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열린글터

   현재의 선비들이여. 새로운 집을 짓자.

이 시 활
경북대 중어중문학과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우리들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기에 상실감에 슬퍼한다. 그 상실감의 슬픔과 똑같은 감정의 울림으로 함께 다가오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며 찾고자하는 내면적인 노력이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되면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영원히 비추어진다.

  이처럼 지금의 현대 물질 문명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너무나도 많다. 즉 그리움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향이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지금 있는가. 주민등록상의 물질적 고향만이 존재할 뿐 어머니 품속과 같은 넉넉함을 떠올리게 하는 심리적인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전통과 고전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전통을 대체한 현대는 올바르게 건축되었는가. 온통 부실공사 투성이이다. 우리들은 결국 전통도 없고 현대도 없는 폐쇄적인 낯선 공간 속에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왜소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즈음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에 전통과 현대를 화해시켜 행복한 결합을 은밀하게 꿈꾸는 노력들은 슬픔으로 인해 발생된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바로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삶이 편안하게 거주할 집을 제대로 짓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의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잃어버린 전통의 한 부분을 잘 골라 기초를 삼고 견고하고 단단한 현대의 돌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으면서, 화려하지는 못하더라도 정채롭고 튼튼하며 균형 잡히게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집을 짓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짓기 과정에서 가장 선행되는 것은 현재적 현실에 대한 반성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초기 기획 단계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불쑥 선비라는 잃어버린 인간형의 이름이 떠오르면서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동양학에 대한 까닭 모를 친근감을 가지고 대학주위에서 책가방만 메고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나의 일상적 생활 탓일까. 거울 속에 비치는 흉한 나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선비라는 단어는 전통과 현대의 화해라는 우리들의 새로운 집짓기 과정의 초기단계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고민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선비란 누구일까. 답답하다. 아아, 이름만이 생각날 뿐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생생함이 엷어지고 희미해져서 추억의 앨범 속의 빛 바랜 인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닐까. 실체로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더욱 그리운 것이리라. 친구란 영화가 최고흥행기록을 갱신하듯 선비란 단어도 할인점에서 복고상품의 하나로서 진열되고 있다고 간주한다면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선비, 선비유적, 선비정신, 선비문화 등을 패키지로 묶어 상품으로 출시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지나친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상품가치가 있다는 것은 현재 선비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의 반증에 다름 아닌 것. 이처럼 선비와 관련된 모든 것은 물질적인 상품기호로 존재하든지 아니면 생명력이 사라진 역사교과서나 학술논문 속에서만 용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서글퍼진다.

  모든 일이란 연구해보아야 반드시 명백히 알 수 있는 법. 그럼 우리 주위의 모습을 살펴봐야겠다. 선비를 현대적인 용어로 풀어 본다면, 지성인, 교양인, 독서인 등에 해당될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특수 계층에서 학식과 인격을 겸비한 이상적 인간상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항상 책임 있는 지성인과 교양인은 존재하였다. 그들은 대중과 호흡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수양하면서 인격을 도야하고, 당대의 현실에 살고 있지만 현실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이상적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개별적인 이름으로 명명하기보다는 선비라는 이념적인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어떤 나라든지 들어가 봐서 선비를 아껴 주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망할 나라일 것이다(入國而不存其士, 則亡國矣)"는 묵자의 말처럼 우리는 선비들을 믿고 그들의 말과 행동에게 시대정신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항상 사회의 중추로서 역할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선비는 어떠한가. 현재 지성인, 교양인으로 불리는 사람도 많고 자처하는 사람도 많다. 선비가 많아 졌다는 것이다. 그들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모두들 화원 속의 분재처럼 물질이라는 세속적 욕망의 철사줄에 의해 강제로 뒤틀려져서 약삭빠르고 추악한 면모를 보일 뿐이다. 다중적인 작업이 가능하게 한 컴퓨터 능력 덕분에 우리들의 선비들의 세속적 욕망도 다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布衣疏食할 수 있는 586컴퓨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속도경쟁까지 하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의 선비들은 모두들 恒産이 있어야 恒心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돈에 사족을 못쓰고, 감투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아귀다툼을 天下事를 맡기 위한 경륜을 쌓는 과정이라 이해하고, 자기가 가진 권력이나마 최대한 행사해야 남들이 자신을 敬而遠之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앞에서는 좋으면 좋다는 식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고 뒤에서는 세속적 출세를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을 和而不同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절망의 시대에 슬픔과 고통의 정체를 살피지 않는 뻔뻔스러움을 大節이라 파악하고 있다. 현재의 선비들은 잘 나갈 때는 두루 천하의 이권과 비리에 개입하는 눈이 밝아져서 남을 짓밟을 줄 알고, 잘 못나가면 남의 탓이라니 재수가 없었다니 하는 말들로 홧병이 들어 자기의 몸을 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達則兼濟天下, 窮則獨善其身의 현대적 패러디인가 아니면 현재의 실정에 맞게 업그레이드 된 것인가.  

  이처럼 오늘날의 선비들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하나의 금형틀 속에 찍혀 나오는 상품처럼 모두들 생김새가 똑같다. 개성을 존중하는 다양성의 시대에 모두들 똑같기에 재미없는 인물로 비춰진다. 멋이 없다는 것이다. 자고로 文人相輕이라 하였던가. 잘못 배운 놈의 못된 생각일까. 아니면 현실을 삐닥하게 뒤집어 보는 나의 괴팍한 성격탓일까. 아아, 나의 기질과 성격탓으로 기인한 졸렬한 생각이었으면 좋으련만. 아둔한 머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오늘의 선비들이여. 설명해다오. 이처럼 선비가 많은 지금 왜 나는 선비를 그리워하고 찾고자 하는가.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현재 반면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선비들은 많고 정면교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참된 선비가 없기 때문이리라.

  여기까지 이르니 암담하다. 갑자기 피 토하는 듯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혹 오늘날 진짜 선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비를 찾아야 할 텐데.

  오늘날의 선비는 멀리에 있지 않구나.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워야 한다고 멀쩡한 자신의 어린 아들딸들을 지체장애인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보내는 젊은 어머니, 단칸 셋방에 웅크리고 네 식구가 자지만 넉넉한 웃음을 잃지 않는 과일가게 아저씨,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서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지으면서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 천하생민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면서 눈물을 훔치는 옆집 아줌마,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여도 성실함을 잃지 않고 화장실에 책 한 권, 침대머리에 또 한 권을 두고 항상 독서하면서 사고의 깊이를 하루하루 발전시키는 우리 옆집 아저씨, 이들은 자신을 지성인이니 교양인이니 하는 말로도 치장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들이 아마 오늘날의 진짜 선비일 것이라.

  선비는 인간을 사랑하는 삶, 바로 남과 더불어 함께 같이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선비는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선비는 산해진미를 먹고 배부른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먹고 배부른 것이다. 비록 절망의 현실에 대항하는 자기만족적인 희망이라 할 지라도.   오늘도 역시 별이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한 도시의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보통 때와 달리 나의 마음은 아주 편안하다. 별은 끊임없이 밤하늘에 뜨고 있다.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캐한 도시의 안개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선비들이여. 우리의 내면 속의 별을 찾자. 마음 속의 고향으로 귀향하자. 퇴계가 남명이 나의 마음 속의 별이 된다면, 나는 오늘의 퇴계가 되고 오늘의 남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움은 바로 나의 마음 속으로 떠나는 것이다. 선비는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로 진짜 선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니 나의 마음은 다시금 상쾌해진다. 우리의 새로운 집짓기는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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