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생평전]

제1장 생애(生涯)
3. 강학(講學)과 자아정립(自我定立) (11)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이 해 겨울에 개암(介庵) 강익(姜翼)이 와서 배웠다. 합천 뇌룡정에서 남명 선생을 모시고 주역을 배우고  두어달 머물고 돌아갔다. 개암의 연보에 보면, 선생께 올린 글에 ,"학력이 점점 뒷쳐저서 장차 속인을 면치 못하겠으니 선생께서 즐겨 가르쳐주신 걸 저버린 죄를 장차 어찌 하겠습니까? 방금 선비들과 함께 《의례》를 읽는데 예가(禮家)의 쟁송을 옅은 소견으로는 능히 밝혀 낼 수가 없습니다. 의심나는 곳을 뽑아내어 선생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나이다." 라고 했는데 이 편지글에 대한 답신은 전하지 않는다. 강익(1523-1567)은 자가 중보(仲輔), 호는 개암으로 본관은 진양이다. 안의(安義)에 살면서 처음에는 당시에 향리 근처에 살던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에게 나아가 배웠고, 이 무렵 남명 선생의 문하에 들었는데 《개암집》이 남아있다.

  남명 선생은 의례에 대하여 일관된 원칙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즉 옛것을 따르면서 당시의 절차를 참고하여 대체를 세워 행하였다. 동강 김우옹은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혼인, 상사, 제사의 예를 모두 가례에 맞추어 따르면서 그 대의만 취하고 자잘한 절차는 다 맞추려 하지 않으셨다. 이로서 옛것을 회복하려는 기틀을 삼으시니 사대부의 집에서 이를 본 받는 일이 많았고 풍속도 따라서 조금씩 변화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한강 정구가 퇴계에게 묻기를 "혼례가 쇠퇴하여 무너진 지 오래여서 아래 사람들은 실로 회복할 수 없었지만 남명 선생께서 옛 것을 참작하고 요즘 것을 참고하여 초혼의 상견례를 거행할 때 친영하는 한 대목을 빠뜨렸을 뿐 그 밖의 남은 절차는 그대로 가례를 따라 좇았다."고 하니, 퇴계가 답하기를 "내 집에서도 그렇게 이미 행하고 있다."고 기뻐하였다.

  죽유(竹) 오운(吳澐)이 산해정에 와서 배웠다. 오운(1540-1617)은 자가 태원(太源)이며 호는 죽유로 고부 사람이다. 함양에 거주하면서 남명과 퇴계의 양문에 들었으며 《죽유집》이 남아 전한다. 조형도(趙亨道)가 죽유를 제한 글에서 "공은 산해당에 올랐고 퇴도실에 들어갔다. 뜻한 바가 정대 하였고 학식이 전일 하였다."고 하였고, 또 조정에서 내린 제문에서는 "학문은 산해를 종주했고 도는 도산을 존모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59세가 되던 해 봄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가 그 장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따라 폐백을 가지고 와서 선생을 뵈었다. 조종도(1537-1597)는 자가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으로 함안인이다. 당시 단성현 소남(召南)에 살면서 남명의 문하에 들고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황석산성에서 순절하였다. 공은 국량이 대범하고 소탈하여 큰 어려움에 처하여도 웃음으로 능히 넘겨 대소헌이라 자호하였다고 한다. 《대소헌집》이 남아 전한다.

  조정에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의 벼슬을 내렸으나, 선생께서는 병으로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5월에 황강 이희안의 상에 곡하였다. 장사날에는 선생께서 또 가서 참례하였다. 황강은 합천인으로 남명과 종유하면서 평생을 가까이 지낸 인물로 자가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으로 《황강실기》가 남아 전하며 향년 56세였다.

  8월에 성주에 가서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을 방문하였다. 김희삼(1507-1560)은 자가 사로(師魯) 호는 칠봉이며 의성인이다. 당시 성주에 살면서 남명과 종유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동강 김우옹과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이 남명의 문하에 들었다. 칠봉의 연보에 "선생께서 공을 진재(進齋)에서 찾아보고 의리의 학문을 강명하고 며칠을 머물다가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칠봉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우홍(宇弘) 우굉(宇宏) 우용(宇容) 우옹(宇)으로 이때 칠봉의 둘째아들인 개암이 선생을 모시고서 학문의 의심나는 곳을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부터 선생의 문하에 들었다. 퇴계 선생이 개암에게 답한 글에서 "평생에 감히 남을 누르고 자신을 드러내며 세상을 깔보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지 못했는데 하물며 성인의 말씀을 훔쳐다가 스스로 뽐내며 감히 다른 사람을 배척하겠는가? 하물며 조 남명을 배척하였겠는가? 옛말에 '흐르는 탄환은 구덩이에서 그치고 헛된 소문은 슬기로운 사람에게서 그친다.'라고 하였으니 만약에 뜬 소문으로 의심이 일어나는 일이라면 슬기로운 사람에게서 그치고 말 것이다. 오늘의 이 말을 어찌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려서야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개암이 퇴계 선생에게 보낸 글에서 남명에 대한 저간의 세상사람들의 어지러운 평판에 대한 변론을 짐작할 수 있다.

  모촌(茅村) 이정(李瀞)이 와서 배웠다. 이정(1541-1613)은 자가 여함(汝涵) 호는 모촌으로 재령인이다. 당시 원당(元塘)에 살면서 남명의 가르침을 듣고 임진란에 거의(擧義)하고 《모촌집》이 전한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아우 숙(潚)과 함께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고 덕천서원이 병화로 소실되자 진극경(陳克敬) 하징 등과 중창할 것을 꾀하여 그 유지를 정비하였다.

  선생께서 60세가 되던 해(경신년)에 부실에게서 아들 차정(次)이 태어났다. 차정은 월송(越松)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경덕궁위장 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일신당(日新堂) 이천경(李天慶)이 와서 배웠다. 이천경(1538-1610)은 자가 상보(祥甫), 호가 일신당으로 합천 사람이다. 단성에 살았는데, 《일신당집》이 남아있다.

  칠봉 김희삼의 상에 곡하였다. 공은 중종 정묘년에 태어나서 신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자년에 등과하여 삼척부사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공의 죽음에 남명 선생은 만시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옛친구 삼백리길에, 생각해 보니 그대 어느 곳에 들어 쉴 것인가?"라고 애석해 하였다. 남명은 10년 뒤 칠봉의 딸인 〈의성김씨묘지〉를 지으면서 두 가문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물을 평가하는 나름의 기준을 말하였다.

  칠봉과의 통혼으로 두 집안이 서로 맺어진 관계를 말하고 있다. 두 집안은 이와 같이 남명의 수문인인 동강이 선생의 외손서가 되며, 또 선생은 칠봉의 딸인 의성김씨 부인의 묘지를 짓기도 하였다. 남명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가감이 없이 그 사람됨을 드러내고자 하였는데, 특히 고인이 된 사람의 묘지나 묘표를 짓는데 있어서는 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직절(直截)한 문자로 간명하게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미루어 보면 남명의 인물됨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결코 사람을 온전히 평가하는데 한치의 허튼 문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강직한 정신을 알 수 있다.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와서 배웠다. 김면(1541-1593)은 자가 지해(志海) 호가 송암으로 고령사람이다. 고령에 살면서 이때 남명의 문하에 들었고 퇴계의 문하에도 들었다. 임란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군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도암사(道岩祠)에 향사 되었다. 공은 약관에 남명 선생을 따라 배웠으며 경의의 학설을 들었다. 뒤에 《송암실기》가 남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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