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2001년 6월 20일]

서평1

남명조식-칼을 찬 유학자,
절망의 시대-선비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발행인:김충렬/편집인:김경수/발행처: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주소:경남 진주시 봉곡동 14-21 /전화:(055) 741-9765

 

曺植, 임금도 '꾸짖은' 대쪽 선비정신 <남명조식, 칼을 찬 유학자> - 한형조 등 지음/·청계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말하는가> - 허권수 지음/·한길사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 됩니다."(1555년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

 

남명조식, 16세기의 대표적 선비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당시 사회의 위기 의식을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한 비판적 지식인이다.  1567년 승정원에 올린 또다른 상소문에선“진실로 한마디의 말이라도 들어서 만에 하나 임금님의 덕화(德化)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면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로서, 나라를 부흥시키는 한마디로 삼겠습니다."고 적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 일개 처사(處士)에 불과한 남명이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남명이 살아간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기였다.  50년간 지속된 사화로 말미암아 지방에서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을사사화 이후 사화의 끝이 보이는 듯했으나 곧이은 척신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 문란과 왕실 친인척을 비롯한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강화시켰다.  남명은 이런 현실에서 선비가 서야 할 길은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여겼다.  국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현실의 모습을 바로 지적 해주는 것이 선비의 몫이라 판단했다.

'목숨건 발언' 선비의 몫으로 판단

  남명은 당대에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 퇴계와 함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인식됐으나 어느때부터인가 퇴계의 명성에 가려 잊혀졌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남명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그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남명 탄신 500년을 맞아 곧 출간될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한길사)와 '남명조식, 칼을 찬 유학자'(청계)는 '잊혀진 유학자' 남명을 대중앞에 복원하는 작업이다.  허권수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소장이 쓴 '절망의 시대'는 남명의 생애와 사상, 학문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최초의 본격적인 평전.  서문에도 나타나듯 '학문 연구의 결과를 쉽게 풀어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사화의 반복과 척신정치라는 억압된 정치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원칙을 지켜나가면서 현실에 적극 대응한 남명의 드라마틱한 삶을 비교적 쉽게 정리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 생생히 담아

  이종묵, 한형조, 박병련, 정순우 등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4명이 쓴 '남명조식, 칼을 찬 유학자'(청계)는 실천하는 지식인 남명의 면모를 생생하게 담고있다.  이종묵 교수는 남명은 시학(詩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실천적인 처사로서의 삶을 살아간 그대로의 모습을 강렬하게 시에 투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욕천(浴川)이라는 시에선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 처럼,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표현을 썼으며, 이는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했다.  조금이라도 허물이 생기면 할복을 각오하는 강한 개성과 실천 의지는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남명을 '칼을 찬 유학자'로 묘사한 한형조 교수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퇴계를 상인(尙仁), 남명을 주의(主義)로 대비한 성호 이익의 해석을 빌려 사랑과 관용을 뜻하는 인(仁)이 문치를 말하는 선비에 어울린다면 의(義)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에 어울린다고 지적한 후, 남명을 펼치면 곧바로 닥쳐오는 것이 바로 '칼'의 이미지라고 풀이했다.

  남명의 칼은 안으로는 수양과 극기를,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는 것.  칼로 상징되는 남명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가는 실천적인 유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박병련 교수는 남명은 유학의 다양한 명제와 가르침을 경의(敬義)에 집약하고 이것을 실천성의 맥락에서 생명력있는 통합을 이루어 내고자 했다고 평가하여 남명 사상의 요체는 실천에 그 목표가 있음을 강조했다.

수양과 극기·외적 대처의 목소리로

  '남명조식, 칼을 찬 유학자'는 남명이라는 학자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적극적인 현실대응력으로 집약된다.  중앙 정치가 정쟁과 권력독점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없을 때 남명은 그 대안으로 비판세력의 현실참여를 적극 주장했다.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500여년이 지난 요즘, 언론자유가 보장된다는 국가에 살면서도 남명처럼 서릿발 같은 비판과 직언을 쏟아내는 지식인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남명의 칼을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 빌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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