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생평전]

제1장 생애(生涯)
3. 강학(講學)과 자아정립(自我定立) (10)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을묘사직소를 조정에 올린 후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진양인 하응도(河應圖, 1540~?)가 와서 배웠다. 그의 자는 원룡(元龍)이고 호는 영무성(寧無成)으로 중종 경자년에 나서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인품이 탁 트여 소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氣宇軒 不拘小節) 계사년에 진양성이 무너진 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판관이 되었고, 뒤에 능성과 예산현감이 되어 치적이 있었다. 죽고 나서 진주 대각서원(大覺書院)에 향사되었다. 남명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4년 병자년에 최수우당, 하각재 등 제현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건립하는데 힘썼다.

  선생께서 56세가 되는 해, 하락(河洛)과 그의 아우 하항(河沆)이 와서 배웠다. 하락은  자가 도원(道源)이며 호가 환성재(喚醒齋)로 진양사람이다. 중종 경인년에 나서 무진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장원을 하였다. 뒤에 왕자 사부로 천거되었다. 남명선생에게서 심경 근사록을 읽었고 선생의 경의지학의 가르침이 해와 별처럼 빛났다.

  하항은 자가 호원(灝源)이고 호는 각재(覺齋)로 중종 무술년에 났다. 정묘년에 생원시에 들었고 참봉을 거듭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 기축년 다수의 선비가 피화되자 동문인 수우당 최영경의 억울함을 구하고자 힘썼으나 이루지 못하여 평생을 마치도록 이를 한탄하였다.

  각재 하항(1538-1590)은 진주 수곡리(水谷里) 사람으로 대각마을 각봉(覺峰)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각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공은 말년에 옛 거처로 돌아가 사는 집을 '내복당(來復堂)'이라 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남명선생을 산천재에서 찾아뵙고 제자로서 집지의 예를 다하였다. 선생은 그의 재주와 학문에 뜻을 둔 바를 매우 사랑하여 소학 근사록 등의 공부를 할 것을 권하였으며 공은 이로써 위기지학에 전심하였다.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의 예를 하였고 뒤에 덕천원장이 되었고 산해연원록을 찬하였으나 임진란의 와중에서 실전하였다.
  사호(思湖) 오장(吳長)이 지은 각재의 봉안문에,

 "해동의 한 쪽 나라에 대도(大道)가 막히어서 삼천년을 내려오며 보고 듣는 것이 우매하였다. 하늘이 근심하여 남명선생을 낳으시니 거친 물결에 지주(砥柱)로서 해와 달처럼 드높았다. 당시에 급문(及門)한 사람이 제각기 분수에 따라 훈도의 은혜를 입었다. 실질공부에 근독하여 도에 가깝고 멀지 않았다. 스승의 가르침을 얻음이 두터우니 바로 공(각재)이시다. 정량(貞良)하고 경의를 따랐으며 효제충신의 행실을 두루 갖추었다."고 하였다.
  각재는 늘 말하기를,
   "내가 지금 병이 깊어 혼미할 때라도 남명선생께서 문에 들어와 앉으시면 매양 아픔이 몸에서 떠나 정신이 되살아남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그는 선생의 가르침에 평생을 마치도록 심복하였다.

  선생께서 57세가 되던 해, 정사년 부실인 은진 송씨에게서 중자(仲子)인 차마(次磨)를 얻었다.

  대곡 성운(成運)을 찾아 옛날에 배운 것을 강론하였다. 대곡은 당시 보은 속리산 밑에 숨어 살았는데, 이때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이 고을 원으로 있으면서 방문하여 같이 여러 날을 보냈다. 선생께서 돌아오려고 하자, 대곡이 작별차 계당(溪堂) 최흥림(崔興霖, 1506-1581)의 금적정사(金積精舍)에 왔다.

  계당은 화순인(和順人)으로 자가 현좌(賢佐)이며 대곡의 문인으로 보은에 금적정사를 지어놓고  이 때 남명과 만나 학문에 대하여 강론하며 노닐었다. 뒤에 계당유고를 남겼으며, 남명집에는 그에게 준 오언시가 남아있디.

<최현좌에게 줌>

안개와 구름 낀 금적산 골짝에서
그대 만나니 두 줄기 눈물 흐르네.
그대 뼈에 사무치는 가난이 가련하고
내 머리칼은 온통 눈빛이라 한스럽도다.
푸른 나무엔 막 비가 지나갔고
노란 국화는 바로 가을을 만났구나.
산에 돌아와 환한 달을 끌어 안고서
혼과 꿈을 한가함에다 부쳤다네.

<贈崔賢佐>

金積烟雲洞 逢君雙涕流
憐君貧到骨 恨我雪渾頭
碧樹初經雨 黃花正得秋
還山抱白月 魂夢付悠悠

  대곡의 청에 의해 금적정사에서 남명은 여러 문도를 모아놓고 왕도와 패도의 취사(取捨)에 대한 학설을 강론하였다. 작별을 할 즈음, 대곡이 시를 지어, "어찌 천리 이별을 견딜 것인가, 아직 백년 회포도 풀지 못하였는데" 라고 아쉬워 하자 남명선생께서 이에 화답하여 오언시를 남겼다.

<건숙의 시에 화답하여  금적산 서재에서 최현좌에게 줌>

금적산을 다 둘러 보고서
물길 가까운 제일 좋은 곳에 자리 잡았네.
지대가 높아 뭇 것이 아래에 있고
정신이 고원한데 한 조각 혼이야 시름겹다네
그대 집 아들은 점잖디 점잖고
내 벗의  배를 부르고 부른다.
이내 회포 그리지 못하니
날이 갈수록 정말 아련하리라.

<和健叔呈崔賢佐于金積山齋>

踏破金華積 源頭第一流
地高군下衆 神遠片魂愁
鄭鄭君家子 招招我友舟
此懷模不得 來日正悠悠

  성동주는 미리 전송하는 자리를 중도에 마련하여 손을 맞잡고 작별하기를, "군과 내가 모두 중늙은이라 각기 다른 고을에 살고 있으니 다시 만나기를 어찌 기약할 것인가"라 하고, 이듬 해 8월 15일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듬해 약속한 날에  큰비가 연일 퍼부었으나 선생께서 비를 무릅쓰고 산문에 당도하니 공이 이미 당도하여 젖은 옷을 벗고 있었다고 한다.(덕천사우연원록)

  성동주는 자가 자경(子敬)이며 이름은 제원(悌元), 동주는 호이다. 창녕인으로 중종 병인년에 났으며 서봉(西峰) 유우(柳藕)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을 제수 받았고 치적이 높아 읍민들이 생사당에 모셨다. 공주 충현사, 보은 상현사, 창녕 물계서원에 향사되었다.

  남명집에는 증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성동주에게 줌>

조그마한 고을이라 볼 사무도 별로 없어
때때로 술 취한 세계에 들 수 있었다네
눈에 완전한 소가 보이지 않는 칼 솜씨를
어찌 닭을 잡다가 상하겠는가.

<贈成東洲>

斗縣無公事 時時入醉鄕
目牛無全刀 焉用割鷄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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