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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년경의 내암 정인홍 초상화와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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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孤竹
댓글 0건 조회 6,092회 작성일 06-11-1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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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李鈺1760~1813)이 1799년 10월 18일 삼가현으로 귀양 와서 1800년 2월 18일까지 삼가읍성 서쪽 밖 주막에 기거(주: 삼가면 하금리로 추정)하면서, 삼가현과 합천군 등을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을 적은 <봉성문여(鳳城文餘)>에 내암 정인홍 선생 사당과 초상화에 관련한 글이 실려 있는데, 사료적 가치가 큰 자료이다.

아래 이옥의 글에서 보듯 내암 정인홍이 1623년 인조반정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에도 100 여년 동안 합천사람들이 내암 사당을 건립하여 영정을 모시고 있었고, 1728년 소위 이인좌 조성좌의 난 후인 1729년(영조5) 4월 9일 왕조실록에 우의정 이태좌가, “정인홍의 증손(曾孫) 중 겹눈동자(重瞳)인 사람이 있어 영남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등 민심이 현혹되고 있다.”고 하자, 영조 임금이, “그 증손을 장살(杖殺)하라”고 명하는 기록과 내암이 중동(重瞳)있었다는 전설 등을 볼 때, 내암 정인홍은 80대 노인인데도 불구하고 눈에 광채가 나고,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사막의 여우라고 회자되던 롬멜 장군처럼 예리하고, 날렵한 몸매를 가진 백발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아래는 이옥의 <봉성문여>에 실려 있는 영의정 내암 정인홍 선생 관련 글이다.

『정인홍 상(鄭仁弘 像)

정인홍은 본래 합천사람이다. 합천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가야산에 풀이 마른 뒤에 인홍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띠집(주: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 그 옛터에 있었고, 그 띠집 안에 인홍의 초상화가 있었다. 마을 백성들은 두려워하며 받들어 모시기를 음사(淫祠: 합당하지 않은 사당)와 같이 한 것이 100 여년이었다. 마침 합천군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사실을 물어서 알고는, “죽은 역적이 무슨 사당인가”하고 불을 지르도록 명하였다.

집에 불을 지르자 집이 타버렸고, 초상화에 불이 붙지 않고 바람이 휙 불어 들려 올라가 마치 귀신이 있는 듯 하였다. 군수가 성을 내며 초상에다 돌을 눌러 불을 지르니 비로소 불이 붙었다.

얼마 안 되어 군수의 처자식들이 모두 병으로 죽었고, 군수 또한 마침내 법에 걸려 죽었다. 합천사람들은 지금까지 불 때문에 부른 화(禍)라고 여기고 있다.

생각하건데 귀신이 있다고 한 그 말은 반드시 진실로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한 기이하구나! 그 초상화는 늙은 여우를 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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