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문학현장답사기(21)]

황강정(1) - 낙월옥량 혹은 남명과 황강

 정  우  락
영산대 교수

거울은 깨져도 빛은 상하지 않고 난초는 죽어도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 - 맹교(孟郊)

  황강(黃江)은 황둔강(黃芚江)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 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위천(渭川)이 되고, 갈천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황둔진(黃芚津)을 이루며 합천으로 흘러들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황강정은 황둔강 하류의 절벽 위에 자리한 것으로, 오늘날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있다. 이 정자는 남명의 친구 황강 이희안(李希顔, 1504-1559)이 1531년 8월, 그러니까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 가을에 학문을 강마(講磨)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황둔강이 유유히 흐르고, 옥두봉(玉斗峰)과 봉령(鳳嶺)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경치가 특히 빼어나다. 황강은 이 정자에 도서를 갖추어두고 엄숙하게 거처하면서 진리탐구에 매진하였다.

  황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황강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남명을 비롯하여 송계 신계성(申季誠, 1499-1562), 대곡 성운(成運, 1497-1579) 및 동주 성제원(成悌元, 1506-1559)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황강은 이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한편, 제자를 기르기도 했다. 탁계 전치원(全致遠, 1527-1596)이 그에게 소학을 들고 와서 배움을 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때는 1542년 황강이 39세 되던 해였다. 15세의 전치원이 황강에게 배움을 청하였으나 황강은 짐짓 그를 물리치면서 뜻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치원은 꿇어앉아 종일토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닷새를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에 황강은 유작(柳酢)과 양시(楊時)가 정이(程)를 찾아갔을 때 생긴 정문입설(程門立雪)의 고사를 떠올리며, 이 사람은 고인의 입설지조(立雪之操)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제자로 맞아 들였다. 역시 황강정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황강은 남명 및 송계와 함께 영중삼고(嶺中三高)라 불린다. 그는 합천인으로 자는 우옹(愚翁), 이름은 희안, 황강은 그의 호이다. 이름을 희안으로 한 것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덕행으로 가장 뛰어났던 안연(顔淵)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황강은 1504년(연산 10) 아버지 윤검(允儉)과 어머니 통천 최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총관에 추증된 분이고, 어머니는 세종조에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崔潤德)의 손자 계한(季漢)의 딸이다. 좌의정 권진(權軫)의 손자 중신(仲愼)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하나 두었으며, 소실의 몸에서 아들 팽구(彭耉)를 두었다. 권씨 부인이 죽고 이한정(李漢禎)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으나 자녀가 없었다. 황강의 이력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연보를 간단히 작성해 보자.

  황강이 가장 철저하게 공부한 것은 소학과 논어였다. 소학은 8세부터 공부하여 학문의 현실적 적용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터득한 바를 제자 전치원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논어는 그의 정신세계를 확립하는데 있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황강실기에 의하면 11세에 논어를 읽고 '활연개명(豁然開明)'하였다고 한다. 이때 황강은 비록 나이는 어리다고 하지만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와 그의 문도들이 벌이는 진리를 향한 고뇌의 몸짓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의 진리탐구를 향한 독실한 발걸음은 20세 권씨 부인을 맞으면서 더욱 돈독해졌다. '성현의 학문을 마음으로 다짐하며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이를 잘 대변하다. 황강정이 이루어지면서 원근의 선비들은 학문강마를 위하여 모여들었고 여기서 경전과 역사서들이 두루 토론되었다. 이는 황강의 학문이 황강정 건립을 계기로 하여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강의 일생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형과 아버지가 잇달아 죽고 첫째 부인 권씨도 그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소실의 몸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그의 뒤를 제대로 이을 사람도 없었다. 10세에 글을 짓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사마시와 향시 등에서 거듭 1등을 하였으나 대과에는 마침내 급제하지 못했다. 또한 유일로 여러 번 천거 되기는 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바로 돌아와버렸다. 1552년에 고령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버린 경우는 그 대표적이다. 이때 경상감사 정언각(鄭彦慤)이 황강을 질시하여 죄로 다스릴 것을 명종에게 청하고 호조판서 조사수(趙士秀) 역시 경연에게 정언각의 말대로 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장령 유중영(柳仲)은 '무릇 수령이 재물을 탐내고 백성들을 학대한다면 관직을 버릴 수 없으며, 관직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물을 탐하거나 백성들을 학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황강을 유일로 기용했다가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중죄로 다스리는 것은 조정에서 선비를 대하는 예절이 아니라며 황강을 변호하였다. 이에 명종은 유중영의 말을 옳게 여겨 황강을 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황강정 및 그 정자의 주인에 대한 대체적 이력을 보았으니, 이제 황강이 남명과는 어떤 사이였던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남명과 황강은 인척관계에 있었다. 즉 황강의 어머니는 세종조 좌의정을 지냈던 최윤덕의 증손녀였고, 남명의 외할머니는 최윤덕의 따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황강과 남명은 이른 시기부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황강은 1527년(24세)에 남명이 부친상을 당하여 서울로부터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하여 삼가 선영에 장사를 지내자 문상을 하며 같이 슬퍼하였고, 1546년(43세)에는 남명이 모친상을 당하여 김해에서 운구하여 역시 삼가 선영에 와서 장사할 때도 남명의 손을 부여잡고 같이 울었다. 그 이전 1530년(27세)에는 남명이 김해 신어산 기슭에 산해정을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있을 때 송계 신계성, 대곡 성운 등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덕성(德星)이 모였다고 칭송하였다. 학문연마는 1548년(45세)에 남명의 강학지 삼가 계부당(鷄伏堂)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명 역시 42세(1542년) 되던 해 5월에 황강의 모부인 최씨가 돌아가시자 문상하고 만사를 올린다. [만정부인최씨(挽貞夫人崔氏)]가 그것이다. 이 시에서 남명은 "봉분은 큰 새가 내려앉은 듯 손님이 모였음을 보겠고, 무덤은 소가 잠 자는 듯 복을 내림이 더디구나. 내 아버지 내 아들을 응당 만나게 될 텐데, 삼가 소식을 전하노라면 눈물이 이리 저리 엉키겠지요."라면서 슬퍼한다. 또한 14년 뒤인 1556년에는 [정부인최씨묘표(貞夫人崔氏墓表)]를 쓰기도 한다. 황강이 남명을 들어 세상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으니 무덤 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묘표 지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한 대목은 이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남명과 황강의 정서적 밀착도와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게 된다. 또한 황강의 모부인 최씨의 인품에 대해서도 두루 이해하게 된다. 남명은 황강과 더불어 이름난 자연을 찾아 유람하기도 했다. 1549년에는 감악산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이때 남명은‘욕천’이라는 시를 지어 '만일 진토가 오장 안에서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고 노래했다. 1558년에는 진주목사 김홍(金泓), 수재 이공량(李公亮, 1500-?), 청주목사 이정(李楨, 1512-1571) 등과 더불어 지리산을 유람하기도 했다. 당시 쌍계사에서 남명이 음식을 잘못 먹어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하자 황강이 시종 남명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해 간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 친밀도의 강도를 짐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날을 함께 자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남명이 황강의 민첩한 일처리에 대하여 칭찬하기도 했다. '우옹(愚翁)이 50년동안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 그 주먹이 메주덩이 같아 황하(黃河)와 황수(湟水) 유역의 천만 리 땅은 비록 수복하지 못하나, 한 번 숨 쉬는 동안에 오히려 일을 하는 방법과 계략을 지휘할 수 있으니 참으로 큰 솜씨라 이를 만하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남명과 황강의 친분이 두텁기는 했으나 책선(責善)의 도리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즉 서로 바로잡아 줄 일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하여 올바른 길을 걷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리산 유람 당시 두어 걸음에 세 번씩 가쁜 숨을 내쉬어야 하므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는 삼가식현(三呵息峴)에서의 일화에서 이같은 사실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황강이 이정의 말을 타고 혼자 채찍을 휘둘러 먼저 삼가식현을 올라 제일 높은 봉우리 위에 말을 세워두고 돌에 걸터앉아서 부채질을 했다. 일행 모두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사람과 말이 땀을 비오듯 흘렸는데 한참 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에 남명이 문득 황강을 질책한다.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은 모르니, 훗날 의로움에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남보다 먼저 하게 될 터이니 참으로 좋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하여 황강은 사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응당 나에게 꾸짖는 말을 할 줄 알았네. 내가 과연 내 죄를 알겠네." 남명의 꾸지람과 그것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있는 황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우도(友道)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남명은 황강의 벼슬살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소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가)는 황강이 고령현감을 그만두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문이우옹환향(聞李愚翁還鄕)’이다. 황강은 1552년(명종7) 3월 9일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에 의해 천거되었다. 당시 이몽량은 '이희안(李希顔)은 재행(才行)이 뛰어나고 효우(孝友)가 독실하여 모친상에 3년 동안 한 번도 집으로 가지 않고 최질을 벗지 않았으므로 중묘조(中廟朝)에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은(謝恩)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문(官門)에 발길을 끊고 의가 아닌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온 고을이 모두 흠모하였다.'면서 천거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이조에서는 7월 11일 명종에게 건의하고, 명종은 7월 26일 장악원 주부를 제수하였다. 이어 9월 12일에는 다시 고령현감을 제수하였는데, 황강이 실제 부임한 한 것은 이듬해 5월경으로 보인다. 이 때 남명도 단성현감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저 유명한‘단성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에 비해 황강은 관직을 마다 않고 나갔으니, 위의 시는 바로 이같은 황강의 출사에 대한 남명의 은근한 풍자가 담겨져 있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지난 1996년 5월 4일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정자다방에서 필자가 채록한 구비설화이다. 제보자는 황강의 종12대손 이남기(李南基, 남·64) 씨였다. 이남기 씨의 증언은 오늘날까지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에는 남명과 황강의 관계가 절친하다는 것, 남명이 황강의 출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 적시되어 있다. 남명과 황강이 절친했다는 것을 남명이 직접 황강의 상여줄을 잡았다는 것으로 제보자는 설명한다. 사실 황강실기에는 '삼족당과 황강의 장사에 내가 이미 그 줄을 잡았고 그 비명을 지었다(天佑愚翁之葬, 吾旣執其 而銘其石)'는 남명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남명이 지은‘처사신군묘표(處士申君墓表)’에서 '발인을 맡았다(執其靷)'고 한 것의 변용 혹은 오기(誤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신의는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남명이 황강의 출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으로는, 황강의 근무지를 남명이 지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 그곳을 부채로 가렸다는 말로 나타냈다.

  낙월옥량(落月屋梁)! 이것은 두보의 싯구 가운데 일부로 벗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벗을 꿈 속에서 만나 즐기다가 깨어보니 벗은 간 데 없고 싸늘한 달빛만 지붕 위를 비추고 있다 함이니 그리움의 심적 정황을 잘 묘사했다. 남명은 황강을 이처럼 좋아하였지만 황강의 출처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고, 그것은 책선지도(責善之道)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황강이 타계하자 남명은 곡하면서 그의 묘갈을 짓기도 했다. 이 글에서 남명은 "그의 효성과 자애,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하는 정성과, 선을 돈독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남을 사랑하고 일에 부지런한 마음은 거의 견줄 데가 없었다. 붙잡으면 주저앉기로는 유하혜(柳下惠)와 비슷하고, 통달해서 알기로는 진동보(陳同父)와 유사하였다. 도를 지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가 구현되기를 바랐지만, 직접 보지는 못한 사람이다. 활쏘기와 말타기의 재주를 겸비하여 무인의 반열에서도 뛰어났다. 마침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그 가능성만 보였으니, 사람들이 아까워하는 바다. 지극한 감정은 꾸밈이 없는 것이어서, 이에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며 탄식하였다. 황강을 향한 남명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남명이 '황강정'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황둔강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것이 궁금하다.

 

  편집자주: 지난 호에 실린 정우락 교수의 [남명문학 현장답사기(20)-함벽루] 마지막 단락에 결락부분이 있어 바로 잡는다. 결락된 부분은 고딕체로 된 부분이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양해를 구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일찍이 스승의 의식 속에 세계에 대한 두 지향이 있으며 이같은 모순은 상호운동에 의해 발전적 세계를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서 스승의 의식구도를 설명한 적이 있다. <함벽루>에서 이것은 요약되어 있는 바, 제1구와 제2구에서 보여주었던 '잃음'의 경계가 제3구의 '부운사'에 의해 전환이 마련되고, 결국 제4구에서 '고풍'을 등장시켜 깨어버리면서 차원을 달리한 현실, 혹은 초월이 내포된 현실로 되돌아 나오는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스승은 유가적 세계를 지녔으되 통상의 유가는 아니었고, 도가적 세계에 관심을 두었으나 흔히 아는 도가가 아니었다. 스승은 장자와 같이 완전한 포기가 완전한 획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방기(放棄)는 이룩하였으나 세상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다른 곳에서 '바람에 떨리는 나무를 생각하고(卽懷風振木), 의리를 지키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생각한다네(曾義寃人)'라며 슬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 나뭇가지가 흔들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화로 죽은 친구들의 목숨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현실의 시비를 잊고 초월적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으나 스승은 마침내 세상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보다 현실의 질서가 더욱 중요하다는 유가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다.

  피(彼)가 있다는 것은 차(此)가 있다는 것이며, 차(此)가 있다는 것은 곧 피(彼)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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