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경의'철학과 엘리트의 길

박  병  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우리 역사에서 정치, 문화, 학술 등 여러 방면의 총체적 황금기였던 시기를 꼽으라면, 그 중에는 언제나 조선조 세종 시대가 포함된다. 성인의 자질을 갖춘 임금아래 대신으로는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유관(柳寬), 김종서(金宗瑞), 최윤덕(崔潤德) 등 노성(老成)한 덕과 지략을 갖춘 인물들이 있었고, 그 아래로 조상치(曺尙治),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신진기예(新進氣銳)한 엘리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회뢰(賄賂)가 있을 수 없었고, 구복(口腹)을 기름지게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 누구도 그들을 유혹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정의 시책은 백성을 속이지 않았고 돌아가는 이익은 백성들에게 '균정(均正)'하게 할 수 있었으니, 그로 인해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공(協恭)'을 이끌어 내어 '희희호호(熙熙)'한 정치의 구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여는데는 엘리트들의 '무소유' 내지는 '무욕'의 정신이 큰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황희는 18년을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생활이 너무도 검소하여 '부인과 딸이 속옷 한 벌을 번갈아 입는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유관은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면서 비오는 날에는 방안에서도 우산을 받고 지냈다 하여 '우산대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통시대에도 재산의 다과는 매우 중요하여 어느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유현(儒賢)으로 높임을 받는 분들도 지역의 큰 산을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든지, 광범한 전장(田庄)확보를 위해 부혼(富婚)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대유(大儒)일지라도 부귀의 문제에 초연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그만큼 '부귀(富貴)'의 문제가 현실의 출처를 결정하는데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귀에 얽매이는 한 민생을 풍요롭게 하는 성대한 정치적 공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삼국지》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전장(戰場)에서 사망한 뒤 조사된 재산 목록에 '거친 밭 15경과 뽕나무 800그루'가  전부였다는 것을 알고 있고, 현대 중국의 초대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 역시 별다른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그들의 나라를 위해 '국궁진췌(鞠躬盡)'의 자세로 한 순간도 사적인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며, 여기에서 인간적 박력과 매력이 형성되었고 천고 백성의 존경을 받게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중국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나라인데도 우리 현대정치사의 중심에 있던 권력엘리트들은 '돈'문제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이 널을 뛰니 바라보는 서민들만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정치자금을 받았으면 정치에 사용해야지, 집사고, 옷 사고 자식의 치부에까지 사용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은퇴 후까지 호의호식할 계략을 꾸미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이런 형편이니 권력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은 일급의 경륜을 갖춘 맑은 사람이기보다는 천박한 모략가(謀略家)를 흉내내는 자들과 그도 못되는 탁객(濁客), 취객(醉客), 아첨배(阿諂輩)들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들이 모여 국가의 공기(公器)를 욕되게 하고 개인의 영달과 치부를 위해 잔머리들을 굴리는 까닭에 백성들의 곤핍만 깊어지는 것이다. 결국 많은 권력-자본 엘리트들이 겉으로는 국민을 앞세우나 속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흥청망청 국가의 부를 거들내는 이러한 표리부동의 고질적 병폐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아마 남명선생께서 이 시대에 계셨으면 결코 이 시대의 정치 사회적 현상을 긍정적, 낙관적으로 평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당시 일반의 유자들과는 달리 재물에 초연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몫 좋은 재산은 아우에게 주고, 서울의 부변(父邊) 재산도 자형인 이공량(李公亮)에게 넘긴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난하게 생활을 영위하는 정상이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단적으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가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선생의 가난을 도우라는 말을 남겼고, 그러한 유언을 실천하려는 삼족당의 자제들에게 곡진하게 거절하는 과정이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선생은 말과 실제의 행동이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셨고, 엘리트들이 '하기 어려운 것'을 실천하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편안 무사함에 안주하는 것을 '도명기세(盜名欺世)'라 하여 비판하였다. 즉, 일상을 벗어난 고답적인 논의를 학문적 주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결국 학문이란 외피로 스스로의 부귀를 보호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결국 군부와 백성을 속이면서 스스로 '현자인체'하는 것으로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현대에 와서도 말로만 '민주'하고 말로만 '국민을 위하여' 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입으로만 '진정한 공복인체' 하는 풍조를 비판하는 맥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존천리 거인욕(存天理去人慾)'에서 천리와 인욕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목구비의 욕(耳目口鼻之慾)도 천리로서 긍정한다. 다만 주체의 각고면려(刻苦勉勵)한 공부를 통하여 중절(中節)하면 선(善)을 이루어 천리를 드러내는 것이요, 중절치 못하여 악으로 흐르면 인욕으로 보았다. 따라서 천리는 일상의 실천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니 선생에게 있어서는 '경의(敬義)'가 바로 '천리(天理)'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선생께서 세상을 읽는 창(窓)은 이(理)/기(氣)가 아니라, 허(虛)/실(實)의 축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선생께서 긍정하는 '실(實)'의 세계는 효제(孝悌)와 같은 일상의 비근한 실천으로부터 확인되는 것이지, 저 이기(理氣)와 같은 형이상학적 부석(剖析)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단칠정논쟁은 선생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서 볼 때 대부분 허(虛)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민생의 질곡을 해소하거나 교화를 하는데 별 다른 도움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의 시폐(時弊)를 개혁하는 것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으로 그저 기득권에 안주한 유자(儒者)들의 허울좋은 지적 만족과 우월감을 고취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이 찾아서 그곳에 터 하여 살아간 '실(實)'의 세계는 '백성을 기만'하거나 '스스로를 속여서' 세상에 아첨하는 그런 '일상(日常)'이 아니라 '위무불능굴(威武不能屈)'하는 맹자적인 '호연(浩然)'의 세계며,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 천왕봉 같은 '정대불발(正大不拔)'의 세계였다. 또한 웅대한 경륜을 축적했다가 세상에 나서면 '태공(太公=呂尙)과 무후(武侯=諸葛亮)'를 뛰어넘고,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대장부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 있어서는 그릇된 부귀는 한 조각 구름 같은 존재였으니, 부귀의 유혹을 억지로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물리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인격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자는 '기이하고 너무 높다(奇異高尙)'하고 간사한 자는 질투하였으나, 뜻 있는 선비들에게는 '게으름과 나태함을 일깨우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요 종소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실(實)'의 세계는 탁월한 인재들로 구성된 문인집단에 의해 계승되었으니 내환(內患)에 대해서는 당파의 이익을 떠난 '백성 우선'의 정론으로 대처했으며, 외침(外侵)에 대해서는 목숨을 건, 지용(智勇)을 다한 주체적 응전으로 대답했다. 특히 외침의 경우 선생의 문인이며 외손서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의 행적에서 그 가르침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망우당은 왜란을 경계했던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임란 전 몇 년 동안을 재산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고 전해지는데 임란이 일어나자 바로 자기의 전 재산을 의병단 유지에 투척하였다. 그 결과 둘째 사위(斗回庵 成以道)를 맞을 때는 분재할 재산이 없어 훈계하는 글로 대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의병단 내에서는 가족이나 인척, 양반이라고 해서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종군하는 노비의 자식들에게 자기 자제들의 옷을 벗겨 입혔다고 하니 그 사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지공(至公)과 충국(忠國)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아마 요즘 세상을 주름잡는 탐욕과 허위로 가득 찬 지도층들도 그럴듯한 말만하다가 전쟁이 나자 처자식을 끌고 산 속으로 도망친 당시의 많은 사대부 벼슬아치들처럼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속으로는 이러한 '봉비천인(鳳飛千)'의 기상을 '바보 같은 짓 또는 보통 사람과 다른 지나친 짓'으로 비웃을 지 모른다. 망우당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므로 '기이(奇異)하고 중용을 벗어났다'고 하면 그것이 옳은 견해일까?  진구렁에서 함께 뒹굴며 유락(唯諾)의 출처를 않는다고 시기하고 외면한다면 정기(正氣)는 어디서 배양될 것인가?

  필자 역시 선생의 가르침이 바른 길 인줄 알면서도 이리저리 뒹굴며 사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인데, 다만 선(善)을 추구하는 일단의 강개(慷慨)한 무리들은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진 못한다 하더라도 그 큰 방향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위안하며 다시 한번 선생의 가르침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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