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호/2002년 6월15일]

[南冥先生評傳]-제1장 생애(生涯)

                 4. 산천재(山天齋)에 이는 대바람 소리(3)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발행인:김충렬 / 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8-9147~8

 

▣ 일두 정여창 선생을 배알하고
 

  이 해 3월에 남계(藍溪)에 가서 일두(一?) 정여창 선생의 사당에 가서 배알하고 여러 제자들의 강론을 들었다. 남명은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조계 유종지, 백곡 진극경을 데리고 남계에 갔는데, 개암 강익, 역양 정유명, 매촌 정복현, 남계 임희무와 인근의 많은 선비가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모여들어 강학 하였다. 이어서 일두 정선생에게 화제가 미치자, 남명이 말하길, “(일두선생은)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었는데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 천운이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남명은 일두선생에 대하여 출처의 애석함을 지적하고 있다. 평소 남명은 일두의 독실 강건한 학문과 행실을 깊이 존모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서서 억울한 죽음을 맞음으로써 그 출처의 엄중함을 지키지 못함을 못내 한탄하였으며, 이는 후학으로서 선생 자신의 출처를 더욱 단정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추강 남효온 등과 도의지교로 사귀었는데,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사초(史草)에 실린 것과 관련 연산군4년(1498) 무오사화에 얽혀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갔다가 연산군10년에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죽었다. 그는 뒤에 억울함이 풀려,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조광조, 김굉필, 이황, 이언적과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존받았다. 그는 스스로 낮추어 한갓 좀벌레라 의탁하여 ‘일두’라 자호(自號)하고 내적 수양공부에 충실하였으며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행실은 독실하였고 또 학문은 매우 넓고 깊어서 당대의 명망있는 학자로 추앙받았다. 『용학주소(庸學注疏)』 등 많은 저술을 하였으나 사화가 있자 부인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이를 모두 불에 태워버려, 지금 남아있는 저술의 편린은 다만 『일두선생실기』를 통하여 가늠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일두 정여창선생 사당비

    (문화재자료 239호, 경남 함양군안의면 풍산리 805-1소재)
     용문서원의 자리에 남아 있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의 사당비이다. 비문은 갈천 임훈이 글을 짓고, 석곡 성팽년이 글씨를 썼다.  선조 16년(1583)년에 이 비를 세웠다.


▣ 갈천 임훈의 여막에서 조문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의 여막에 가서 조문하였다.

  갈천은 자가 중성(仲成)이고 갈천은 호이다. 은진인(恩津人)인데 안음(安陰) 갈계에 살면서 남명과 종유하였다. 『갈천집(葛川集)』이 남아있다. 갈천은 이즈음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매우 지극하게 치르고 예순이 넘은 노령임에도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명이 이를 위문차 찾아온 것이다. 이때에 남명은 이미 글을 보내어 예에 맞도록 하기를 권했고, 일부러 또 찾아 위문한 것이다. 선생은 말하길, “중성의 덕기(德器)는 정당(政堂)의 한 자리에 앉아서 들뜨고 텅빈 풍속을 진정하기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이번 걸음에 동행한 제자 중에서 누가 말하길, “안음 삼동(三洞)의 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니 한번 구경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은, “ 이번 길은 갈천을 위문하기 위해 온 길이니 훗날 나와 함께 둘러보고 놀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선생이 일상 행사에 얼마나 처신을 곧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동강 김우옹이 와서 배우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1540-1603)이 와서 배웠다.

  동강의 자는 숙부(肅夫)이고, 동강(東岡)은 호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중종 35년(1540) 성주 사월곡(沙月谷)에서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과 청주 곽씨 사이에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문집으로 『동강집(東岡集)』이 남아있다.  15세 때 성주교수로 있던 남명의 문인 덕계 오건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24세 되던 이 해 겨울에 남명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 때 선생은 김우옹에게 말하기를, “침잠한 사람은 모름지기 강기(剛氣)로써 일을 처리해야 한다. 천지의 기운은 굳세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막론하고 모두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자네는 역량이 옅고 모자라니 모름지기 남이 하나를 하면 자기는 열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을 하여 잘하게 되면 자기는 백 번을 하여 잘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쏟아야만 거의 가능할 것이다.”라고 하여, 독실 강건한 공부를 당부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몸소 행하는 처음에는 마치 금과 옥이 티끌만 한 더러움도 입지 않는 듯이 해야 하며, 또 대장부의 행동거지는 무겁기가 산악 같아서 만 길이나 깎아선 듯 하다가 때가 오면 움직여야 바야흐로 허다한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어서 차고 있던 성성자(惺惺子) 방울을 끌러주면서, “이 물건은 맑은 소리로 사람을 깨우쳐줄 줄 안다. 차고 보면 매우 좋은 줄 알 것이다. 내 귀중한 보배로서 자네에게 주는 것이니 자네가 능히 이것을 지니겠는가?”하자, 동강이 묻기를, “이는 옛 사람들이 옥을 차는 뜻이 아니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길, “실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가 더욱 절실하니 이연평(李延平)도 일찍이 찾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뇌천(雷天)’이란 두 글자를 써 주면서 '대장(大壯)'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요컨대 항상 방울의 맑은 소리를 듣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불러 깨우치고 자신을 반성하여 매사를 경계하도록 하였고, 뇌천은 주역 대장괘의 뜻을 취한 것으로 성찰하고 극기하는 공부를 부지런히 힘쓸 것을 당부한 것이다.

  동강은 남명의 외손서가 되는데, 남명의 딸이 대대로 상산(商山) 김씨의 세장지인 단성 법물리에 살던 만호(萬戶) 김행에게 시집을 가 딸을 두었는데, 칠봉과 친분이 있던 남명이 동강의 사람됨을 알고 외손녀를 시집보냈다. 27세 때는 한양에 과거보러 갔다가 퇴계선생에게 나아가 잠시 학문을 익혔으며, 어머니께 문안드리러 함양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맏형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1522-1590)이 함양군수로 있었다. 김우홍은 군수로 있으면서 평소 교분이 두터운 인근의 선비 개암 강익 등과 남계서원의 창건에 힘을 쏟았는데, 동강은 여름에 남계서원에서 오건, 노진, 강익 등과 학문을 강독하였다. 이 무렵 「천군전(天君傳)」을 지었다. 동강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을 보고, 선생에게서 「천군전」을 짓도록 명받았다. 남명 경의 사상의 요체가 함축된 신명사도와 명을 알기쉽게 심성(心性)을 의인화해  천군으로 의탁하여, 나라를 잃은 천군의 군대가 경과 의로써 서로 힘을 모아 마침내 싸워 이긴다는 내용을 가전체 문장으로 창작하여 남명의 사상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동강은 남명과 퇴계 양문에 들었으나 두 선생의 가르침을 각각 계발하였고, 특히 남명의 경의학풍을 오롯이 수용한 수문(首門)이었다.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동강에게 묻기를, "그대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고, 또한 그대의 학문하는 것이 독실하니 마땅히 평일에 공부하는 도를 진언하라."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신은 실로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모(某:남명)의 가르친 바를 말하자면 흩어지는 마음을 모으는 것(求放心)을 근본을 삼고, 또 경(敬)을 주장함으로써 흩어진 마음을 찾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강은 평생 여러 번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번번이 소를 올려 거절하였는데, 이는 스승 남명의 엄한 출처관에 깊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번은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어 부임하자 선배들이 면신례(免新禮: 신임 벼슬아치가 전부터 있는 관원들에게 하는 신고식)를 행하려고 하자, 이는 선비들이 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강에 이르러 ‘남풍사(南風辭)’를 지어 뜻을 밝히고 돌아왔다. 이 일로 그 때까지 남아 있던 폐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강은 불의에 대한 강직한 면모를 보이는데, 이는 선생의 기절(氣節)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50세 때(1589)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남명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함경도 회령부에 유배당하였다. 삼년 뒤 임진년(1592) 5월에 적소에서 풀려나 의주 행재소로 가 승문원제조 벼슬을 제수받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1월에는 임금이 있는 의주에 도착하여 부호군의 벼슬을 제수받고 왜적을 막을 방책인 기무칠조(機務七條)를 임금에게 올렸다. 임란 중 임금을 호종하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 등 난세를 당하여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54세 때(1593) 명의 접빈사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의 문위사가 되었으며, 왕의 친서를 명의 장수 이여송에게 전하였다. 그 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 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55세 때(1594)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60세 때(1599) 병으로 사직하고 인천에서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1571년12월, 겨울에 스승 남명이 등창으로 갑자기 병이 깊어지자, 여러 달 동안 덕산에서 직접 간호하였고, 선조5년(1572) 2월8일,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선생의「언행록」과「행장」을 지었다.
 

동강 김우옹 신도비▶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산 21-1번지에 있는 이 비는 동강(東岡) 김우옹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종 3년(1723)에 세운 신도비이다.
  이 비는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미수 허목(許穆)이 썼다.
  1991년 5월 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동강에게 묻기를, "그대는 일찍이 조식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니 반드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고, 또한 그대의 학문하는 것이 독실하니 마땅히 평일에 공부하는 도를 진언하라."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 모(某:남명)의 가르친 바를 말하자면 흩어지는 마음을 모으는 것(求放心)을 근본을 삼고, 또 경(敬)을 주장함으로써 흩어진 마음을 찾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 송암 이로가 와서 배우다.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가 와서 배웠다.

공의 자는 여유(汝唯)이고, 송암(松巖)은 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의령(宜寧)에 살았다. 중종 39년(1544) 의령 부곡리(孚谷里)에서 인의공(引儀公) 효범(孝範)의 아들로 태어났다.『송암집(松巖集),『사성강목(四姓綱目),『용사일기(龍蛇日記),『문수지(文殊志)』가 남아있다. 13세 때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고, 17세 때(1560) 부친의 명으로 당시 거제에 귀향 온 조정암(趙靜菴) 문인인 유헌(游軒) 정황(丁?;1512-1560)에게서 글을 배웠다. 정황은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곤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로 다시 이배되었는데, 천품이 강직하고 효제충신을 생활의 신조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19세 때(1562) 아우 축암(畜庵)보(普), 백암(栢庵)지(旨)와 함께 수우당 최영경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이듬해 두 아우와 함께 덕산으로 남명선생을 찾아와 수업을 받았다. 선생이 한 번 보고 마음으로 허락하여 정성껏 가르쳤다.

  공은 임진왜란에 초유사(招諭使) 학봉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의병을 일으키고,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 기간에 일어난 전란의 전말을 『용사일기』에 담았다. 임진년(1592년), 49세 때 공은 서울에서, 왜구가 동래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5월 4일,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함양에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났다. 이 때부터 그를 따라 거병을 같이 하여, 10일에는 산음(山陰)에 도착하여 소모관(召募官) 직책을 맡아 삼가, 단성으로 가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하고, 삼가로부터 단성을 거쳐 진주에 도착하였다. 진주에서 초유사와 왜적을 막을 방책을 마련하고, 인근 의령 합천을 돌며 의병을 격려하는 등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관찰사 김수(金?)가 곽재우(郭再祐)를 무고하자 학봉과 상소를 올려 그를 변호하였다. 7월에 왜적이 진주에 쳐들어오자 초유사를 따라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공은 김성일의 추천으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 학봉이 좌도 관찰사로 옮겨가자, 초계에서 송별하고 다음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9월에 학봉이 우도 관찰사로 다시 오자 지리산에서 나와 산음에서 오장(吳長)과 함께 그를 맞이하였다. 10월에 창원, 부산, 김해에 주둔한 왜적이 진주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진격해 오자 공은 학봉을 따라 길목인 의령으로 가 왜적을 무찔렀다. 이 때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승진하여 진주목사가 되어 진주성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이듬해 초유사 김성일이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위독한 학봉의 곁에서 주야로 간호하였고, 그가 죽자, 시신을 염한 뒤 지리산에 가매장하여 7개월이 지난 뒤 고향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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