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호/2001년12월15일]

[서평]
         南冥學派 政治哲學 硏究
          (薛錫圭 著, 남명학연구원, 2001)

차  장  섭
三陟産業大敎授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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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冥 曺植은 花潭 徐敬德, 退溪 李滉, 栗谷 李珥와 함께 조선중기 士林의 學風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古今의 유교경전의 폭넓은 섭렵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여타 학파와 차별화되는 독자적 학풍을 수립했다. 그의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는 小人이 척결되고 君子가 지배하는 도덕적 이상사회의 건설이었다. 그는 이것을 성리학의 이념적 목표로 간주하여 "程子.朱子 이후 著書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며 이론적 천착보다는 실천철학의 확립에 매진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독점적 권력을 배경으로 정치.사회.경제적 혼란과 파탄을 초래하고 있던 勳舊.戚臣세력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敬.義를 학문적 요체로 삼아 항상 방울〔惺惺子〕과 칼〔敬義劍〕을 차고 내면적 修身에 힘쓰면서도, 모순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일생을 處士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南冥은 비록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그의 학풍을 계승한 南冥學派의 政治哲學으로 승화되었다. 그들이 明宗 末 勳戚政權을 무너뜨리고 士林政治를 확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宣祖 初 훈척정치의 잔재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여타 學派와 시각차를 드러내면서 분열하여 朋黨體制를 구축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壬辰倭亂 당시 倭賊과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가운데 활발한 義兵활동을 전개하며 국난극복의 선봉에 서게 되는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명분이 정치적으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그들이 光海君代 정국을 주도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이 宣祖 末 柳永慶 일파의 세자교체 획책에 반대하고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것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했다. 곧 광해군의 즉위명분은 南冥學派가 주축이 된 大北政權의 집권명분이기도 했던 셈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비판적 세력은 광해군의 王統을 부정하는 세력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광해군대 정국이 討逆論의 파란에 휘말리게 되는 것도 그러한 상황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南冥의 학문경향과 현실대응 자세를 비롯해 남명학파의 정치철학과 동향에 대한 검토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南冥學과 學派에 관한 연구는 그 동안 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80년대 들어와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어 적지 않은 성과가 빠른 속도로 축적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성과가 철학.문학.교육학적 관심에서 접근한 것으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한 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같은 현상은 歷史學界의 관심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廢母殺弟를 내세운 仁祖反正의 명분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가운데 善.惡의 이분법적 평가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연구 자체를 기피하는 풍조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反正 이후 栗谷學派의 西人세력에 의한 정치보복은 是.非의 분별에 투철한데다 不義를 용납하지 않았던 남명학파가 그들이 던진 부메랑에 자신들이 맞은 격이지만, 그것이 현재에 와서도 기피의 대상이 되어 연구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은 학파적 이해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역사학계의 소극적 자세와 봉건적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 시대 역사의 주축 가운데 하나였고 심지어 정국주도의 위치에 있기도 했던 명확한 실체를 의도적으로 도외시한 채 파악한 역사적 동향이 어느 정도 본질에 접근하고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면 그러한 자세와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최근 薛錫圭가 저술하고 南冥學硏究院에서 출간한 南冥學派 政治哲學 硏究는 역사적 시각에서 남명학과 학파의 정치적 성격 및 동향파악을 통해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있다시피 한 16.17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밝히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설석규는 조선시대 정치사 전공자로 원래 그의 관심은 朋黨政治 구조에서 成均館 및 鄕村 在野儒生의 정치적 역할을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 붕당정치가 在朝 및 在野士林의 公論을 포괄하여 전개된 公論政治 구조로 전개되었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2,208건의 儒生上疏를 정치적 동향과 연관하여 분석한 [16-18세기의 儒疏와 公論政治]로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남명학파가 정국을 주도하던 광해군대 유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가(연평균 30.3건) 율곡학파가 집권한 인조대 급격하게 감소하는(연평균 4건) 대조적 현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정치적 파탄과 안정이라는 관점보다는 공론형성의 보장과 통제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한편, 이는 궁극적으로 학파의 정치운영 방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먼저 남명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를 비롯해 남명학파의 정치철학을 검토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이 著書는 그 자체 완결된 것이 아니라 學派를 매개로 전개되고 있던 조선후기 정치의 본질을 본격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초석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접근자세는 특정 학파의 독보적 위상확립에 치중해온 연구경향을 지양하고 학파간 역학관계 속에서 독자적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객관적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南冥學派 政治哲學 硏究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서술되어 있고, 거기에 補論 한 편이 추가되어 있다. 먼저 제1편 '16세기 政局과 南冥의 出處義理'는 중종대 이후 勳戚政治의 양상과 남명의 현실대응 자세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著者는 南冥을 비롯한 花潭.退溪.栗谷 등 사림의 宗匠의 등장을 시대적 산물로 파악한다. 곧 훈척세력에 의한 정치적 파탄과 사회.경제적 피폐상황이 당시 지식인인 士林의 현실대응 자세확립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안겨주었고, 그들이 바로 성리학적 세계관의 독자적 해석을 통해 각각의 현실인식 체계와 出處觀을 수립하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리학적 理氣心性論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도 그러한 상황에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저자는 主理論.主氣論 또는 一元論.二元論으로 구분해온 종래의 이기심성론 분석의 틀 대신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이 현실대응의 다양성 방향을 파악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理.氣의 작용성과 함께 그것들의 가치구분을 통한 대립적 관계를 보장한 남명의 철학을 理氣分對論으로, 理.氣의 작용성과 가치구분을 용인하되 상호 따르고 올라탄 관계로 파악한 퇴계의 그것을 理氣隨乘論으로, 氣의 존재와 작용성만을 인정한 화담의 철학을 一氣長存論으로, 氣의 작용성만 용인하되 理.氣를 불가분의 관계로 해석한 율곡의 그것을 理氣妙合論으로 규정한 것 등이 그것이다. 모순된 현실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탄력적 出處觀을 제시한 퇴계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화담,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개혁방향을 모색한 율곡과는 달리 모순된 현실과의 타협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며 확고한 出處義理를 확립한 남명의 현실대응 자세의 철학적 근거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 제2편 '士林政治와 南冥學派의 政治哲學'에서는 선조대 확립된 사림의 정국주도 상황에서 남명학파가 제시한 정국운영 방향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선조대 초반 사림세력의 대립은 각 학파의 세계관을 근거로 한 훈척정치의 잔재청산에 대해 강.온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한데 따른 것으로, 그것이 사림의 분열을 초래하여 朋黨政治 발생의 주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 붕당정치는 君子의 정치집단화를 용인한 歐陽脩의 [朋黨論]과 朱子의 [引君爲黨說], 곧 성리학적 朋黨論에 이념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붕당결성에 대해 당시 사림이 대부분 공감하는 바였지만, 저자는 남명학파가 여기에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來庵 鄭仁弘은 훈척의 잔존세력뿐만 아니라 그들에 동정적인 사림조차 小人으로 규정해 척결함으로써 도덕성을 갖춘 君子가 지배하는 정치.사회 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에는 남명의 分對論的 세계관에 입각한 君子小人論이 논리적 근거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是非의 분별보다는 사림의 화합을 우선하는 율곡의 妙合論的 保合論뿐만 아니라, 是非는 분별하되 君子의 상호 발탁을 주장하는 西厓 柳成龍의 隨乘論的 調劑蕩平論과 시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명학파.율곡학파.퇴계학파가 각각 北人.西人.南人으로 分岐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東岡 金宇이 시비분별을 통해 是는 부양하고 非는 억제하는 소위 揚是抑非論을 제시하는 등 래암의 군자소인론이 갖는 극단성을 완화하려는 시도가 남명학파 일각에서 나타났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내부적으로도 붕당론에 일정한 시각차가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제3편 '南冥學派의 公論形成과 文廟從祀 運動'에서는 선조.광해군대 남명학파의 公論形成을 통한 정치적 동향과 함께 광해군대 남명을 成均館과 鄕校의 文廟에 配享하기 위한 남명학파의 종사운동 전개양상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저자는 정치세력간 역학관계가 朝.野 사림의 공론대결을 토대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남명학파가 상대적으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도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결집된 공론적 기반을 배경으로 한 적극적 공론형성이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들의 남명의 문묘종사를 위한 공론형성도 종사가 사림의 공론에 의해 결정되는 관행에 따른 것이지만, 여기에는 鄕校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공론기반을 확대함과 동시에 그들의 집권명분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광해군대 대북정권의 정치적 명분은 남명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근거로 획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배타적이고 경색된 정국운영과 공론형성은 여타 정치세력의 반발을 초래하여, 남명의 문묘종사를 위한 사림의 합일된 공론을 도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론대결에서도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이 討逆論을 앞세워 공론조작의 방법을 동원해 파행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게 되는 사정도 정국주도에 상응하는 폭넓은 공론기반을 확보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 補論 '16세기 處士型 士林의 哲學과 出處觀'은 南冥과 비슷한 시기 處士로 일생을 살다시피 한 花潭과 格菴 南師古의 세계관.출처관의 분석을 통해 남명의 그것과를 비교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저자는 그들이 남명과 같이 처사적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세계관에 비추어 본질은 다른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곧 남명이 理氣分對論을 토대로 확고한 가치분별의 자세를 확립한 가운데 丹城縣監 발탁을 거절하는 등 모순된 현실과의 타협을 일체 거부한 것과는 달리, 화담은 一氣長存論에 근거하여 모순된 현실은 극복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현실에서 벗어나 安貧樂道의 도피적 삶에 치중했고, 格菴은 理氣妙合論을 기반으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이 그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처사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담학의 경우 현실에 대처하는 자세를 규정하는 규범성이 확보되지 않음에 따라 학파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독자적 정치세력을 확립하지 못한 채 許燁이 東人으로, 朴淳이 西人으로 각각 坐定하는 등 행보를 달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南冥學派 政治哲學 硏究는 일단 朋黨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온존하고 있는 데다 광해군대 정치의 책임문제로 연구대상에서 기피되고 있던 부분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방향을 정확하게 설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선조.광해군대 남명학파 정치적 활동의 긍정적 면과 함께 부정적 측면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功.過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 부각되는 점이라고 하겠다. 여기에다 학파의 철학체계가 성리학의 학문적 사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대응 자세 내지는 정치운영 방향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학파간 정치적 입장의 비교를 통해 남명학의 독자적 위상을 확인한 것도 하나의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정치를 사실에 근거한 현상적 검토에 머물지 않고 본질적 요소의 검토를 통해 붕당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南冥學派 政治哲學 硏究는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남명학파를 비롯한 제반 학파의 정치철학을 理氣心性論의 범주에서 도식화하는 작업이 학계에서 이루어진 예가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논리적 보편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검증작업이 더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남명의 독자적 이기심성론도 [學記]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인용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데다 독자적 사유체계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남명학의 분화양상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 미약하다는 점이다. 실제 남명학파의 주도세력의 정치적 행위에 불만을 가진 鄭逑나 文景虎와 같은 사람들이 독자적 행보를 하거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한 예가 있듯이 남명학파 내부 현실대응 자세의 차별적 경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은 것은 남명학의 홍보적 성격과는 거리가 있는 이 저서가 南冥學硏究院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출간된 점이 특히 주목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학문적 비판조차 쉽사리 용인되지 않는 家門史學의 학문풍토가 온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비추어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올해가 남명 탄신 5백주년으로 현창사업에만 집중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그와 무관한 이 저서를 출간한 것은, 이를 계기로 남명학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하려는 연구원의 참신하고도 강력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남명학연구원의 그러한 전향적 자세가 앞으로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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