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내 속의 살아 있는 南冥

李    洧    植
배화여대 교수
한국문협 전 부이사장

  나의 관향은 합천이고 우리 집안은 이른바 '지리산 연원 48가' 중의 하나다. 나의 13대조 日新堂 李天慶 할아버지가 남명선생의 직계 문인이다. 1538년에 태어나 1610년에 돌아 가셨으니 꼭 스승의 연세만큼 사시다 가셨다. 현재의 산청군 단성면 원당마을에 사시면서 일찍부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처사로서 오덕계, 최우수당, 김동강, 정한강과 같은 제현들과 교분을 가지며 학문과 후진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조정으로부터 두어 번 출사 권유로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고, 사후에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생전 39세 때는 남명선생이 돌아가신지 5년이 되던 해(1576년)인데, 그 해 같은 문인이었던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 이조, 손천우, 하응도, 하항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 건립을 의논했으며, 덕천에 남명선생의 祠宇를 세우기도 했다.

  평생을 처사로서 보낸 셈인데 이는 아마도 선생의 영향을 깊이 받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의 증조부, 조부, 부는 이렇다 하게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3대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었다. 증조부는 중종조의 문신 晦齊 李彦迪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홍문관 교리를 지낸 바 있다. 이름은 李迪이었다. 이언적의 이름도 처음에는 이적이었던 모양인데 두 문신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같은지라 왕이 혼동을 피하기 위해 벼슬길에 먼저 오른 내 할아버지의 이름은 그대로 두고 이언적의 이적이란 본 이름에 '彦'자를 넣어 부르라고 하명했다는 일화가 '회재연보'에도 나와 있다.

  조부의 李圖南은 동래도호부사, 병조참판을 지냈고, 아버지 李光前은 승문원 저작으로 일찍 별세했다.  그리고 아들, 손자, 증손자들도 모두 벼슬길에 올랐었다.

  이렇게 3대의 직계 윗분들과 자손들이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끝내 처사로서 일생을 보낸 사정에는 아마도 선생의 영향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연고로 나의 집안이 예로부터 세칭 '지리산 48가'의 속해 왔고 이런데다 나 자신도 출생과 성장권이 서부 경남인지라 자연 환경적으로 어릴 때부터 남명선생의 이야기를 종종 들으면서 자랐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서라기 보다 주로 할머니를 통해서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산청군 청현리이고 곧 진주로 이사를 가서 4, 5세까지 그 곳에서 자랐으며,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해방 2년전에 하동군 옥종면으로 다시 이사를 가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간혹 방학 때에 할머니가 고향마을 청현에 가실 때면 나와 삼촌들을 데리고 다니시곤 했다. 해방 후 그리고 6.25 이전이라 마땅한 교통편이 없다 보니 주로 걸어서 고향 길에 올랐다. 옥종에서 칠정, 남사리, 단성, 원지를 지나 청현에 이르는 50리 길이었다.

  단성쯤에 이르러서는 목화씨를 그 곳에 시배했다는 문익점 이야기도 들었고 또 임란시 이 지역에서  홍의를 입고 신출귀몰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게 했다는 의병장 곽재우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할머니의 치마조리에 바싹 달라 붙었던 기억이 새롭다.

  뿐만 아니라 남명선생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듣곤 했다. 큰 학자로서 경상 좌도에 퇴계, 우도에 남명이 있었고 퇴계는 벼슬길에 나갔으나 선생은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며 초야에 묻혀 은일만 한 것이 아니라 필요시는 위험을 무릎쓰고도 두 임금(명종과 선조)에게 세상이 잘못 되어 감을 통탄하는 우국충정의 글을 올리는 꽂꽂한 기개를 보여 주었음은 물론 청빈하게 살면서도 곧고 의롭게 살았기에 사후 임진란이 일어나자 이를 본 받은 많은 문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의병활동의 선봉에 섰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후 진주고등학교 시절, 고전문학 시간에 처음으로 선생의 시조 2수를 접할 수 있었고 또 몰랐던 선생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선생에 관해 더도 덜도 알지 못했다. 신식공부를 한답시고 외지를 떠돌고 또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랴, 틈이 나는 대로 평론활동을 하려다 보니 나의 관심에서 저절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유학자나 국학자 아니면 국문학자의 길이라도 걸었다면 사정은 훨씬 달라졌으리라 상상해 본다.

  그러다가 40대에 이르러 비로소 깊이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는 집안의 7대 종손이다. 외지생활만 해 온 내가 자칫하면 '돌놈'이 될 것 같아 집안의 뿌리를 좀더 자세히 알려고 하다 보니 자연 남명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어 자세한 행적과 학문세계 그리고 시문학의 세계를 어느 만큼은 깊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면 '남명식 삶'을 살려고 은연중 노력도 해 보았다. 허명과 명리를 쫓아 권세에 아부하거나 아세곡필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고, 설사 사정이 어렵고 딱하더라도 남의 신세를 져서는 안 된다는 自助的 결백성을 고수도 해 보았으며 또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의롭게 생각하고 의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이 떠오르곤 해 세속적으로는 더러 손해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것을 떳떳히 여기고 있다.

  이런 나의 생각과 행동은 물론 근원적으로는 나의 가치관이나 성격에서도 기인하였겠지만 크게는 나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南冥精神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재작년에 '남명문학상 본상'을 받게 되었으니 선생과의 인연은 대를 이어 연결 되었다 싶었고 또 그 감회 역시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비평가로서 40여 년간 문단활동을 해 오는 과정에서 몇 번의 크고 작은 상을 받은 경험은 있었지만 '48가'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또 그것도 공교롭게도 갑년의 축하 겸 선물인양 나의 갑년에 받고 보니 그 감회가 더욱 남달랐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남명정신은 내 속 깊이 살아 있고 숨쉬고 있다.

  오늘을 사는 나로서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좋은 글도 쓰며 후진들을 잘 돌봐 주는 일이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일이라 생각해 보며 또 '敬'과 '義'에 바탕한 실천궁행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리라고 새 천년, 새 해를 기해 새롭게 다짐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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