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남명문학 현장 답사기(22)-황강정(2)>

황둔강, 그 끝없이 흐르는 한의 깊이 

정 우 락
영산대 교수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한, 그것은 체념해 버린 분노 체념해 버린 슬픔이다. - 이어령

  남명은 황강정에 올라 무엇을 생각했을까? 황둔강은 아래로 끝없이 흘러 돌아오지 않고, 위에서 한없이 흘러오길 또한 그치지 않는다. 남명은 이곳을 봄에도 오고 여름에도 오고, 가을과 겨울에도 왔다. 그때마다 강은 얼굴을 달리 하고 있었다. 이른봄엔 강물이 쪼개진 얼음을 실어 날라 더욱 차가워지고, 햇빛이 부드러워지면 청색으로 변하다가, 여름이면 수없이 많은 빛의 입자들이 강의 표면에 반사되어 서로 부딪치면서 비단결을 이룬다. 강가의 단픙이 붉게 물들면 물결도 함께 취하는 가을강, 억겁의 함묵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해 들어가는 겨울강, 그 형언할 수 없는 몸짓으로 황둔강은 굼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남명은 이러한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시간의 갈피 속에서 상처처럼 자라나는 '한(恨)'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남명이 올랐던 황강정에 다시 올라 남명의 '한'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보려 한다.

  '한'이란 무엇인가? 이것부터 알아보자. '한'은 자기에게로 열려져 있다. '억울하거나 원망스럽게 생각하여 뉘우치거나 맺힌 마음'이라고 사전적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은 이것 이상이다. 잔잔한 원한, 혹은 자기 내부에 쌓여가는 정감같은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욕망의 억압이나 좌절감 등으로 생기기도 하고, 부모가 이룩하지 못한 과제가 자식에게 전이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은 개인 혹은 가정 이상의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고,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치사적 측면에서 볼 때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폭압적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나, 일본 혹은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생긴 것 등은 개인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다. '한'은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혹은 국가적인 것이기도 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후세로 계승되기도 한다.

  남명은 어떤 '한'을 지녔을까? 우선 남명이 자신의 언어로 제시한 '한'에 주목하기로 하자. '한'은 '우(憂)'나 '수(愁)' 등의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다 할 것인데, 이것은 그의 작품 도처에 나타난다. '쌓인 시름 풀과 같아 비가 오자 새로워져([贈別 兄寅叔])', '시름을 녹일 수 있다면 잔을 다 따르련만([竹淵亭次尹進士奎韻])'이라 한 것이나, '시름겨운 마음 다 이야기하고 나서 잠 못 이루는데([贈五臺僧])', '상당엔 근심스런 구름, 바람에 깃발이 펄럭인다([六國平來兩 霜詩])'라고 한 것이 대체로 그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남명은 풀같이 새롭게 자라나는 시름을 경험하기도 하고, 녹일 수 없는 시름을 술로 달래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시름을 말하기도 하고, 펄럭이는 깃발에 자신의 근심을 이입시키기도 하였다. 이같은 '우'와 '수', 즉 근심은 그의 '한'을 더욱 철저하게 하였다. '한'이 표출되어 있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관찰해 보기로 하자.

      (가)
      길가 풀은 이름 없이 죽어 가고,
      산의 구름은 마음대로 일어나누나.
      강은 끝없는 한을 흘려 보내면서,
      돌과는 다투지를 않는다네.       

      路草無名死,           山雲恣意生.
      江流無限恨,        不與石頭爭.

      (나)
      행장은 소매 속의 책 한 권,      
      푸른 신, 대 지팡이로 절간 서쪽으로 오른다.        
      나그네는 이름 없는 한을 풀지 못하는데,        
      산새는 종일토록 뜻을 다하여 우는구나.          

      袖裏行裝書一卷, 靑鞋竹杖上方西.
      遊人未釋無名恨, 盡日山禽盡意啼.

  앞의 작품은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이다. 여기서 남명은 황둔강을 바라보면서 '한'을 흘려보내고자 했다. 1구에 보이는 '노초(路草)'의 이름 없는 죽음과 2구에 나타나는 '산운(山雲)'이 마음대로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처사적 삶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으면 '한'이 생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고 말면 작품의 이면적 의미를 놓치고 만다.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구, 즉 3구에서 남명은 강을 보면서 자신의 '무한한(無限恨)'을 이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길섶의 풀, 산구름, 강물 등과 무한한 '한'을 지닌 자신을 대비시키면서 오히려 자아의 '한'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돌과 다투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절제된 '한'의 모습을 읽어낼 수도 있다.

  이같이 고뇌에 찬 남명의 '한'은 뒤의 작품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이 작품은 [제문견사송정(題聞見寺松亭)]이다. 남명은 그의 한을 풀기 위하여 조촐한 차림새(書一卷·靑鞋·竹杖)로 산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름 없는 '한'은 마침내 풀리지 않고 산새만 종일토록 뜻을 다하여 울어댔다. 여기서 우리는 제 뜻을 다하여 우는 산새와 이름 없는 '한'을 풀지 못하는 시적 자아가 대비되고 있음을 본다. 이를 통해 남명은 자신의 '한'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無限恨)' 혹은 '무명한(無名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가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면 되겠는데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비난'과 '허명'이 그것이었다. 비난에 대한 남명의 반응부터 보기로 하자.

    몸가짐이 변변치 못해 견책을 불러오게 되었는데, 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인지라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습니다. 명공께서 칠십 평생 동안 남들이 감히 한마디 말도 흠잡을 수 없게 하신 점에 매번 감복할 따름입니다. 자신을 수양한 도가 없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와 같은 사람은 서리 맞은 파초처럼 행실이 잘못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멀리서 걱정하고 깊이 애통해 하는 마음을 다시 명공께 끼쳤습니다. 일찍이 자신을 그르쳤고 다시 벗에게 누를 끼쳤으니, 황천에서 마주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남명은 만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음부옥사(淫婦獄事)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비방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평소 나의 몸가짐이 보잘 것 없어서 오늘날의 이런 비방을 불러 온 것이니, 공이 옥처럼 자신을 지켜 남들이 감히 이러쿵저러쿵 흠잡을 수 없게 하신 점에 더욱 머리가 숙여집니다'고 하면서 대곡을 부러워했다. 남명은 음부옥사로 인해 결국 이정(李楨, 1512-1517)과 절교하게 되고 '함께 학문을 담론한 사람조차 서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며 괴로워한다. 위에서 보듯이 대곡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즉 대곡이 수양을 제대로 하여 칠십 평생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지 않은데 비해, 자신은 몸가짐이 변변치 못해 견책을 불러 왔다는 것이다. 서리 맞은 파초에 비유하여 자신의 고뇌를 극대화 하는 한편, 이같은 편지를 써서 친구인 대곡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게 되었다며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남명은 자신에게 부과된 허명도 비판하였다.

      평생의 행동거지는 웃음과 한탄을 자아낼 만하고, 늙고서도 저술할 것이 없으니, 이미 도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다시 이 몸은 이름 난 도적이 되어, 백방으로 도망을 치려 해도 달아날 수 없게 되었으니, 바로 하늘의 명호를 훔쳐 하늘이 도망을 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달 27일 정사에서 상서원 판관에 제배되었습니다. 다시 교지가 내려 승정원 하리가 싸가지고 왔는데, 내의원의 약재까지 하사하셨습니다.

  제자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 1540-1603)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 글은 남명이 65세 되던 8월에 상서원 판관으로 제수되고, 내의원에서 약재가 내려오자 10월에 조정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게 되는데, 떠나기 전에 쓴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자신은 이름을 훔친 '도적'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다. 이름은 하늘의 명호인데 이것을 훔쳤으니 도망쳐도 달아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남명은 다시 동강에게 편지하여 사신이 자신에게 오는 것이 부끄럽고 한스럽다고 하면서, '남을 속이다 끝내 임금을 속이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현자의 지위에 스스로 앉아 버젓이 몸을 드러냄으로써 이름을 훔친 죄를 더욱 무겁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허명과 관련한 강도 높은 남명의 자기비판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에게로 쏟아진 비난이나 자기에게 부여된 허명, 여기에 대하여 남명은 고민하였다. 그 고민은 '한'으로 축적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명의 '한'이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정치현실은 부조리하여 현인의 길은 기구하였다. 특히 19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이림(李霖),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지기(知己)가 죽었다. 남명은 이를 대단히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하다가 그 말이 이들에게 미치게 되면 가슴을 치며 목메어 울었다. 정치적 부조리는 백성들을 고달프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남명이 비록 산 속에 산 재야지식인에 불과하다고 하나, 한 번도 세상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의 정치가 잘못되어 간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천정을 우러러 길이 탄식하고, 특히 백성의 곤핍함을 보면 마치 내 몸과 내 가족이 아픈 듯이 가슴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달밝은 밤이 되면 홀로 앉아 슬픈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역시 눈물을 흘렸다. 남명의 눈물! 그것은 바로 '한'의 결정체였다. 남명의 '한'이 부조리한 현실과 그 현실을 살아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황강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줄 수 있었다.

      서리 내리는 밤 달빛 속에 그대 생각 정말 깊은데,          
      기러기 새로 돌아올 때 나그네 신세인 제비는 돌아가네.
      붉은 나뭇잎 산에 가득하여 온통 붉은 색이고,
      골짜기에 남은 푸른 솔은 가지 반쯤 없구나.
      달려드는 백발에 근심은 뒤얽히고,
      슬피 우는 백성들은 풍년에도 더욱 굶주린다.
      배에 가득한 답답한 생각 적을 수 없지만,
      우직한 황강 노인 그대야 응당 알리라.

      思君霜月正離離  新 時兼旅燕歸
      紅葉滿山全有色  靑松留壑半無枝
      侵陵白髮愁爲橫 嗚咽蒼生稔益飢
      果腹 懷書不得 黃芚老子爾能知

  위의 작품은 [기황강(寄黃江)]의 전문이다. 여기서 남명은 민의 곤폐를 문제 삼으며 그의 애민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백성들의 경제적 사정에 주목하였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다. 기러기가 다시 돌아오고 단풍이 붉게 물든 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수확을 맞이하는 계절이라 할 터인데 마음이 그리 풍요롭지가 못하다. 그 이유를 경련과 미련에서 제시하였다. 자신은 달려드는 백발에 근심이 뒤얽히고, 백성은 풍년인데도 불구하고 더욱 굶주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명의 근심은 자신의 백발 때문이 아니고 백성의 굶주림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괴로운 심정을 지기였던 황강은 충분히 알 것이라며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한탄하였다. 그의 한탄이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래도 값진 것이라 하겠지만, 한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시대에 영합하여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 남명의 고민이 있었고, 고독이 있었다. 남명은 황강정에 올라 바로 이것을 생각하였다.

      두견새는 누구를 위하여 울부짖는가?
      외로운 꿈 짓지 못한다네.                                   
      신세는 구덩이 속의 사슴과 같고,
      뜻을 펴거나 숨어 지내는 것은 모래밭의 자라로다.
      풀 옆으론 많은 길이 나 있고,
      강 위로는 오는 사람 적구나.
      겹겹의 파초 잎은,                                          
      겉은 벌어져도 속은 벌어지지 않았네.

      子規誰與    孤夢不能裁
      身世隍中鹿   行藏沙畔能
      草邊多路去   江上少人來
      複複芭蕉葉   外開心未開

  '한'을 더욱 깊게 하는 부조리한 현실, 거기에 출사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이 작품을 통해 남명은 굳건히 했다. 엄정한 출처관에 입각해 있음은 물론이었다. 위의 작품 [서이황강정미(書李黃江亭楣)]는 이렇게 해서 지은 것이다. 수련에서 두견새의 울음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제시하여 자신의 '한'을 드러냈다. 함련은 특히 주목할 만한데, 자신의 신세를 열자에 의거하여 '황중록(隍中鹿)'이라 하였고 논어에 의거하여 출처, 즉 '행장(行藏)'을 모래밭의 자라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중록'은 어떤 나뭇꾼이 사슴을 잡아 구덩이 안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훔쳐가자, 잃어버린 사람이 송사를 일으켜 재판관은 반분하도록 하였다 하니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비운의 신세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행장'은 공자가 안연에게 '써 주면 도를 행하고(行) 버리면 은둔하는 것(藏)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라 한 것이니 올바른 출처를 말한 것이다. 결국 비운의 신세를 지녔으나 출처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작품에 짙게 베여 있다. 또한 미련에서는 파초의 벌어진 바깥과 벌어지지 않은 안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것은 밖으로는 외로운 신세이나 안으로 지킴이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고자 함이었다. 남명의 '한'이 바깥으로 거칠게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의 '지킴'이라는 세련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음을 본다.

  남명은 황강정에 오르면 까닭없이 외로운 기러기가 되었다가 또 구름이 되기도(向來客意無詮次, 旋作孤鴻又作雲, [題黃江亭舍])했다. '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같은 생각은 더욱 간절하였다. 그래서 '한'을 풀고 싶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남명은 이 때문에 술마시며 노래하였다. 퇴계의 제자 성재(惺齋) 금란수(琴蘭秀, 1530-1604)가 1561년 덕산의 뇌룡당사를 찾아갔을 때의 일화를 통해 이는 잘 알 수 있다. 당시 성재는 김용정(金用貞), 권명숙(權明淑), 정긍보(鄭肯甫) 등과 함께 남명을 배알하였다. 구전이기는 하지만 남명은 '그대들은 퇴계의 문하에 나아간다지?' 하고 물었을 때, 성재 등은 남명의 준엄하면서도 번쩍거리는 눈동자 앞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같은 숨막히는 대화가 오간 뒤에 남명은 이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술기운이 무르익자 남명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서 좌중이 다 부르도록 권하였다. 옛 노래가 아니라 모두 스스로 지은 것이었다. 남명의 언어는 준절하였고 곁에 아무 사람이 없는 듯이 하였다. '한'과는 다른 방향을 지니고 있는 남명의 신명(神明)을 이렇게 만나게 된다.

  황강정에 오르면 남명이 지녔던 '한'이 가슴 저려온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면 더욱 깊이 느껴진다. 그 '한'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과 또 그에게 부여된 허명과 관련된 것이지만, 그의 '한'은 이것 이상이었다. 부조리한 시대와 맞서는데서 오는 일종의 사회적인 것이었다. 친구들은 사화를 만나 세상을 달리하고, 백성들은 고통을 더해갔다. 남명은 여기에 대하여 가슴을 쳤고 또 눈물을 흘렸다. 황강정과 황둔강은 이같은 심각한 고민에 근거를 둔 남명의 '한'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 남명은 매몰되지 않았다. 신명으로 그것을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자신의 감흥을 고조시켰다. '한'과 신명이 한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더라고, 남명 생애의 전영역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한'과 신명의 이중구조이다. 남명의 삶이 '한'으로만 기울어졌다면 한낱 패배주의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신명에만 밀착되었다면 취락주의자가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명은 그의 '한'을 신명으로 풀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심각한 시련이나 고난을 넘어설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남명의 지성적 삶의 구조를 흘깃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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