉혔다(『鷦鷯堂實紀』, 卷3, 「師友錄」). 9세(1571년)에는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최영경, 하응도 등과 더불어 의리공사(義利公私)를 강구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卷4, 「門人續集」 柳德龍; 『北山記』).
10세(1572년)에 하항(河沆)은 ‘이 아이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11세(1573년)에는 하항(河沆)으로부터 배웠다. 13세(1575년)에는 『희경(羲經)』, 『하락(河洛)』의 수(數)의 선후와 천(天)의 이치를 하항(河沆)에게 배웠다. 14세 때(1576년) 봄에 하항(河沆)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강학 및 교유 : 유덕룡은 22세(1584년) 봄에 보리사(菩提寺)에서 박사제(朴思齊)와 더불어 학문을 연마하였고, 23세(1585년)에 함안으로 가서 정구(鄭逑)를 뵙고 공부하였다. 26세(1588년) 여름 5월에는 재종숙부 유종지를 따라 원당동(元塘洞)으로 가서 수상회(壽觴會)를 열어 하항(河沆)을 맞이하였고, 유락(遊樂)의 순서를 청하였으며, 이정(李瀞), 하응도, 손천우, 하수일 등이 함께 하였다. 27세(1589년)에는 유종지가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이로부터 거업(擧業)을 일삼지 않고 침잠하였다.
41세(1603년)에는 부장공의 숙병이 생기자 백씨 졸헌공과 더불어 약을 드렸으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원당동에 장사를 지냈다. 이천경, 이광우, 정흔, 이유함, 진극경, 조계명 등의 제현들이 조문하였다. 44세(1606년) 4월에는 덕천서원을 배알하였고, 이대기, 권도, 박인, 하홍도 등과 더불어 며칠간 공부하다가 돌아왔다. 45세(1607년)에는 정흔과 더불어 뇌룡(雷龍)의 북쪽 바위에서 풍욕(風浴)을 하였고, 헤어지면서 시 한 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46세(1608년)에는 3년상을 한결같이 하였고, 가을에 삼가(三嘉) 토동(兎洞)으로 옮겼다. 뇌룡(雷龍)의 북암(北巖)위에 서실을 북산정(北山亭)이라고 하였다. 매일 사우와 더불어 『심경』, 『근사록』 등을 강론하였다. 49세(1611년)에는 오장(吳長)이 찾아와 북산정에 머물면서 시로써 토론하였다.
59세(1621년)에는 이광우를 찾아가 배산(培山)에서 수일 간 강론하고 돌아왔다.
64세(1626년)에는 유진이 북산정을 방문하여 밤새 토론하고 박인의 서실인 벽한정(碧寒亭)에 며칠간 머물면서 운(韻)을 나누었다. 65세(1627년)에는 동문 제현과 더불어 덕천서원에서 수일 간 공부하였다.
그의 「사우록(師友錄)」에 의하면, 조식(曺植), 하항(河沆), 최영경, 이광우, 유덕린(柳德麟), 이염, 이천경, 하응도, 이정(李瀞), 정구(鄭逑), 유종지, 진극경, 이조, 서사원(徐思遠), 이대기, 곽재우, 손천우, 하수일(河受一), 정흔(鄭昕), 박사제, 이유함(李惟諴), 하징, 조계명(曹繼明), 오장(吳長), 허홍재(許洪材), 박인(朴絪), 권도(權濤), 하경휘(河鏡輝), 하홍도(河弘度), 유진(柳袗), 이덕성(李德城) 등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鷦鷯堂實紀』, 卷3, 「師友錄」).
서원창건활동 : 유덕룡은 40세(1602년)에 하항(河沆)의 묘를 배알하였고, 다음날 남명선생의 묘를 참배하였다. 당시 덕천서원이 불에 타 버리자, 진극경, 이정(李瀞), 하징 등과 더불어 서원을 중건하고자 모의하자, 목사 윤공이 듣고 기뻐하여 도와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도구대(陶丘臺)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겼다. 47세(1609년) 가을에 덕천서원에 가서 하수일, 이유함, 오장 등과 더불어 의논하고, 하항(河沆)의 정사(精舍) 옛 터에 대각서원(大覺書院)을 세웠다. 48세(1610년) 9월 5일에 대각서원이 완성되었고, 하수일, 오장 등과 더불어 하항(河沆)의 위판(位板)을 봉안하였다.
향사 : 유덕룡은 1644년(인조 22년) 정월에 병으로 눕자 이내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북암서원(北岩書院)에 배향되었다.

□ 참고자료

『德川師友淵源錄』 6권 2책.
柳德龍, 『鷦鷯堂實紀』 3권 1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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