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

기고봉과 월봉서원

한  상  규
동주여대 교수

  학문세계

기대승 고봉(奇大升 高奉)선생은 1527년(중종22)-1572(선조5)간 생존한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이다. 고봉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아버지 진(進)과 어머니의 강씨(姜氏, 姜永壽의 딸)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무렵 조선사회는 기묘사화 이후 사류들이 정치일선에서 후퇴하여 향리서 독서와 교학으로 학문적 바탕을 두텁게 형성한 시기로 선생의 이부 기준(李父 奇遵, 1492-1521)이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와 뜻을 같이한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고 있었으므로  고봉의 초년 세계관은 남다른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더욱이 19세기 때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를 목격하면서 학자와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25세 때 알성급제하였으나 기묘명현의 집안이라 하여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취소되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다가 32세 때 다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나아갔다. 이때 마침 퇴계가 조정에 있어서 그를 만나고 나서 이듬해 3월부터 성리학을 논도하기를 서신으로 8년간 교환한 것이 소위‘사칠논변(四七論辯)’이다. 그리하여 8년만에 퇴계는‘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이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라하고, 고봉은‘이발이기구(理發而氣俱)’ ‘기감이이승(氣感而理乘)’이라하여 일치점을 보였으나 고봉은 사물이 생성되는 소이연이 이(理)라고 보고 기(氣)의 주재가 된다고 하였다. 그후 고봉은 퇴계의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에 반대하여 사단칠정이 모두 정(情)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중기감설(情發理重氣感說)을 주장한 주기설(主氣說)로 퇴계의 주리설(主理說)에 맞섰다. 고봉의 이러한 학문적 영향은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1)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만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하여 토론하고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을 찾아 천명도설(天命圖說)에 관하여 논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성리학 탐구에 들어갔다. 한편 관직으로는 선조 5년 대사성의 명을 받고 곧이어 대사간직에 임명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해 5월과 9월 두 차례 사직하고 귀향하던 중 태인에서 병이 위독하여 11월 1일 향년 46세로 졸하였다. 이듬해 2월 8일 나주 송현산(通峴山)에 장례를 하였다. 선조 11년 약암(樂庵)밑에 사우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선조 23년 광국공신(光國功臣)과 이조판서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成均館事), 봉덕원군(封德原君)에 추증되었다

.월봉서원

  월봉서원

서원은 광주시 광산구에 소재하고 있다. 1575년(선조8)에 김계휘(金繼揮)등이 중심이 되어 고봉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詞)를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1646년(인조24)에 현재의 위치에 이전 1654년(효종5)에‘월봉(月奉)’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671년 박상(朴祥), 박순(朴淳)을 배향하고 1673년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 철폐되고 1938년부터 점차적으로 건물을 신축하여 현재 전남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있다. 서원내부로 강당 한 가운데 서원의 편액이 있고, 내삼문(內三門)을 통하여 강당뒤편 돌계단을 올라 사우에 가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보이는데 편액은 승덕사(崇德詞)이다. 이곳에 현재 고봉만을 모셔 놓았다. 강당옆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이 안에는 고봉의 저술 판목과 유품이 보관되었으며 고봉의 문집은 종가댁에서 보관중이다. 문집 15책은 고종11년(1907)에 고봉의 11대손 동준(東準)등 일족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 외 동재(尊省齎)와 서재(明誠齋)는 근래 새로 지었다. 서원 아래에 칠송정(七松亭)이 단초롭게 자리잡고 있다. 고봉의 제자로는 정운용(鄭雲龍),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최시망(崔時望)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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