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문학 현장 답사기(19)- 행단기

                               

정 우 락
영산대 교수

인간의 지성은 열정의 지성이다. - B. 디즈레일리

  스승의 <행단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부조리한 시대의 횡포 앞에서 고뇌하는 지성, 공자의 그 슬픈 몸짓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으로 불의의 권력이나 금력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비루하고 나약한 우리 시대의 수많은 가짜들에 대한 연민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스승은 험난한 시대 앞에서 고뇌했던 사나이 공자, 그의 슬픈 몸짓을 그리워하며 <행단기>를 지었다. 이 글에서 스승은 공자가 진실과 진리 편에 서서 정의의 칼을 담금질해 나가던 힘든 노력과 그가 천하의 성인이 될 수 있었던 사실을 강조한다. 이 글이 상상에 기반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기(記)'의 형식을 취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기'는 기사문(紀事文)을 말하는 것이니 사물에 대한 사실이나 관찰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스승이 <행단기>를 집필한 기본태도를 읽을 수 있다. 즉 <행단기>가 한낱 상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지금부터 스승이 그린 공자의 강학풍경을 엿보기로 하자. 스승은 행단이 오래 전 노나라 대부였던 장문중(臧文仲)이 쌓았고 또 그에 의해 그렇게 이름 붙혀졌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공자가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가 되었다. 어느날, 공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 계로(季路), 안연(顔淵) 등과 함께 이 단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안연을 돌아보면서 탄식하고 이 단의 이름과 설치 이유를 설명했다. 행단은 장문중이 쌓았으며, 중원(中原)의 여러 제후들이 회맹(會盟)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거문고를 뜯으며,“더위가 가니 추위가 오고, 봄이 감에 다시 가을이 오네.”라며 쓸쓸히 노래하였다. 이에 총명한 제자 안연은 스승 공자에게로 나아가 두 번 절 하고 글을 짓는다. 이를 장문중과 스승 공자의 경우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장문중의 경우

 나. 공자의 경우

  'A'는 행단에서의 행위를, 'B'는 그 행위에 대한 효과를, 'C'는 최후의 평가를 나타낸 것이다. 장문중은 '가-A'와 같이 행단에서 여러 제후들과 회맹하면서 군대의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가-B'와 같이 땅에 떨어진 주나라 왕실의 권위를 되돌려 놓지 못했고 오랑캐의 침략 역시 늦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안연은 주공의 위엄을 빙자하여 제후를 속인 짓이라며 장문중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장문중은 '가-C'처럼 한 나라의 대부에 지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공자는 '나-A'와 같이 행단에서 도학을 강론하고 의리를 창도하여 천리의 공명정대함을 밝혔기 때문에 '나-B'와 같이 안으로 사람들이 왕실을 업신여길 수 없었고, 밖으로 중국이 오랑캐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나-C'와 같이 천하의 성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문중과 공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안연은 이를 정치형태에서 찾았다. 장문중의 패도정치와 공자의 왕도정치가 그것이다. 패도정치는 인정(仁政)을 가장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장문중은 유하혜(柳下惠)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고, 행단에서의 회맹을 통해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고 포악하게 굴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왕도정치는 인의(仁義)의 덕이 안으로 충실하여 그것이 선정으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공자는 행단에서 인(仁)에 기반한 강학활동을 전개하면서 전통문화를 정리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장문중의 이익(利益)을 위주로 한 행단활동과 공자의 의리(義理)를 위주로 한 행단활동은 그 결과에 대한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난다고 하면서, 안연은 이치가 이렇게 자명하니 후세의 선비들은 무엇을 본받아야 할 것인가를 따져 물었다. 그리고 행단을 쌓은 것도 장문중이고 그렇게 이름붙인 것도 장문중이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 행단을 '장씨의 단'이라 하지 않고, '공씨의 단'이라 할 것이라며 말을 덧붙혔다. 남명집 중 행단기의 일부분

  여기서 안연은 공자의 탄식과 “더위가 가니 추위가 오고, 봄이 감에 다시 가을이 오네.”라는 노랫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단을 바라보면서 한 공자의 탄식은 그 단을 쌓은 장문중을 사모해서가 아니라 장문중이 왕도정치를 보좌할 만한 재주가 없었던 것에 기인하며, 세월의 흐름을 노래로 안타까워 한 것은 흘러 가는 세월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세에 이 행단에 오르는 사람이 공자의 이같은 탄식과 시간에 대한 절박감을 감지할 수 있을까 하면서 안연이 글을 마치자, 계로가 일어나서 노래로 요약해 주었다. “평평한 이 단에는(壇之町町), 군자가 살지만(君子之居), 더러운 저 들판엔(穢之野兮), 우리 도가 미약하구나(吾道之微), 누가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꼬(誰將西歸), 좋은 소식을 품고서(懷之好音)?”가 그것이다. 공자의 강학이 이루어지고 있는 행단과 더러운 저 들판으로 표현된 부조리한 정치현실, 그리고 왕도정치를 다시 실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탄식의 형태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에 공자는 "그래"라고 말하며 계로의 노래에 응답할 뿐 말이 없었다.

  이같이 스승이 <행단기>를 지어 공자의 강학풍경을 상상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공자가 살았던 시대상황과 스승이 살았던 16세기의 시대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공자의 탄식을 통해 자신의 탄식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16세기의 현실은 정치적으로는 사화가 일어나 현인들이 목숨을 잃고, 남북에서 이민족이 끊임없이 침입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잦은 부역과 공물이 천재지변과 겹치면서 민중들은 유리하게 되고 침탈에 견디지 못한 민중은 도적이 되어 저항하게 된다. 이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이론위주의 학문에만 골몰하였다. 그러니까 16세기의 조선현실은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은 여기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며 <행단기>를 지었던 것이다.

  <행단기>의 창작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남명학 전체에서 이 작품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자. <행단기>는 (1) 스승의 사물관(事物觀)이 잘 나타난다는 점, (2) 천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 (3) 우의적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 (4) 기문 서술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 (5) 바람직한 교육목표와 방법 등을 제시한다는 점 등에서도 중요하다. 앞의 둘이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다음의 둘은 형식에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의 것은 이 둘을 통한 실천적 측면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스승의식의 한 단면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자.

  첫째, <행단기>에는 스승의 사물관이 적기되어 있다. '도물사인(睹物思人)'이 그것인데, 이는 사물을 보면서 그 사물과 관련된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스승이 공자의 입을 빌어 한 발언이다. 공자가 행단을 보면서 사물을 봄에 사람을 생각하게 되나니 느낌이 없을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사물에 대한 스승의 기본적인 태도라 하겠는데, 1558년 4월에 이루어졌던 지리산 기행을 마치고 <유두류록>을 남기게 되는 데 여기에 좋은 예가 있다. 당시 스승은 이 여행을 통해 역사적 인물 여럿을 만난다. 한유한(韓惟漢)·정여창(鄭汝昌)·조지서(趙之瑞)가 대표적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모두 사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악양현을 지나면서 강가의 삽암을 보고 한유한을 생각하게 되었고, 정여창이 살던 옛 집터를 보면서 또한 그를 생각하였으며, 정수역(旌樹驛) 객관 앞에 있었던 정씨 부인의 정문(旌門)을 보면서 조지서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삽암' '정여창의 옛 집터', '정문'이라는 '사물(物)'을 보면서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라는 '사람(人)'을 생각하게 되는 '도물사인'이라는 스승의 사물관을 분명히 읽게 된다. 이같은 사물관이 스승의 작품집에는 도처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스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인식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둘째, <행단기>에는 스승의 천명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안연이 기록한 기문 가운데, “아아! 문중이 이 단에 이르러 맹약할 때는 주나라 왕실의 위엄이 허물어지기 전이었지만 이를 구원할 수 없었고, 선생(공자)께서 이 단에서 감상을 일으키신 때는 주나라 왕실이 이미 어지러워진 뒤이건만 이를 바로잡고자 하셨으니, 시대의 행·불행(幸·不幸)과 세상의 치·불치(治·不治)는 천운이리라”고 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운은 천명이라는 말로 환치가 가능한데, 성인인 공자가 주나라 왕실이 어지러워진 뒤에 태어나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시대가 불행(不幸)하여 결국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았다(不治)는 것이다. 물론 스승의 천명에 대한 인식이 <민암부>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천-군-민'의 역동관계에 입각한 경우도 있지만, 시대의 부조리로 인해 발생하는 능력있는 자의 불행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지리산 유람을 통해 정여창에게 느낀 감회에서 이같은 사실을 약여하게 드러난다. 즉 정여창이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의 실마리를 마련하였지만 결국 연산군 치하의 불행한 시대를 만나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천명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논리는 <누항기>에서의 안연, <엄광론>에서의 엄광에게도 적용되던 일관된 것이었다.

  셋째, <행단기>에는 우의적 기법이라는 작품의 창작원리가 제시되어 있다. <행단기>는 분명히 스승이 창작한 작품이지만, 스승은 안연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서술기법 자체가 있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라 있었을 법한 것에 대한 가상의 세계를 우의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같은 우의적 태도를 취한 것일까? ≪장자≫ <잡편> 우언(寓言)에 “우언의 십분의 구는 공평한 자료를 빌어 예기하는 것이다. 친부모가 자식을 위해 중매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이 칭찬하는 것보다 설득력과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스승은 스스로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하여 공자의 생각과 안연의 기록을 빌리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스승이 즐겨 읽었다고 하는 ≪장자≫는 거의 이같은 기법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과 우언소품(寓言小品)에 뛰어났던 유종원(柳宗元)의 고문을 스승이 좋아했던 점을 상기시킬 때 <행단기>에서의 우의를 활용한 기술방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밖에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의 기록으로 가탁한 <누항기>나 <신명사명>을 지어서 그것에 바탕하여 김우옹에게 심성을 의인(擬人)한 <천군전>을 짓게 했던 사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넷째, <행단기>에는 '기'의 새로운 기술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 작품은 행단의 유래에 대해서 공자가 간단히 설명한 서사, 장문중과 공자의 행단에서의 역할을 길게 서술한 안연의 본사, 앞의 글을 요약하며 노래로 시대를 슬퍼한 계로의 결사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글은 한 편이지만 세 사람이 서사와 본사, 그리고 결사를 나누어 서술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며, 이 세 사람을 대표하여 안연이 기록하였다고 했다. 기문을 짓는 기본적인 태도는 순수한 사실과 사건의 기술에 있다. 궁실이나 누각이 세워진 내력, 산수의 유람, 일기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일록(日錄) 등이 대체로 그러하다. 물론 여기에는 작가의 소감이 상상력과 결부되면서 사실의 기록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훨씬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행단기>와 같이 입론자체가 상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기'의 흔한 서술방식이 아니다. 갈천(葛川) 임훈(林薰)의 <누항기>나 <용문기> 등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바 아니나 이것은 일반적인 기술태도라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스승이 지은 다른 작품 즉 <영모당기>, <함허정기>, <삼우당문공묘사기> 등과 달리 이 작품은 <누항기>와 함께 그 형식의 측면에서도 특기할만 한 작품이라 하겠다.

  다섯째, <행단기>에는 바람직한 교육목표와 그 방법이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논어≫의 소위 '사과십철(四科十哲)'에 근거할 때 이 작품에는 스승 공자와 함께 덕행에 뛰어났던 안연(顔淵), 정치에 일가견이 있었던 계로(季路), 그리고 문학에 남다른 장기를 소유했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함께 등장한다. 이 가운데 공자는 안연을 보고 행단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안연은 거기에 따라 글을 지었으며, 계로가 시대를 향하여 가슴 아파하는 노래를 불러 공자의 수긍을 얻어냈다. 문학에 능했던 자유와 자하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스승이 안연과 같이 덕행을 가장 중시했다는 점과 계로와 같이 정치현실을 직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소극적이었다는 점 등을 두루 이해하게 된다. 이로 볼 때 스승의 교육목표는 안연과 같은 덕성을 기르는데 있었다 하겠다. 이와 아울러 문답식 수업방법과 학습점검에 있어서의 개별화 방법 역시 <행단기>는 보여준다. 즉 단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질문과 그 가르침, 여기에 기반한 안연의 조리있는 산문적 진술, 그리고 계로에 의한 내용의 운문적 요약과 현실에의 적용 등 스승의 가르침과 그것에 대한 글과 노래를 통해 점검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학습자의 이해도를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나는 공자의 행단 앞에서 아찔함을 느꼈다. 스승이 가진 사물을 향한 인식의 철저성 때문이었다. '도물사인'의 사물관을 공자의 입을 통해 제시하고, 거기에 입각하여 스승은 다양한 진실을 깊이 있게 보여주었다. 인의가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에서 시작하여 교육방법은 어떠한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의미있는 메시지를 나에게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나의 실천을 되돌아보면 더욱 아찔하다. 감성의 푸른 바다로 밀려오는 검은 구름 이것은 무엇이며,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얼음벽의 강고한 이성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날 나는 노벽(魯壁)을 돌아나오며 창자를 곧게 만들었다. 어젯 밤 나에게 엄습한 주마(酒魔) 때문이었다. 하여 송준식 교수는 나에게 직부(直阜)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 곡부(曲阜)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름에 대해서 나는 애정을 느낀다. '부(阜)'를 '부(夫)'로 바꾸면 '직부(直夫)'가 되는데, 이는 나의 안일한 삶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하나의 비수가 된다. 내 게으름의 뿌리를 향해 던져지는 시퍼런 칼날, 거기서 나는 시원함이 느껴진다. 혼곤한 취기 속에서 흩날리는 칼날, 하얀 새바람으로 일어나는 그 시원함 말이다.

  1999년 7월 27일 하오 9시. 북경에 도착한 우리는 '경서대하(京瑞大廈)'에서 묵었다. 거기서 TV를 통해 '파룬궁(法倫功)' 문제로 현재 중국이 뜨겁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 인민일보(人民日報)에서도 열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중국 민정부(民政部)에서 파룬궁(法倫功)을 불법조직으로 판단, 그 주요인사들에 대한 감금조치, 이로 인한 파룬궁 수련자들의 항의시위, 민정부의 탄압, 인권을 문제삼은 서방언론 등 일련의 사건들이 급류를 타고 있었다. 파룬궁은 심신을 수련하는 행공(行功)으로 리홍즈(李洪志)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39개소의 총부(總部), 1,900개소의 보도부(輔導部), 28,263개소의 수련장을 갖추고 있는 대규모 조직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경제체제의 도입과 더불어 발생한 수많은 시아깡(下崗), 즉 실직자들이 이 수련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시아깡 현상은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각종 사회적 범죄, 그러니까 실직 여성들의 매춘, 백주에 칼로 돈을 강탈하는 행위 등은 이 시아깡현상과 비례관계에 놓인다. 이 과정에서 민정부는 파룬궁을 사교(邪敎)로 단정하며 탄압했고 파룬궁 수련자들은 여기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TV토론에서도 거론된 것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이론적 바탕인 유물론과 파룬궁의 유심론 사이의 대립일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서 심각한 정치·사회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78년 개혁과 개방정책 실시 이후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했던 수 많은 부정적 요인들, 그것이 급기야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중국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수록 중국은 공자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한다. 500년전 먼나라 조선의 한 처사적 지식인이 문제를 제기하였듯이 인의에 기반한 왕도정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경제적 성장에 따라 잃게 되는 수많은 정신적 가치들, 여기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인문과학이 목졸려 숨을 파닥이는 오늘날, 이 위기적 현실 앞에서 나는 이 시대의 지성인을 떠올린다. 진정한 지성인은 자본의 논리에 눈이 먼 수많은 군상들과의 값싼 타협을 거부한다. 사물을 자신의 냉철한 눈으로 비판하는 철저한 자유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관례와 현재의 사상체계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단자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지성인은 그 고독을 감내하며 인간 개개인에게 꾸준히 건설적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 위에 있다. 지성인임을 자부하는 그대는 지금 어디서 잠자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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