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호/2001년 8월 1일]

[특별기고]
       代를 이은 忠節  - 鄭大壽·以諶 父子 -

설석규(薛錫圭)
문학박사,경북대강사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역사적 사건에는 으레 영웅·충신 등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명성의 이면에는 많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땀과 희생이 배어있는 법이다. 마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긴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듯이…‥.

   조선왕조는 전후 2차례에 걸쳐 결정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예외 없이 다수의 전쟁영웅과 충신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확고한 국가의식에 입각해 왜적(倭賊)에 대항해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알려지지 않은 영웅과, 분명한 대의명분을 토대로 호적(胡賊)과의 타협을 배제한 채 일생을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살다간 이름 없는 충신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왕조가 세계 근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518년이라는 장구한 수명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드러나지 않은 정신과 활약이 저변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명학파를 주축으로 한 경상우도 사림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일찍이 남명은 선.악을 분별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분명한 도덕적 가치가 지배할 때 국가의 건전한 발전과 국난극복을 보장하는 총체적 방안이 마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내면적 수신을 통한 군자로서의 인품함양을 위한 경(敬)과 확고한 분별의 실천적 자세를 위한 의(義)를 학문의 핵심으로 설정하여 스스로 여기에 매진함과 동시에 제자들에게 재삼 이를 강조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명학파가 부정.비리를 일삼던 척신정권을 무너뜨리면서 사림정치 확립을 위한 개혁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한편, 임진왜란 당시 가장 조직적이고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경상우도 사림들 사이에는 소인 내지는 불의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확고한 가치구분의 기질적 경향이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대수(鄭大壽)·이심(以諶) 부자의 대를 이은 충절도 그것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정대수는 진양인으로 자는 영로(榮老)며 호는 오봉(鰲峰)이다. 그는 중종 39년(1544) 부호군 홍규(弘糾)와 경주 이씨 현감 경주(擎柱)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행실에 절도가 있었고 남달리 두드러진 지기(志氣)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뜻을 세워 드러내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어찌 재능을 숨겨야만 하겠는가"며 강한 경세의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활약으로 전투마다 승리함에 따라 왜적들은 더 이상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곤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는 고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는 장자 이함(以)으로 하여금 선봉이 되어 먼저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함은 적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불의에 아들을 잃은 그는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적의 숫자가 늘어나는 등 전세가 불리해지는 데다 그마저 잃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광악의 강권에 못이겨 물러서야만 했다. 그리고는 적이 인질로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광악과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그는 청송으로 옮겼다. 전쟁이 끝나고 곤양으로 되돌아 온 그는 선영이 있는 금오산 자락에 집을 짓고서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내다 인조 원년(1623)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정이심은 선조 23년(1590) 정대수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신화(愼和)며 호는 모헌(慕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랐고 친구들과 놀 때에도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그는 이광학에게서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함양하는 요체를 터득했으나, 장성해서는 남명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그의 학문을 정전(正傳)으로 삼아 일생동안 남긴 글들을 강구하며 그 정신을 잇고자 노력했다. 그가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던 정온(鄭蘊; 桐溪), 허목(許穆; 眉), 하홍도(河弘度; 謙齋), 박인(朴絪; 无悶堂) 등과 긴밀하게 교유하는 한편, 매월 초하루 덕천서원에서 강회(講會)를 주선하고 문인록인 청금록(靑衿錄) 추술을 주도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평소 과거(科擧)를 속된 사람이나 바라는 것으로 낮게 평가하던 그는 젊은 시절 부모의 권유로 한 때 향시에 응시하기도 했으나, 돌아가신 뒤로는 이를 포기하고 선영 근처 산밑에 집을 짓고서는 학문에만 매진했다. 특히 그는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군자로서의 심성함양에 있음을 직시하고 벽 위에 '구심양성(求心養性)'의 네 글자를 써두고는 학문의 실천화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현의 정신을 계승하여 배울 수 있는 길은 서원 만한 것이 없다며 대각서원(大覺書院)의 건립을 주도하는 등 남명학의 계승과 함께 후진양성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아가 그는 회재(晦齋; 李彦迪)가 제향된 옥산서원(玉山書院)과 퇴계(退溪; 李滉)의 위패가 봉안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순회하며 도학(道學)의 범주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오랑캐인 후금(後金; 淸)과 굴욕적인 군신관계를 맺게 되자 모든 활동을 포기하고 두문불출하며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단지 그는 정온과 편지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울분을 토로하며 군자국의 조선이 소인국의 청에 굴복해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달래곤 했다. 나아가 인조 22년(1644) 청이 조선에 명의 숭정(崇禎)의 연호 대신 순치(順治)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강요하자, 그는 다음의 시를 지어 거기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今年非復 大明年     不幸身無 死昔年  
    年老眼昏 還一幸     忍將新曆 見胡年

      금년도 다시금 명나라의 해가 아니던가
      옛날에 죽지 못한 이 몸이 불행하기만 하네
      나이 들어 눈이 어두운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차마 어떻게 새로운 달력으로 오랑캐의 해를 보겠는가

   이러한 그의 숭정의 연호를 고수하며 세상 밖에 나오지 않는 '숭정처사'로서의 자세는 멸망해 가고 있던 명에 대한 맹목적 애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당시 동아시아 유교적 가치인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명이 계승하고 있으며 그것이 조선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내재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족의 청에 굴복하는 것은 군자로서의 대의명분을 포기하는 것이자 도덕적 가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절의(節義)를 신조로 삼아온 그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의와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남명학파가 서인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처사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사정도 타의적으로는 정치보복에 따른 것이지만 자의적 선택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결국 정이심의 숭정처사의 삶은 충절과 의리를 우선하는 남명학파의 기질적 경향과 가문의 전통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던 셈이다. 그는 효종 7년(1656) 67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위패는 사림의 공론에 의해 청계사(淸溪祠)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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