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생평전
제 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9)
이 상 원
본원 연구위원
선생께서 53세 되던 해 퇴계 선생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은 퇴계 선생과는 평생에 만난적이 없으나 왕복 서간을 통하여 마음으로 사귀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54세 되던 해, 개암 강익(1523-1567)이 와서 배웠다. 개암은 자(字)가 중보(仲輔)로 본관은 진양이며 원래 안의에서 당곡(唐谷) 정희보에게서 배우고 나중에 선생에게 나아가 배웠다. ≪개암집≫이 남아 전하고 있다. 평소에 선생은 그를 깊이 허여한 것으로 보인다. 학문을 강론할 때, 선생께서 학자들이 끝까지 성공하는 이가 드물다고 하면서 공을 일러, "진실로 서로 믿어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자네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선생께서 그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국가에 환란이 곧 닥칠 것임을 지적하고, 이에 대비할 것을 견책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숨어 살지만, 항상 무거운 허물을
지고서 날마다 명백한 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만간 환란이 닥칠 것 같아
항상 맨몸으로 달아나고 싶은데, 그러하지도 못하고 세월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공들과 같은 사람은 평지 위에서 마음대로 지내고 있으니, 어찌 평탄하지 않겠습니까.
윗사람을 속인 죄가 바로 나에게서 나왔으니, 여러분이 힘써 구제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중보 등에게 답한 글에서-
선생께서 55세가 되던 해, 2월에 송암 박재현(朴齊賢, 1521-1575)과 황암 박재인(朴齊仁, 1536-1618) 형제가 와서 배웠다. 그들은 경주가 본관으로 함안에서 살면서 이 때에 남명의 문하에 들었다. 형인 송암은 자(字)가 맹사(孟思)이며 ≪송암집≫이 남아 전하며 아우인 황암은 자(字)가 중사(仲思)로 ≪황암집≫이 남아 전한다. 송암은 유일로 천거 되어 선공감 감역을 지냈으며,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하고서 심상을 지냈다. 선생의 삼가 토동 옛집을 지나면서 선생의 남은 유풍을 그리워하는 5언시 한구를 남겼다.
이 해 10월에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11월 19일 소를 올려 사임하였다. 일명‘단성소’라고도 불리는 <을묘사직소>는 남명의 현실 인식과 산림처사로서의 기상을 살필 수 있는 보기 드문 명문이다. 을묘사직소에서, 선생은 우국애민하는 선비의 전형으로서 천둥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조정에 대하여 서릿발 같은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버렸으며, 민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렸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되고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 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 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 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우선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직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중략)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생겨 여러 대부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지만, 저는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이십 년
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서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니,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백성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장수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어서,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이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은 마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도 엄하여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재앙으로 송나라에 더해진
꼴이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지나지 않아서 가슴과
배의 통증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가슴과 배의 통증이란 걸리고 막히어 위 아래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공경대부가 목이 마르고 타들어 가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상에서 보인 바와 같이 <을묘사직소>는 <민암부>와 더불어 남명의 경세가로서의 사상과 도저한 처사정신을 살필 수 있는 글로서, 글의 내용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때 이미 선생께서는 다가올 환란과 백성의 곤궁한 삶에 대한 현실을 인식하여 문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준비하고 올바른 공부를 위하여 경계하고자 면려하셨다. 이러한 선생의 교육사상은 훗날 임진란을 당하여 문하에 의병 활동을 하는 다수의 문인을 배출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소가 조정에 들어가면서, 당시의 문정왕후를 과부라 하고 명종을 고아라 지칭한데 대하여 일대 파문이 일면서 진노하였다. 이에 당시 정승으로 있던 심연원(沈連源)과 상진(尙震)이 송사기(宋史記)에 있는 구양수의 언론을 증거로 들어 무마하게 되었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당시에 간사한 권신들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문정왕후를 잘못 인도하여 사림들의 기운을 꺾었다. 비록 공론을 빙자하여 (선생을) 유일로 천거해 살도록 하였으나, 다만 이것은 헛된 문서일 뿐이고 실상은 이러하지 아니 했으므로 조모(曺某)가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이내 소를 올려 사직하고 겸하여 당시의 폐정을 개진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