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호/2001년12월15일]

[시론]
           '욕망'에 얽힌 역설(逆說)들

이  상  익
영산대학교 교수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지론이다. 문제는 "행복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철인(哲人)들은 한결같이 행복이란 '물질적 욕망을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라고 가르쳤다. 유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불교의 '열반(涅槃)'이 그것이고, 고대 희랍철학의 '아타락시아(ataraxia)'가 그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을 '물질적 욕망을 채웠을 때의 만족감'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물질적 쾌락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 근대의 공리주의(功利主義) 윤리설에 의해 대중화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통념은 우리 삶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역설(逆說)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빈(貧)과 부(富)의 역설이다. 물질적 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통념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을 혐오하고 부를 추구하도록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부는 방종과 타락을 낳고, 결국에는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 속담에 "부자는 3대를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왜 대부분의 부자는 3대를 가지 못하는가? 그 답 역시 우리 속담에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것이 그 해답이다.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자들은 삶에 대한 긴장(緊張)이 없다. 한바탕 신나게 돈 많이 드는 쾌락을 살 수도 있으며, 배짱에 맞지 않는 직장은 차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재산은 탕진되고, 교만함만 늘게 된다. 그는 결국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곤경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은 나약한 사람들을 좌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우리를 강인하고 슬기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빈곤 속에서 천대받으며 관대한 덕을 기르기도 하고, 곤경을 참아내느라 인내심을 기르기도 하며, 역경을 헤쳐 나가느라 지혜를 터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속담에서는 또한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고생을 통해 덕과 지혜를 기르면 마침내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얻어진 부귀도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자수성가에 도취하는 사람은 당대에 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이미 덕과 지혜를 닦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부분 그 다음 세대에 있다. 부귀한 집안의 아들 손자는 고생을 모르고 자랐고, 따라서 쉽게 방탕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집안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다. 만약 어떤 집안이 대대로 부귀를 누린다면 그 집안은 정말로 존경할 만한 집안인 것이다. 그것은 그 집안이 부귀하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건실하게 살아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옛 성현들은 부귀를 탐내지도 말 것이요, 가난을 싫어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공자(孔子)는 "부귀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바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고, 빈천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지만 바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도 버리지 않는다"(論語 里仁)고 하였다. 부귀는 정당한 것만 누려야 하지만, 빈천은 억울한 사연에 의한 것이라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씀일 것이다. 맹자(孟子)도 "사람들 가운데 덕혜술지(德慧術知)를 지닌 사람은 항상 재난을 이겨내는 데서 나온다. 임금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하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어려운 서얼은 항상 긴장하여 조심하고 깊이 우환에 대비하기 때문에, 마침내 통달하게 된다"(孟子 盡心上)고 하였다. 역시 고난이 우리를 지혜롭고 강인하게 만들어 준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둘째는 비움과 채움의 역설이다. 욕망은 가득 채우면 채울수록 우리의 참 자유를 구속하고, 남김없이 비우면 비울수록 우리의 참 자유를 실현해 준다. 우선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그릇에 금(金) 가루를 소복하게 담았다고 치자. 우리는 그 그릇을 들고서는 꼼짝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금가루를 흘리는 것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가루를 반쯤 덜어내면 우리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릇을 들고 산천을 유람할 수도 있을 것이요, 달리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릇을 들고 물구나무를 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금가루를 완전히 비우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있게 된다. 더 이상 쏟아질 금가루가 없기 때문이다.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나의 욕망만 가득 채운다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원망하고 시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적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 담을 높이 쌓고 집 안에 숨어 있게 되며, 밖에 나갈 때에는 경호원을 대동하게 된다. 그에게 무슨 참 자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욕망을 반쯤 비운다면 그만큼 운신의 폭이 넓어지게 되며, 욕망을 완전히 비운다면 그때는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욕망을 비운 사람은 적이 없을 것이요, 겸허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며, 또한 오히려 비운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에 해당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 성현들은 우리에게 욕망을 비우라고 가르쳤다.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그것이요, 주역의 겸괘(謙卦) 함괘(咸卦) 익괘(益卦) 손괘(損卦) 등이 그것이다. 욕망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면 거꾸로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고, 욕망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내세우면 거꾸로 자신이 재앙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태는 옛 성현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지나친 욕망의 추구로 인한 각종 범죄와 패륜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섰다. 이러한 세태를 바로잡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임무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육은 세계화와 정보화만 외치고 인생의 참된 지혜를 등한히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넘쳐나도 세상은 더욱 혼탁해지기만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짜증을 낼 뿐이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무슨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육신은 너무 살쪄서 비만병(肥滿病)에 시달리고, 정신은 너무 빈곤하여 허무(虛無)에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바로 우리가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초래한 '역설적인'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현대적 삶의 태도를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공자는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으며, 주역에서는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 밖을 바르게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남명선생의 '경의협지(敬義夾持)'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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