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김범수(金梵壽)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 본원 이사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1990년 9월 20일 대한민국 보물 제1046호로 지정된〈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라는 것이 있다. 여기의 상단 산수화는 인조 21년(1643) 선조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1588∼1644)의 의뢰에 의하여 화가 이징(國工, 虛舟 李澄:1581∼?)이 그렸고, 하단의 글씨는 신익성의 자필이다.

  세로 89㎝ 가로 56㎝인 이 그림에는 일두 정여창(一 鄭汝昌:1450∼1504) 선생의 섬진강시 절구(蟾津江詩:先生絶句)와 악양정시서(岳陽亭詩敍)·신익성의 발문, 그리고 아래와 같은 남명(南冥 曹植:1501∼1572) 선생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남명 조선생의《유두류록》에 이르기를, 도탄(淘灘)에서 1리쯤 가면 정여창 선생이 살던 곳이 있다. 선생은 천령(天嶺:咸陽)의 유종(儒宗)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의 도를 이었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 내한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南冥曹先生 遊頭流山錄云 去淘灘一里 有鄭先生汝昌故居 先生天嶺之儒宗也  學問淵篤吾道 有妻子入山 由內翰出守安陰縣監 爲喬桐主所殺

  이 말은 남명선생이 명종 13년(1558)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유두류록(遊頭流錄)》의 4월 16일 조에 있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한 도탄(淘灘)에서 1리쯤 되는 지점은 정여창 선생이 함양으로부터 처자를 이끌고 와서 살던 곳이라는 뜻이다.

  정여창 선생은 연산군 4년(1498)에 있은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1431∼1492)의 문인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인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 적소(謫所)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해 9월에 다시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剖棺)의 율을 당한 분이다. 그리고 경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분이기도 하다. 호는 일두(一),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일두 정선생의 행장에 의하면, 그는 섬진(蟾津)의 어귀에 "작은 정자를 얽어 악양정(岳陽亭)이라 편액하고, 몸을 감추어 닦으면서 글을 읽고 도의를 강론하며 시가를읊으면서 즐기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함양군 개평 출신이지만, 그의 행장과 연보, 그리고 관련 사료 등을 종합해 보면,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할 때에도 이곳에 살았고, 21년(149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에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면 일두 정여창 선생이 살았던 지점은 지금의 어느 곳일까. 그리고 악양정은 어느 곳에 있었을까. 무오사화 이후 4백 년이 지난 고종 33년(1896) 산석 김현옥(山石 金顯玉:1844∼1910)은 몇몇 동지와 더불어 소학강계(小學講契)를 베풀고, 하동부사 장두삼(張斗參)에게 청하여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에서 1리쯤 되는 지점에 악양정을 복원코자 협의하였다.

  이에 앞서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1470∼1550)은 선생이 몰한 지 45년이 되는 명종 4년(1549) 쌍계사에 가서 팔영루 운(八詠樓 韻)을 짓고 일두선생의 옛 집에 들러 "죽림으로 반이 가렸다"는 시를 남겼고, 옥계 노진(玉溪 盧:1518∼1578)은 선조 4년(1571) 10월 쌍계사를 구경하고 일두선생의 유적을 살펴 "석양에 말을 세워 옛 터를 찾으니"라는 시를 남겼지만,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러했던 것이 ‘도탄에서 1리쯤’이라는 남명선생의 언급에 의하여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덕은동(德隱洞)으로 밝혀진 것이다. 4백 년의 세월 속에 악양정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었지만 뜰 앞에 심었다는 매죽(梅竹)이 확인됨으로써 입증된 것이다.

  남명선생이 언급한 도탄은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하며, 덕은(德隱)이라는 말은 일두 정선생의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다고 하여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고증되기 3년 후인 광무 3년(1899) 3월 향내 사림(士林)들의 발의에 의하여 하동군수 강영길(姜永吉)·박기창(朴基昌)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광무 5년(1901) 4월에 악양정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남유(南遊) 중이던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1833∼1906) 선생이 진주에서 쌍계사로 가던 중 악양정에 들려 「악양정중건기」를 찬하였고,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1853∼1936)는 악양정이라는 현판과 주련의 섬진강 시를 썼다. 

  악양정 경내의 덕은사(德隱祠)에는 태사 휘국공 회암 주부자(太師徽國公晦菴朱夫子)·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寒暄堂金宏弼)·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一鄭汝昌)·문민공 탁영 김일손(文愍公濯纓金馹孫)·둔재 정여해(遯齋鄭汝諧) 등 다섯 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석채의전을 받들고 있다.

  악양정에는 남명선생의 두류록 중 일부를 기록하여〈악양정구적(岳陽亭舊蹟)〉이라는 제목으로 편액되어 있고, 1984년 김범수 편저 하동향교 발행의《악양정지》가 있다.

  그리고 악양정은 악양정 정장 김상용·하동향교 전교 정한효·유도회 하동지부장 최재현·악양정지 편저자 김범수 등 4명의 문화재 지정신청에 의하여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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