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글터]

국제신문 특집
‘남명을 따라서’취재기

박 동 필
국제신문 기자

 

  조선시대 중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뤘던 영남 사람학파의 거두. 칼과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제자들에게 경,의와 출처관을 가르쳤던 교육자. 필자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남명 조식선생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들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선생의 면모를 모두 안다고 할수 없을 것이다.

  요즘 도올 김용옥이 TV를 통해 옛 성현들의 말씀을 강의 중에 있어 세간에는 복고풍이니 전통학문이 되살아나고 있느니 야단법석들이다. 필자가 단언컨대 도올이 끼친 공로는 일반인들이 평소 접근하기 어려웠던 공맹이나 노자의 세계를 알기 쉽게 소개했다는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의도는 최근 부산 <국제신문>에서 매주 금요일 연재 중인‘남명을 따라서’의 기획의도 와도 자연스럽게 맥이 닿아 있다.

  선생 탄신 500주년 기획물이라는 타이틀로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이 선생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심오한 학문의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필자로서는 시리즈 연재를 한답시고 감회를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부끄러움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불가피하게 독자를 계도해야할 필자부터 선생에 대해 아는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 죄책감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데스크로부터 연재물 기사를 작성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가라는 말을 듣고 버럭 겁부터 났었다.

  그나마 필자의 고향이 선생께서 말년을 보낸 사륜동(산청 덕산)이어서 평소 흠모 해온 터에 선생의 진면목에 접근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그나마 용기를 내게 한 원동력이었다.

  물론 평생을 남명학 연구에 헌신해오신 분들에 비하면 수박겉핥기식이 되겠지만 말이다.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양팔을 걷어부치고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으나 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속된 말로 기사를 쓰는데 도움이 될 영양가 있는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터넷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남명학연구원 등 관련 학계나 문중 등을 통해 자료확보에 나섰다.

  데스크와 회의를 거쳐 시리즈 제목을‘남명을 따라서’로 정하긴 했으나 준비과정에서 우여곡절도 있었다.

  당초 6~7명에 달하리라던 취재팀은 필자를 포함, 2명으로 줄었다. 성리학 세계를 논하는 분야인 만큼 소수인력이 매달려야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고 내용 중복도 막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 1월1일부터 연재를 시작해 벌써 횟수가 10회가 넘었다.

  그 동안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다리품을 팔거나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원고 마감시간에 쫒기다 보니 일주일도 번개처럼 지나갔다.

  연재 횟수가 늘수록 앞서 나갔던 내용들이 부실했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필자의 부족한 노력과 무지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연재는 우선 남명이 기거했던 유적지 소개를 중심으로 뼈대가 이뤄졌다. 남명이 말년을 보냈던 산천재, 묘소, 여재실에 이어 후학이 지은 덕천서원, 세심정이 다뤄졌으며, 고향인 합천 뇌룡정 생가터,  마지막으로 선생이 18년을 산 처가가 있던 김해 산해정까지 보도해 유적지편을 마쳤다.

  남명이 생시에 산청 합천 김해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를 싣고, 간혹 퇴계의 남명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유도했다.

  이런 부분들이 대학자 남명을 조명하는데 접근방법면에서 학자들과 분명 다른 점이다.

  필자는 단순히 기록에 의존한 남명학 세계를 미주알 고주알 따지기 보다 선생의 발길이 머물렀던 많은 흔적들에 주목했다.

  대학자의 난해한 학문세계를 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한 시대를 고뇌하며 살다간 당대 최고 지성의 인간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산청 합천 김해 등 남명의 유적지에 이어 최근 연재중인‘남명의 흔적편’은 그래서 중요하다.선생이 고향 합천서부터 처가인 김해 말년을 보낸 산청에 머물면서 유명 계곡이나 사찰 등을 찾아다니며 많은 시를 남겼기에 이같은 작업이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필자는 실제로 이름없는 계곡이나 폭포수 아래에서 400년 시간의 벽을 넘어 선생의 채취를 고뇌를 마음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이 중 합천에 있는 누각인 함벽루는 선생이 노장사상에 젖어있다 성리학의 세계로 각성하는 경험을 담을 시를 지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함벽루에 올라 도도히 흘러가는 황강을 황망히 바라보면 누구라도 시 한 구절 아니 노래 한 소절을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제자들과 목욕을 한 뒤 욕천이라는 시를 썼던 거창 신원 가매소는 지금은 도로가 나고 경관이 퇴색했지만 선생의 기상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안성맞춤인 곳. 산청 단속사에서 발견한 수령 6백년의 매화나무(정당매)를 통해서는 선생의 엄격했던 출처관을 엿보는데 그만인 매개체다.  매화를 심은 주인이 고려~조선조까지 벼슬을 했다해서 지조 잃은 사람으로 보고 그를 나무라는 시를 썼음은 물론이다. 임금이 하사한 벼슬마저 때가 아니라 해서 마다했던 선생이 아니던가.
선생은 벗들과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남긴 여행기인‘유두류록’에서도 특유의 출처에 입각한 잣대를 들이댄다.. 배를 타고 섬진강을 지나갈 때 지금의 악양에 위치한 바위를 보고 고려 때 주변지역에서 살다 임금이 준 벼슬을 마다한 한유한을 그리워하는 게 그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쌍계사를 지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불일폭포 옆 청학동을 찾아가 비상하는 청학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우주를 희롱할 선생의 내면세계를 느끼게 된다.이른 모습이 퇴계쪽으로부터 노장에 물들었다는 비판 아닌 비판을 받은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필자는 남명의 제자들 등 다양한 읽을거리를 기사화해 독자들이 한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다간 대학자의 정신세계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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