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호/2001년 8월 1일]

남명문학 현장답사기(23)-산해정(1)
         깊은 산 높은 바다, 고뇌하는 남명

정우락
영산대 교수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위대한 고뇌만큼 우리를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 K. 부세

  우리는 흔히 남명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서 이해한다.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보이며 수학에 전념했던 시기를 수학기(修學期)라 한다면, 현실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한 시기를 모색기(摸索期)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색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확고히 한 시기가 정립기(定立期)라면, 여러 제자들을 통해 학문을 축적하여 후세를 기약한 시기가 온축기(蘊蓄期)이다. 수학기의 남명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거나 하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되고, 모색기의 남명은 김해에서 산해정(山海亭)을 지어놓고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한다. 정립기에는 삼가에 뇌룡사(雷龍舍)와 계부당(鷄伏堂)을 지어놓고 퇴처를 통한 현실비판이라는 역설적 세계를 구축하고, 온축기에는 덕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놓고 '경의(敬義)정신'에 입각한 실천유학을 제자들에게 전수한다.

  수학기의 남명은 아버지와 밀착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함경도 단천 등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에서 고향 삼가로 다시 내려와 선영에 장사지내고 있는데서 사정의 이러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모색기의 남명은 어머니와 밀착된 삶을 산다. 어머니를 모시고 처향(妻鄕)인 김해의 탄동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해에서 다시 고향 삼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이 세상을 뜬 정립기에는 자신의 세계에 충실한다. 자연 속에 있지만 결코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구차하게 따르지 않고 구차하게 가만히 있지도 않으면서 우뚝히 자아를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온축기 남명의 삶은 제자와 밀착되어 있었다. 모색기부터 키워온 수많은 제자들에게 부조리한 시대에서의 바른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엄숙한 어조로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남명의 산해정에 오르려한다. 이곳은 남명이 세상을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모색했던 곳이다. 그가 30세 되던 해 이곳으로 왔던 결정적인 이유는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정인홍이 쓴《행장》에 의하면 '삼가에는 선대의 전답이 매우 적었는데,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집안 사람들이 변변찮은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라고 한 증언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28세에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마치고 주위 산사에서 독서를 하면서 굶주리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와 합의하여 아내의 고향인 김해에 가서 살기로 결심한다. 당시의 자녀균분 상속제도에 의해 김해에는 아내의 재산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해는 지역적으로 바다와 가까워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남명이 아내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산해정이라는 정자를 짓게 된다. 그 위치나 이름, 그리고 거기서의 삶에 대하여 남명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신산서원으로 복원되기 전의 산해정

    (가)
    十里降王界        長江流恨深
    雲浮黃馬島        山導翠鷄林

      왕이 탄강한 곳과는 십 리 거리,
      긴 강물은 흘러 한이 깊구나.
      구름은 누렇게 대마도에 떠 있고,
      산은 푸르게 계림으로 뻗어 있네.

      (나)
    君能還冀北         山吾南
    名亭曰山海         海鶴來庭

      그대는 북쪽으로 돌아가는데,    
      산 자고새인 나는 남쪽에 산다네.
      정자를 산해라고 이름했더니  
      바다의 학이 뜰로 찾아든다네.

  작품 (가)는 산해정에서 우연히 읊조린《산해정우음(山海亭偶吟)》이고, 작품 (나)는 판서 정유길(鄭惟吉, 1515-1588)에게 준 《증정판서유길(贈鄭判書惟吉)》이다. 앞의 작품에서 남명은 서쪽으로 10리의 거리에는 수로왕이 태어난 구지봉이, 남쪽 바다 건너로는 구름이 누렇게 떠있는 대마도가, 그리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고도 계림이 있다고 했다. 구지봉과 대마도, 그리고 계림은 남명이 김해의 산해정에서 즐겨 떠올리던 지역이었다. 김해 시절 사마소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하여 지은 《사마소연(司馬所宴)》에서 '수로왕이 탄강한 구지봉은 성 북쪽에 옛 모습 그대로요(首露龜峯城北古), 서불(徐市)이 간 대마도는 해 남쪽으로 맑구나(徐生馬海日南淸)라 한 것이나, 신라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鮑石亭)을 노래하며 '단풍 든 계림 벌써 가지가 변했으니(楓葉鷄林已改柯), 견훤이 신라를 멸망시킨 것은 아니라네(甄萱不是滅新羅)'라 한 것은 그 좋은 사례가 된다.

  산해정에서 가야, 신라, 왜(倭) 등과 관련한 강렬한 역사의식을 가진 남명, 그러나 그는 한 마리 산자고새일 따름이었다. 뒤의 작품에서 제시한 '산 자고새인 나는 남쪽에 산다네'라 한 것이 그것이다. 남명은 정자의 명칭을 '산해'로 하였더니 바다의 학이 뜰로 찾아든다고 했다. 산에 사는 자고새와 바다에 사는 학이 서로 조화로울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터이다. 여기서 우리는 2구의 산자고(山)에서의 '산'과 4구의 '해학(海鶴)'에서의 '해'를 3구의 '산해'와 만나게 하는 남명 시작법의 묘미 역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산'과 관련되어 있는 '자고', '해'와 관련되어 있는 '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모두 역사적 현실 너머에 있는 초월적 사고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남명의 역사의식과 그것에 대한 초월의식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강렬한 역사의식 반대편에서 떠오르는 초연한 산해의 의지, 이 엄청난 역설적(逆說的)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남명이 처음으로 정자의 이름을 산해정으로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높은 산에 올라가 넓은 바다를 본다는 의미와 함께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남명'이라는 호를 여기서 비로소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장적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거대한 정신세계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에만 치우치면 학문이 성글고 만다. 그리하여 남명은 자신의 방이름을 '계명(繼明)'이라 하면서 사고를 더욱 치밀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계명'은 고인의 도를 계승하여 오늘날 다시 밝힌다는 의미이다. 계명실을 들어서면 유가경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책들이 쌓여있고, 벽에는 좌우명도 붙어있다. '용신용근(庸信庸謹) 한사존성(閑邪存誠) 악립연충(岳立淵沖) 엽엽춘영(燁燁春榮)', 즉 '항상 신실하고 항상 삼가서 간사함을 막고 성실함을 보존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숙이 잠기면 환하게 빛나 봄처럼 영화로우리라'라는 의미였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정에서 가졌던 남명의 포부를 구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즉 자신을 '성실'하게 하는 고인의 도를 계승하면서도 '산해'같은 거대한 세계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포부가 있었으니, 과거를 통해 세상에 나아가 민생을 구제하고 싶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남명은 33세와 36세 되던 해 향시에 나아가 각각 1등과 3등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관리가 되어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현실에 참여하여 포부를 펴고 싶었던 것이다. 남명은 뒷날 황강 이희안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회고한 적이 있다.  '산해정에서 꾼 꿈이 몇 번이던가(山海亭中夢幾回), 황강(黃江)노인 뺨에 흰 눈이 가득한 모습을(黃江老雪盈)'이라고 노래한 것이 그것이다. 결국 남명은 산해정에서 황강 등과 과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34세에는 회시(會試)에 나아갔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37세에는 아예 회시에 나가는 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궂은비 쓸쓸히 내리는 어느 날, 남명은 산해정에서 이를 괴로워하면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긴다.신산서원

    山居長在晦冥間    見日無期見地難
    上帝還應成戍會    未曾開了半邊顔

      산 속의 거처 늘 어둑어둑한 데 있기에,  
      해를 볼 기약 없고 땅을 보기도 어려워라.
      하느님은 도리어 경비를 단단히 하여,  
      얼굴 반쪽도 일찍이 열어 보인 적 없다네.

  《산해정고우(山海亭苦雨)》의 전문이다. 과거를 통해 현실로 나아가고자 했던 산해정에 비가 내렸다. 이 때문에 거처는 어둑어둑하고 해 보일 기미는 없었다. 여기서 남명은 우주만물의 주재자인 '상제'에게 은근한 불만을 갖는다. 경비를 너무 단단히 하여 자신에게 해를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얼핏보아도 그의 괴로운 심정을 궂은 비에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는 군주를 뜻하고, 이 해를 볼 수 없다고 하였으니 과거 실패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상제에게 불만을 토로함으로써 그의 불운을 아울러 한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남명의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된다. 마치 공자가 공산불뉴(公山不)의 반란에 가담하려고 했던 어리석음처럼 말이다. 급기야 남명은 세상의 도리가 날마다 흐려지고, 배운 것이 시속(時俗)과 어긋난다는 것을 절감하고 과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길을 포기한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아뢰어 헛된 희망을 버리게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남명이 회시를 포기한 37세 되던 해였다.

  남명의 출사포기는 대단히 강고한 것이었다.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 이언적과 이림의 천거로 헌릉참봉을 제수받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43세 되던 해에도 이언적이 경상도의 안찰사가 되어 남명 보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 이에 남명은 '저는 상공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에 돌아 올 날도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 야인들이 쓰는 각건(角巾)을 쓰고 안강리(安康里)의 집으로 찾아가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거절한다. 이처럼 남명 스스로가 정치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였으니 다른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산해'와 '계명'의 본뜻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기상을 갖고 역사현실에 민감하면서도 고인의 도를 제대로 계승하여 밝히는 일이었다. 학문활동으로 이것은 구체화되었다. 산해정에서의 학문활동은 이미 사귀어 왔던 친구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일, 제자들을 맞아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그가 회시를 포기하기 전부터 만나오던 터였다. 산해정을 짓자 대곡 성운이 서울에서 찾아 왔는데, 이때 밀양의 송계 신계성, 단성의 청향당 이원, 초계의 황강 이희안 및 여러 선비 등도 함께 모여서 여러 날을 강독하고 토론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덕성(德星)이 모였다고 칭송하였다 한다. 나아가 남명 역시 곽순과 함께 청도로 가서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 등을 만나 여러날 함께 강론을 벌인다. 이들은 모두 남명이 하는 일에 동조하고 학문활동을 통해 고인의 도를 밝히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산해정에 대나무를 심으면서 지은 《종죽산해정(種竹山海亭)》은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此君孤不孤,     髥則爲隣.
    莫待風霜看,     這見眞.

      대는 외로운 듯하지만 외롭지 않아,
      소나무가 이웃해 주기 때문이라네.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기다리지 않아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을 본다네.         

  여기서 남명은 대나무의 물성을 통해 수양원리를 통찰하며 거기에 자기투사를 하고 있다. 1구에서 대나무는 외로운 듯하지만 외롭지 않다고 했다. '외롭다'고 한 것은 절조를 지키는 데 있어서의 외로움이며, '외롭지 않다'는 것은 2구에서 보듯이 소나무가 같이 벗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험난한 시대에서 자신을 지켜가는 것은 외로운 투쟁인 듯하나, 함께 자신을 지켜가는 벗들이 있다는 것을 대나무와 소나무의 관계를 들어 말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절조는 바람과 서리라는 외부적 시련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그 참됨이 생래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찬 바람이 불거나 혹독한 서리가 내린 후에 비로소 송백(松栢)이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부정하면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지닌 물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남명은 여기서 자연히 뜻을 같이 하는 벗들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을 맞아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일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이 시기 남명은 처음으로 제자를 맞이한다. 남명이 37세 때 와서 배운 서암(棲庵) 정지린(鄭之麟)이 바로 그이다. 그는 남명보다 19세 연하로 남명이 세상을 달리하자 심상 3년을 입었고, 스승의 기일(忌日)이 되면 반드시 재계하고 소복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41세에는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44세에는 도구(陶丘) 이제신(李濟臣), 45세에는 입재(立齋) 노흠(盧欽)과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등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특히 노흠에게 경의(敬義)를 깊이 터득하게 되면 도를 들을 수 있다고 평소에 가르쳤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그의 학문을 독려하였다.

        생각건대, 그대는 나이가 젊고 힘이 굳세니, 학문이 벌써 10층의 경지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대와 한나절 동안이나마 학문에 관한 토론을 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그대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보지 못했습니까? 한 치(寸)를 놓게 되면 10장(丈)이나 떠내려가게 됩니다.

  남명 스스로가 힘써 학문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제자에게 이처럼 독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나라 말기의 학자 좌종당(左宗棠)의 언급, 즉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떠내려가게 된다(學問, 如逆水行舟, 不進則退)'는 것을 남명의 언어를 통해 훨씬 앞서 듣게 된다. 산해정에서 남명이 가장 열심히 읽은 책은 심경과 대학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독후감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경이 심경을 선물하자 마음이 죽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다면서 '이 글은 오직 마음을 죽지 않게 하는 약이다.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으면 안자(顔子)를 바라는 것도 여기에 있다.'고 했고, 송인수가 대학을 선물하자 '자신을 잘 반성하게 하는 도구가 온통 이 글에 있다. 나의 벗이 이것으로써 힘쓰게 했으니 단순한 책으로써만 보지 말아야겠다."고 하였다. 사실 남명은 대학을 단순한 책으로 보지 않았다. 훗날 산천재에서 산해정으로 다시 와 이를 회고하면서 지었을 법한 다음 작품에 이같은 사실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一生憂樂兩煩寃     賴有前賢爲竪幡
    慙却著書無學術     强作襟抱寓長言

      한평생 근심과 즐거움 둘 다 귀찮은데,
      선현들 있은 덕분에 깃발을 세워 두었네.
      저술하고자 해도 학술 없는 게 부끄러워,
      억지로 회포를 긴 말에 부치노라.

  이 작품은 산해정에서 대학 팔조가(八條歌)를 짓고 그 뒤에 쓴, 《재산해정서대학팔조가후(在山海亭書大學八條歌後)》이다. 남명은 만년에 덕산의 산천재에서 생활하면서도 가끔 조씨 부인이 있는 김해로 오게 되는데, 위의 작품도 1566년 가을에 지은 것이니 이같은 상황에서 지은 것이라 하겠다. 당시 정인홍이 와서 반달 동안을 모셨는데, 정인홍이 돌아가려하자 남명은 [격치성정가(格致誠正歌)]를 손수 써 주고 그 뒤에 다시 위와 같은 시를 적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남명은 현실과 관련된 '근심' 및 '즐거움'보다도 선현, 즉 고인들을 통해 자신의 푯대를 세울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근심과 즐거움이 어쩌면 과거에 있어서의 승패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명은 이를 포기하고 산해의 기상으로 고인의 도를 계승해 밝혔으니 이같이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산해정은 이처럼 남명의 생애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남명은 이 산해정에서 30세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45세까지 살게 된다. 이 때 남명은 자신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뇌하였다. 그 하나의 길은 관리가 되어 민생을 보살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인들의 도를 계승해 밝히는 일이었다. 전자를 위하여 남명은 과거를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본분이 아님을 깨닫고 어머니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설명한 후 37세 되던 해에 과거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근간을 둔 수양공부를 치밀하게 해나가면서 친구 혹은 제자들과의 학문활동을 전개한다. 이는 남명이 일생을 들어 추구했던 집요한 사명의식에 근거한 것이면서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명확히 하는 길이었다.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