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문학현장답사기(18)-행단기

정 우 락
영산대교수

  1999년 7월, 그러니까 20세기의 마지막 여름은 나에게 있어 특별했다. 공자가 나서 자란 중국의 곡부(曲阜)를 처음으로 여행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7월 24일 김해 비행장을 출발하여 상해, 소주, 항주, 제남, 곡부, 북경을 거쳐 7월 31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7박 8일간의 일정이었다. 이번 여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스승이 <행단기>를 지어 그 사유 속에 중요하게 자리하게 하였던 곡부의 '행단(杏壇)'을 찾아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남명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을 만나 남명학의 보급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은 남명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 송준식·김경수·사재명·박라권 제선생- 이 주축이 되었고,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몇몇 부인들이 따라나섰다.

  7월 26일밤 제남의 중호대주점(中豪大酒店)에서 여장을 푼 우리는 거기서 왕배원(王培源)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남명선생시설략(南冥先生詩說略)>(남명학연구논총7, 남명학연구원, 1999)을 쓴 바 있는 산동대(山東大) 교수다. 왕교수는 스승의 시에 대하여 연구하였으니 학문분야가 나와 가장 밀착되어 있다 하겠다. 중국에서의 한국학, 그 가운데서도 남명학의 연구상황, 그리고 남명문학에 표현되어 있는 광활한 정신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40도를 상회하는 중국 술을 마셨다. 술집에서 나온 안주는 껍질째로 삶은 콩과 돼지갈비 등이었다. 말로만 듣던 왕교수의 무서운 술 실력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이날 항상(杭州와 上海)간 버스에서 소흥주(紹興酒)를 필름 통에 담아 돌려 마신 전과를 보유한 우리들은 하나 둘씩 나가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로 떠들고 웃고 하면서, 간배(乾杯) 후에 술잔을 머리에 거꾸로 들어 '간배', 즉 술잔이 비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우리의 기이한 행동은 술집 주인의 눈에는 영락없는 외계인이었다. 뚱뚱한 그 중국여인의 수상한 눈초리에 이같은 사실은 반뜩거리고 있었다.

  공자를 만나는 날은 엄숙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30도가 넘는 날이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갖고 온 옷 가운데 몸을 가장 많이 가리는 점잖은 옷을 찾아 입었다. 유교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중국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서슴없이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꼽을 터인데, 우리는 그 곡부를 오전 8시 20분에 제남을 출발하여 11시 5분 경에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공자가 올라 천하의 좁음을 보았다는 태산(太山)도 지났다. 두루 알다시피 곡부는 주나라 초기에 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다스렸다고 하는 노나라의 옛 도시로 현재 산동성 남부에 있으며 '현'의 자격이다. '곡부'라는 명칭은 수나라 때부터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지성묘(至聖廟)라고도 하는 공묘(孔廟)와 공자·자사 등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이 있어 동양 예교의 중심지로 존경받아온 곳이다. 나의 이야기가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행단이 있는 공묘를 중심으로 그 구조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자. 공자는 인내력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만날 수 있다.

  공묘는 공자의 제사를 받드는 묘당(廟堂)인데, 옛날 노성(魯城)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공묘의 발전단계는 대체로 넷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초건단계(初建段階)로 삼국시대 위나라 황초(黃初) 2년(221) 처음 공묘가 세워진 시기이다. 공자가 거처하던 3간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공자 생전의 옷과 관, 거문고, 수레, 책 등을 보관했던 간소한 형태의 사당이었다. 둘째는 시수시폐단계(時修時廢段階)로 이 시기에는 위나라 황초 2년에 처음 공묘가 건립되었으나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1018)에 이르기까지는 보수와 황폐가 거듭되었다. 서진말(西晉末)에는 공묘가 더욱 황폐화되었고, 남북조에서 수당에 이르기까지 비록 중수가 끊이지 않았으나 공묘는 비루(卑陋)하여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셋째는 확대구제단계(擴大舊制段階)로 공묘가 옛 체제에서 많이 확대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송나라 천희연간, 금나라 명창(明昌) 2년(1191), 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4년(1300), 원나라 순제(順帝) 지원(至元) 2년(1336)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사당과 전당이 중수되고 낭무(廊) 등이 대대적으로 건축되었다. 넷째는 규모완성단계(規模完成段階)인데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규모로 공묘가 완성된 시기이다. 이 때 건물은 명·청 양대에 걸쳐 앞 시대의 것을 중수하거나 새로 지어 그 수와 넓이를 더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공묘는 3개의 궁궐, 1개의 각(閣), 1개의 단(壇), 3개의 사당, 2개의 무(), 2개의 당(堂), 2개의 서재, 466개의 방과 54개의 문, 2000여 기의 비석이 있으며, 면적은 160,000평방미터에 달한다. 공묘 안에 있는 건축군은 그 면적이 광대할 뿐만 아니라 기백이 웅혼하며, 시간적으로도 오래되었으나 보존이 비교적 온전하여 세계 건축사상 흔히 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이것은 중국 사람들의 지혜의 결정이라 할 터인데, 역사·고고·건축·조각·회화·서법 등이 구비된 대형 박물관이라 할 것이다. 공묘는 평면적으로 외부(外部), 전부(前部), 후중부(後中部), 후동부(後東部), 후서부(後西部) 등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 바, 이를 순서대로 살펴 공묘의 공간구조에 대하여 알아보자.

  외부에는 곡부의 남문 앞에 100여 미터의 잣나무 길인 공묘신도(孔廟神道)가 있다. 나무는 그 나이가 오래되어 이미 고사목이거나 반고사의 상태로 된 것이 더러 섞여 있다. 역대로 공자 및 공묘에 대한 존경과 경앙(敬仰)을 나타내는 하마비(下馬碑)도 있는데 공묘의 남쪽 담에 밀착시켜 세워두었다. 위에서 아래로 '官員人等至此下馬'라는 글이 정서되어 있었다. 그리고 맹자가 주악(奏樂)의 예를 들어 공자를 집대성한 사람으로 평가한 데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이 있었다. 이것은 명나라 가정(嘉靖) 17년(1538)에 세운 것으로 네 기둥의 머리에는 각각 앙련(仰蓮)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조천후(朝天吼)라는 동물이 남쪽을 향하여 높게 앉아 그 허허로운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금성옥진방을 지나면 전부가 나온다. 여기에는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지성묘방(至聖廟坊) 등 돌로 세운 여러 방(坊)과 성시문(聖時門)·홍도문(弘道門) 등의 여러 문, 벽수교(璧水橋) 등의 다리, 곡부역대연혁비(曲阜歷代沿革碑)·문례고지비(問禮故址碑)·고반궁비(古泮宮碑) 등의 다양한 기념비, 규문각(奎文閣) 등의 커다란 집이 있다. 이 가운데 '태화원기'는 공자의 도가 위대하다는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역 [건괘] '단사'의 "보합대화(保合大和), 내이정(乃利貞)"이라는 말에서 '태화'를 따온 것인데, 여기서의 '대화'는 곧 '태화'를 의미한다. '원기'는 태화가 시작되는 첫 기운이다. 즉 우주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의 존재와 생장은 '태화원기'가 작용한 결과라 보았다. 공자의 도를 바로 태화원기에 비유한 것이다.

  후중부에는 공자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회나무인 공자수식회(孔子手植檜), 만년에 제자들에게 경전을 강의했던 장소로 알려진 행단(杏壇), 을영비(乙瑛碑)·예기비(禮器碑) 등의 비석, 공묘의 중심건물이면서 맹자가 맹자 [진심장]에서 "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謂集大成)"이라 한데서 이름한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대성전의 원래 이름은 문선왕전(文宣王殿)이었다. 그러나 북송 대에 휘종(徽宗)의 명으로 대성전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의 수필(手筆)로 그렇게 편액 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현재의 것은 청나라 세종의 친필이다. 여기에는 공자의 소상(塑像) 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적 제자로 알려진 12철의 소상들이 있으며, 여러 악기와 무구(舞具)들도 진열되어 있다. 또한 전각 이마 부분과 문 위에는 높다랗게 달린 편액과 여러 폭의 주련이 있는데 역시 청나라 세종의 친필로 알려진 백성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분은 있지 않았다는 뜻인 "생민미유(生民未有)"는 눈에 가장 잘 들어온다. 이밖에 대성전 뒤에는 공자의 침전과 그 부인 병관씨(幷官氏)- 올관씨(兀官氏) 혹은 기관씨(官氏)로 된 문헌도 있다. -의 전당 및 성적전(聖迹殿), 그리고 만세사표(萬世師表) 등의 여러 각석들이 있다.

  후동부에는 공자고택문(孔子古宅門)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와 금나라 양대의 묘택문(廟宅門)이 있던 자리였으므로 여기에 가탁하여 공자고택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안에는 청나라 고종 건륭(乾隆)황제가 쓴 '고택문찬비(故宅門贊碑)'가 세워져 있다. 이밖에 당나라 때 심은 괴목(槐木)과 송나라 때 심은 은행 및 시례당(詩禮堂), 노벽(魯壁)과 공택고정(孔宅故井), 공씨세계비(孔氏世系碑), 공씨보본수은비(孔氏報本酬恩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노벽에서는 한무제 때 노 공왕(恭王)이 공자의 고택을 허물었을 당시 이 벽 안에서 공부(孔)가 소장했던 고적이 다량 나왔다고 전해지며, 노벽앞에는 공택고정이 있어 공자시대의 유물이라 한다. 샘의 입구는 벽돌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송나라 때에 보수한 것이다. 남쪽을 향하여 서 있는 하나의 비석에는 "孔宅故井"이라는 반듯한 글이 음각되어 있다.

  후서부에는 계성문(啓聖門), 악기고(惡器庫), 금사당(金絲堂), 오현찬비(五賢贊碑), 계성전(啓聖殿), 원가봉계성왕제조비(元加封啓聖王制詔碑), 계성왕침전(啓聖王寢殿) 등이 있다. 계성왕이란 누구인가? 바로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을 말한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공자를 낳아 역대의 제왕과 문인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숙량흘은 송나라 진종(眞宗)황제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에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졌으며, 원나라 지순(至順) 원년(1330)에는 계성왕(啓聖王)으로 봉해졌다. 이로 인하여 이 후서부 일대는 '계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공자의 부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물이 있게 된다. 특히 계성전 북쪽의 3간으로 된 계성왕침전은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安徵在)의 전당이다. 안씨 역시 그의 남편이 추존되면서 송나라 대중상부 원년(1008)에는 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으로, 원나라 지순 원년(1330)에는 계성왕부인(啓聖王夫人)으로 봉해져 제사를 받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대성전이 후중부에 있으니 이것이 공묘의 중심을 이루고 거기에 들어서는 곳에 다양하게 펼쳐진 비석이며 건물들이 전부, 그 바깥쪽이 외부가 된다. 그리고 대성전의 동쪽에는 공자가 일상적으로 거처하던 집을 형상한 후동부, 서쪽에는 공자의 부모와 관련된 다양한 전각들이 후서부를 이룬다. 곡부의 공림에 대한 전체적 지형도가 그려졌으니 이제 우리의 목적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하여 행단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행단은 후중부 '공자수식회'의 북쪽, 대성전으로 통하는 길의 정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행단에 대한 기록은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보이는데 이러하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장자에 나오는 공자에 대한 다른 기록에 의거하여 보면, 이 기록 역시 우언을 이용하여 인위의 허식을 버리고 자연의 대도를 이룰 것을 역설한 것일 터이다. 장자가 장자 <도척편>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가의 예교주의(禮敎主義)가 갖는 세속성과 위선성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자는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68세의 나이에 고국 노나라로 돌아왔다. 한 해 전인 67세에는 부인 병관씨가 죽었고, 돌아 온 해 봄에는 제자 염유가 제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노나라 계강자는 의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폐백을 보내 당시 위(衛)나라에 체류하고 있었던 공자를 초빙하였고, 공자는 거기에 응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공자의 유랑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그러나 험난한 시대를 위하여 무엇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공자가 노나라에 머물면서 한직을 즐기면서 제자들과 강학하거나 고요한 숲을 찾아 산보나 하였다면 오늘날의 공자가 있었을까? 그는 분명히 성공의 가능성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방황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념은 별처럼 반짝일 수 있었으며 동양의 지성을 지탱하는 오랫동안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노나라에 돌아왔지만 공자는 중용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강자(季康子)의 초빙은 현인을 위한다는 하나의 겉치레일 따름이었다. 사실 당시 계강자는 백성들에게 할당되는 세금을 올림으로써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려고 획책하였고, 백성을 위한 투사처럼 알려진 공자를 초빙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계강자의 처사에 대하여 공자는 맹렬히 비난했고, 계강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고 공자의 제자 염구(求)를 내세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이에 공자는 염구에 대하여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 여봐라! 북을 치면서 염구를 공격하라! 내라 허락하는 것이다.'라며 단호하게 비난하였다. 그 후 염구가 계강자를

 위한 자신의 태도를 고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공자는 그가 73세(BC. 479)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문화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역사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으로 고대문헌의 정리와 후세교육에 마지막 남은 열정을 바쳤다. 이같은 일련의 행위가 바로 행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공묘 가운데 행단을 건립하게 된 결정적 근거는 앞서 언급한 장자 〈어부〉에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대성전 앞의 행단 자리는 원래 공자고택의 '교수당(敎授堂)'이 있던 자리였다. 동한(東漢) 명제(明帝)가 동쪽을 순방하면서 공자고택을 지나게 되는데, 그는 친히 이 교수당에서 황태자 및 여러 왕들에게 명하여 경전을 강론토록 하였다. 그 후에 집은 헐리고 한(漢)·당(唐)·송(宋)을 지나면서 한결같이 공묘 정전(正殿-대성전)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천희(天禧) 2년(1018)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겨 확장하면서 그 앞, 즉 옛날 교수당의 옛 터에 땅을 고르고 단을 만들어 '행단'이라 하고 그 주위에 살구나무 - 중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은행나무로 여기는데, 이 때문에 서원 등에서 은행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 를 심었다. 금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단 위에 건축물을 세웠으며, 금나라 승안(承安) 무오년(1198)에 공자의 후손에 의해 그 내부에 비가 세워졌고, 글씨는 당대의 대표적인 문필가였던 당회영(黨懷英)이 썼다. 단 내에는 후대의 청나라 고종이 그의 친필로 세운 〈행단찬(杏壇贊)〉비도 있다.

  공자가 여기서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진리에 대하여 강론하고 고전을 정리했다고 하여 '행단예악'이라는 성어가 생겼다. 주자는 〈논어집주서설〉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공자는 끝내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고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시고, 시경을 산정(刪定)하시고 음악을 바로 잡으셨으며, 주역의 〈단사〉와〈계사〉, 〈설괘〉와 〈문언〉을 차례로 지으셨다." 명나라 때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공자사적도(孔子事蹟圖) 가운데 행단예악도(杏壇禮樂圖)를 보면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듯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제자들이 책을 펼치고 토론하면서 분주하게 고전을 정리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이상을 당대에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공자가 후대를 기약하며 벌인 최후의 의미있는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공자는 노래 부르기를 즐겼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들으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기를 청하여 자신도 따라 불렀다. 시경 〈관저〉편을 들어 '즐거우면서도 결코 음란하지 않고, 애처로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않다.'고 비평하면서 시경을 '사무사(思無邪)'로 요약하기도 했다. 참된 의미로 채워져 있는 시경의 내용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 터이다. 시로써 인간적인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써 인격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고, 음악으로 배움을 완성시킨다고 했던 공자, 그의 진리에 대한 고민과 도전의식이 아직도 행단을 중심으로 감돌고 있었다. 당회영이 쓴 행단이라는 전서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으면서 정신을 집중해보았으나 공자의 진리에 대한 갈파는 나의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의 세상을 향한 고민은 나의 마음에 전달되지 않았다. 어제 저녁 왕교수와의 그 터무니없는 대작이 나와 공자의 통로를 이처럼 차단한 것이리라. 이때 느닷없이 나의 정수박이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스승이었다. 정신이 번쩍들었다. 스승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조선이라는 조그마한 땅에서 행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공자의 강학모습을 대단히 정밀하게 그려내었다. 스승이 그린 그 아름다워도 좋을 풍경을 통해 나는 공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스승이 그린 그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색깔을 띠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스승의 작품〈행단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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