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제1장 생애(生涯)

    4.  산천재(山天齋)에 이는 대바람 소리(1)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신유년(1561), 선생께서 61세 되는 해, 지난 해 5월에 돌아간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묘표를 지었다.

      나는 이군과는 정의가 형제와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고 할 말이 막혀 붓을 놀릴 수가 없다. 거칠게나마 그 대강을 적는다.

      공은 겨우 열 살 때에 능히 글을 지었고 열 네 살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향시에 여러 번 장원을 했으나 문과에는 모두 떨어졌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처음에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몇 달 동안 일을 보다가 돌아와 버렸다. 다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다가 고령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이 년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중략)

      그의 효성과 자애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와 선을 돈독히 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남을 사랑하며 일에 부지런한 마음은 거의 견줄 데가 없다. 붙잡으면 주저앉기로는 유하혜(柳下惠)와 비슷하고 통달해서 알기로는 진동보(陳同父)와 유사하였다. 도를 지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가 이루어지길 바랐지만 직접 보지는 못한 사람이다. 활쏘기와 말타는 재주를 겸비하여 무인의 반열에도 뛰어났다. 마침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이름만 남겼으니 사람들이 아쉬워 하는 바이다.

    ―군자감 판관 이군 묘갈(軍資監 判官 李君 墓碣) 병서―

  황강은 남명보다 세 살 아래인데 지난 해 세상을 떴다. 남명은 상례를 무사히 치르고 정의가 남달랐던 공의 묘표를 이듬 해에 손수 지은 것이다. 황강은 남명과 함께 고령현감과 단성현감에 각각 제수 받았으나 출처를 달리하였다. 황강의 출처에 대하여 남명은 안타깝게 여겼다. 남명은 단성소를 올려 서릿발같은 준엄한 비판으로 조정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가벼이 나아가지 않았는데 비하여, 황강은 고령현감에 부임하여 이 년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마땅한 자리에 나아가 크게 쓰이지 못하고, 소소한 벼슬에 가벼이 나아가 몸을 망친 것이나 다름없음을 못내 안타까워한 것이다. 두 선생의 우의와 선은 비록 같으나 세상의 쓰임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의 도는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에 덕산의 사륜동(絲綸洞), 오늘날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山淸郡 矢川面 絲里)에 옮겨와 살았다. 선생은 지리산을 사랑하여 천왕봉 가까이에 터잡고 살면서 만년 강학처로 삼으셨다. 아담한 서실을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이름하고 수양처로 삼으셨다. '산천'이란 당호는 《주역》대축괘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剛健 篤實 輝光 日新其德)"는 말에서 뜻을 취하여 선생이 지향하는 심성수양의 기틀로 삼으신 것이다.

        봄 산 어디인들 향기로운 풀 없을까마는
        다만 천왕봉이 하늘 가까운걸 사랑해서이네
        맨손으로 돌아와서 무얼 먹을 것인가
        은하 십리 마시고도 남겠네."
             ― 덕산에 살 곳을 잡고서―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有餘
                          ―德山卜居―

  산천재 네 기둥에 덕산에 터를 잡고 산 뜻을 칠언절구에 부쳐 주련으로 걸었다. 이 시에 드러난 선생의 풍도(風度)는 천왕봉 만큼이나 아득하여 우뚝 하다. '백수(白手)'는 구차하지 않고  출처의 대도(大道)를 지킴을 말하고, 은하십리는 시천(矢川)의 맑은 물처럼 담박하게 살아가는 선생의 청빈한 삶 그 자체라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이 무렵 선생은 해와 달 처럼 만고불변하는 진실한 수양의 핵심으로 ‘경의(敬義)’를 학문의 요체로 내세워, 산천재의 방 벽 위에 크게 써 붙여 놓았다. 또한 허리춤에는 '경의'의 뜻을 항용 실천하고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뜻을 새긴 패도를 찼다. 선생은 이처럼 지리산 천왕봉 가까이 터를 잡고서 사상과 학문의 완성을 위하여 무엇보다 수양 공부를 제일로 삼고 이를 실천하는데 평생동안 일관된 삶을 살았다.

  이 무렵 선생은 매우 창발적인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신명사명(神明舍銘)과 신명사도를 지어 공부방의 좌석 바른편에 걸어두고, 한 오리의 사특한 마음도 용납하지 않고 지순(至純) 지고(至高)한 심성을 보존하여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입과 귀와 눈에서 나오는 모든 사악한 기미를 철벽과 같이 막아내고 무찔러 한 치의 허물도 용납하지 않고, 신명사인 마음의 진정한 보존을 위해 해와 달처럼 경(敬)과 의(義)를 안 밖으로 표상 하여 수양의 첫째 공부로 삼은 것이다. 신명사명을 쉽게 풀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일진군(마음)이
      명당(밝은 마음의 바탕)에서 정사를 편다.
      안에서는 총재(마음을 다스리는 작용)가 관장하고,
      밖에서는 백규(밖을 살피는 작용)가 살핀다.
      추밀(마음의 움직임)을 받들어 말(言)의 출납을 맡아
      진실되고 미덥게 말을 한다.
      네 글자(和 恒 直 方)의 부절을 발부하고
      백 가지 금지의 깃발을 세운다.
      아홉 구멍의 사악함도
      세 군데(귀 눈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기미가 일어나자 용감하게 이겨내고
      나아가 반드시 무찌른다.
      승리를 임금(마음의 본체)께 보고하니
      요순의 세월(마음의 평정)이로다.
      세 관문(귀 눈 입)을 닫아두니
      맑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네.
      하나(마음의 고요)에로 돌아가니
      시동(尸童)과도 같으며 연못과도 같도다."

      太一眞君  明堂布政  內宰主  外百揆省
      承樞出納  忠信修辭  發四字符  建百勿
      九竅之邪  三要始發  動微勇克  進敎殺
      丹復命  堯舜日月  三關閉塞  淸野無邊
      還歸一     尸而淵  

  이 때의 남명은 비록 노경에 들어서도 한 걸음도 지침이 없이 강건하고 날로 새로워 수양공부에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었다. 문인 한강(寒岡)은 이러한 선생에 대하여, "한결같이 옛사람이 이루어 놓은 법도를 따라 공부가 이미 익숙하였다. 큰 근본이 이미 확립되니 일상행사와 대외응사(對外應事)가 유통하여 막힘이 없었다."라고 하고, 또 "사욕을 이기기를 엄하게 하여 구규(九竅)의 간사함을 모조리 섬멸하여 간특한 소리와 음란한 빛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마음을 간직 하고자 눈 귀 입의 세 관문을 통하여 헛된 생각과 잡된 마음이 감히 싹터서 들어오지 못하게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숙연하기가 항상 귀신을 앞에 벌여 모신 시동(尸童)과 같이 하고,  살아있는 용과 살아있는 범이 고요하고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듯 하였다."라고 말했다.

  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선생에 대해, "불러 깨우치고 말끔히 씻어, 낮에는 자숙하고 밤에는 반성하니, 덕에 나아가고 업을 닦는 용력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라고 하였다

  산천재를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와서 배웠다. 그는 일곱 살 때 퇴계의 문하에 들어 이미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는데, 남명이 덕산에 온 그 해 진주 향교 교수로 부임하여 이미 명망이 높은 선생에게 나아가 서른 여섯의 나이에 만년 제자가 되었다. 공의 연보에 보면,  "남명 선생을 쫓아 놀아서 깊이 인정을 받았다. 도를 지켜 우뚝한 벽같이 서는데 체득함이 있으므로 진퇴를 한결같이 의(義)로써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온전히 지켰다."라고 하였다. 공의 자는 자정(子精)이며 관향은 서원(西原)이며 약포집이 남아있다. 공은 서른 세 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내고 평안도 성천향교 교수, 진주향교 교수와 사간원 정언, 좌의정에 이르고 서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약포가 벼슬을 받아 선생을 하직할 때 선생께서 홀연히 말씀하기를,"내 집에 소가 한 마리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하므로, 무슨 말인지 몰랐더니, 남명이 웃으며 말하기를,"군의 말과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이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비로소 능히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거네." 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공이 큰 허물에 빠지지 않고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문인들의 자질과 품성에 따라 개별적인 독특한 가르침으로, 곧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채워주는 교육방법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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