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호/2001년12월15일]

[남명선생평전]
       4.산천재(山天齋)에 이는 대바람 소리(2)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이 해 (1561) 7월에 운강(雲岡) 조원(趙瑗)이 와서 배웠다.  조원(趙瑗, 1544-1595)의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운강(雲岡)이며, 본관은 임천(林川)으로 금산(琴山)에서 살았다.  공은 익(翊)의 손자로, 응공(應恭)의 아들로 태어나, 뒤에 응관(應寬)에게 입양되었다. 공은 남명의 생질인 판서 이준민(李俊民)의 작은 사위인데, 임진난에 창의한 대소헌 조종도가 바로 손위 동서이다. 공에 관한 자료로는 『가림세고(嘉林世稿)』, 『독서강의(讀書講疑)』가 남아있다. 공이 선생에게 올린 제문에, "신유년(1561) 첫가을에 비로소 문하에 배알하게 되었는데, 못난 자질을 극진하게 거두어 가르침이 반복 정녕하였다.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시어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궁구하도록 했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선생을 섬겼는데, 선생께서 가사(佳士)로 허여하였다. 공은 21세 때 식년 진사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 29세 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32세 때 정언이 되었고, 이 해에 당쟁이 시작되자, 탕평의 계책을 상소하여 당파의 수뇌를 파직시킬 것 등을 주장하였다. 33세 때 이조좌랑이 되었고, 50세 때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60세에 승지에 이르렀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 자손의 교육도 매우 단정하고 엄격하게 하였다. 『남명집』에 보면, 선생께서 장원한 공을 위해 칼자루에 오언시를 지어 주었는데, 칼날보다 매서운 정신으로 정진할 것을 완곡하게 당부하고 있다.   

     宮抽太白          霜拍廣寒流            
    斗牛恢恢地          神遊刃不游
                       - 書柄贈趙壯元瑗-

    불 속에서 하얀 칼날 뽑아내노니,
     서릿발 같은 빛 차디찬 달가로 흐르네.  
     견우와 북두성 떠 있는 넓다란 하늘가에,      
     정신은 놀아도 칼날은 놀지 않는다네.

            -칼자루에 써서 장원한 조원에게 줌  -  

  겨울에 영모당(永慕堂) 기문을 지었다. 영모당은 자형 안분당(安分堂) 이공량(李公亮;1500-1565)이 자신의 아버지를 추모하여 지은 재실로 진양군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데, 선생이 지은 기문에 보면, "우리 자형은 평소 별난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고, 입으로 남의 나쁜 점을 말한 적이 없으며,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남을 사랑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며 소탈하고 얽매이지 않아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매양 동당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실패하였고, 더불어 사귀던 사람이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으나 한 번도 고관대작의 집을 기웃거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서울에 집이 있었지만 홀로 고향에서 지냈던 것은 아버지를 영원히 사모했기 때문이다. 만년에는 자취를 감추고 세상을 피하여 술에다 몸을 감추었는데, 때로는 옥산을 무너뜨릴 듯이 우레처럼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 천하의 만물을 바람이나 구름이나 초파리처럼 하찮게 보았다."라고 하여 안분당에 대한 인물을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남명의 문장 기술 방식은 매우 독특한 한 특질로 생각된다. 여느 기문의 형식과 달리 인물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들어있는데, 이는 남명의 다른 묘갈문이나 서간문 등에서도 자주 보이는 것으로서 인물에 관한 한에서 남명의 문자는 매우 간략(簡約)하면서도 강직한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기문의 형식에서 보면, 대체로 기문 소재지의 형승과 내력, 그리고 치식하는 군더더기 문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때, 남명의 문자간략(文字簡約) 정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1월에 동곡(桐谷) 이조(李晁;1530-1580)가 와서 배웠다.

  공의 자는 경승(景升)이고, 호는 동곡(桐谷)이며, 본관은 성주로 단성에 거주하였다.  산청 원당에서 부사직(副司直) 계유(繼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곡실기(桐谷實紀)』가 남아있다.  7세 때 사직공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0세 때 논어와 맹자에 통하였으며, 12세 겨울에 상서를 공부하였다. 32세(1561)되던 해 10월에 덕산에 가 선생의 문하에 들어 위학지요(爲學之要)를 듣고 경의(敬義) 두 글자로써 힘 쓸 것을 배웠다. 37세(1566) 봄과, 41세(1570)되던 가을에 남명 선생을 찾아 뵈었다. 공은 죽각 이광우,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동강 김우옹, 조계 유종지 등과 오가며 서로 강마하였다. 김우옹의 「동강일기」에 의하면, "이조와 산천재에서 공부하였더니, 성품이 순고(醇古)하고 얽매이지 않았으며 호의(好義)하였다."라고 하였다. 특히 인근에 살던 덕계와의 친분은 남달랐다. 덕계가 세상을 떠나자 공은 제문을 지어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지 여러 해 동안 형제와 같이 지내며 우애 돈독하였네."라고 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였다. 39세 때 진주훈도(晋州訓導)가 되었고 44세 되던 해 5월에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에 제수되고 6월에 호송관이 되어 왜사(倭使)를 동래(東萊)에서 호송하였다. 이 때 일본 사신이 후추 한 자루를 선물로 주려하자, 공은 받지 아니하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신하된 자가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 사신은 이를 듣고 공의 청렴함에 놀라워 말하기를 "선생의 청렴함은 한 조각 맑은 얼음과 같아 이 더운 6월에도 서늘하게 느껴집니다"라고 하였다. 47세 때 봉상주부(奉常主簿)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원당정사(元堂精舍)를 짓고, 스스로 진취(進取)의 뜻을 끊고 항상 말하기를, "사대부의 출처가 시운(時運)에 따라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고 뜰에 푸른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거늘,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동곡(桐谷)이라 하였다. 남명 선생이 돌아가신 후 47세 때(1576) 8월, 덕산에서 최영경, 하항,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로, 이광우, 이천경 등 제현과 더불어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지을 뜻을 모으고,  덕천서원을 세워 선생의 사우에 배알하였다.

  임술년(1562), 선생 62세 때,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1499-1562)의 죽음에 곡하였다.

  송계의 자는 자함(子)이며 송계는 호이다. 관향은 평산(平山)이고, 밀양에 살았다. 송계실기『(松溪實記)』가 전하며, 한훤당(寒喧堂) 연원인 신당(新堂) 정붕(鄭鵬;1467-1512)과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의 문인으로 남명과 도의로 사귀었다. 당시 사람들은 남명과 송계,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을 '삼고(三高)'라 칭하였다. 송계가 죽자 선생은 가서 곡하고 밀양 동촌 장선리 장지에 가서 손수 참례하였으며, 뒤에  송계의 아들 유안(有安)의 간청으로 묘갈문을 짓기도 하였다. 이즈음 남명과 친한 벗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처사신군묘표(處士申君墓表)의 서두에 보면, "나만 나중에 죽으려는지 벗들이 먼저 간다. 삼족당(三足堂)이 떠나더니 동주(東洲)와 황강이 그를 따르고 청송(聽松)이 또 뒤를 이었다. 천우(天祐)와 우옹(愚翁)의 장례에 내 이미 발인을 맡았고 그 비명을 지었다. 중옥(仲玉)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집안 사람들 또한 내가 친구라 하여 묘표를 구하려 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남명은 공을 평하여, "자함은 내가 두려워하는 벗이다. 백수(白首)가 되도록 변치않는 이는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계해년(1563)에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1551-1628)가 와서 배웠다. 공의 자는 임중(任重)이고, 설학은 호이며, 본관은 전의로 초계군 성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초계(草溪)에 살았다. 『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백령지(白翎志)』가 남아있다. 7세 때 외조부인 황강 이희안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9세 때(1559) 남명선생과  수우당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13세 때(1563) 승지공(承旨公)을 따라 뇌룡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뵈었다. 또 17세 때(1567) 수우당을 따라 남명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익혔으며 동강과 함께 공부하였다.

  임진년(1592), 42세 때 왜란이 일어나자 전치원과 더불어 창의하여 토적할 것을 약속하고  함께 향병을 모아 곽재우와 합세하였다. 43세 때(1593) 정월에 김면을 만나러 갔는데, 의령에 이르러 곽재우, 오운 등과 거병을 논의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전 장령 정인홍, 전 좌랑 김면(金沔)·박성(朴惺), 전 참봉 노흠(盧欽), 유학 곽재우(郭再祐)·전우(全雨)·이대기 등이 변란을 듣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나 모의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기어이 왜적의 무리들을 섬멸하기로 작정하였다 "고 하였다.

  기축옥사(1589)가 일어났을 때 수우당이 정여립 일당으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이듬해 40세 때(1590) 7월 11일에  이로, 오장, 하응도, 박제인, 하혼, 이정 등과 더불어 합천에서 최영경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62세 때(1612) 진사 하징 등과 덕천서원에 수우당을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 64세 때(1614) 2월에 오장, 강대수(姜大遂) 등과 더불어 정온(鄭蘊)이 영창대군 옥사로 갇히게 되자 , 이를 변호하기 위한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는데, 뒤에 시사(時事)를 논했다 하여 백령도로 유배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풀려나 초계로 돌아와서 초계의 수령록인 『초계선생안』과 향리의 자치법규를 정한 「향규」를 만들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후 고을 사림은 연곡서원(淵谷書院)과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모셔 향사 하였다.

  이와 같이 공은 남명선생의 경의(敬義)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임란에는 창의하여 거병하였고, 수우당과 동계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신원소를 올림으로써 굴하지 않는 의리정신을 보였다.  그리고 선사(先師)의 추존사업에도 힘을 모아, 26세 때(1576) 덕천으로 가서 서원 창건을 논의하였는데, 이는 수우당이 " 여기는 남명 선생이 만년에 공부한 곳이므로 서원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도내의 선비들과 산천재에서 서원 창건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마련한 것이다. 또 공은 77세 때(1627) 10월에 부사 성여신 등 제현들과 함께 청계서원에서 원록(院錄)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2월에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이 찾아왔다.

 공의 자는 강이(剛而)이고 구암은 호이다. 동성인(東城人)인데 사천(泗川)에서 살았다. 규암 송인수와 퇴계의 문인으로 『구암집』이 남아있다. 당시 남명이 살던 덕산 산천재와 이웃하여 집을 짓고서 살기를 언약하고 며칠을 머물면서 서로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공이 남명에게 말하기를, "참다운 즐거움이 여기 있으니 뜬 영화는 이제 버려야겠습니다. 싸움 끝에 이겨내고 나니 여위었던 사람이 살이 찔듯 합니다. 이제부터 모시고 만년을 마치면 족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지어둔 이 곳의 집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이 일은 아마도 선생이 68세 되던 해(1568) 진사 하종악의 후처 정씨에게 음란하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문인들이 그 여자의 집을 헐어버린 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남명은 정인홍에게 하종악 후처의 음란한 행실을 소상하게 얘기하였고, 구암은 자기와 관계가 있는 집안의 좋지않은 얘기를 덮어두려 해서 마침내 그와 절교를 한 사건으로서, 이 일은 뒤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며 정파적 소용돌이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