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8)

李商元
本院 硏究委員

선생께서 52세가 되던 해(1552), 신해년에 아들 次石이 태어났다. 士人인 宋璘의 딸인 副室과의 슬하에 3男 1女를 두었다. 次石, 次磨,  3형제와 趙信道에게 시집간 딸을 두었다.

曺次石(1552-1616)은 字가 一會로 縣監을 지냈으며, 次磨(1557-1639)는 字가 二會로 號가 慕亭이며 漆原縣監을 지냈으며 實記가  남아 있고, (1560-1645)은 字가 開會로 武科에 들어 萬戶를 지냈다.

이 해에 三足堂 金大有의 喪을 당하여 곡하였다. 삼족당은 字가 天祐로 본관은 金海인데, 향년 74세였다. 선생께서 묘갈명을 지었는데 문집에 '宣務郞戶曹佐郞金公墓碣銘'이 실려있다. 묘갈명에 보면, 선생께서 유독 공을 천하의 휼륭한 선비로 인정하였음(獨許以天下士者, 公也)을 살필 수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삼족당은  선생께서 빈궁하신 것을 염려하여, 임종시에 해마다 곡식을 선생께 보내 드릴 것을 자식들에게 명하였으나, 선생께서 시를 지어 이를 사양하면서 그 厚意에 사례하였다. 이 같이 평소에 三足堂과는 매우 돈독한 우의를 맺고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선생께서는 친히 그의 빈소에 곡하고, 뒤에 또 묘갈명을 짓기도 하였다.

삼족당은 중종 2년(1507)에 庭試에서 장원을 하여 진사과에 나아갔으나 향리로 곧장  돌아가 선영을 보살폈고,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호조좌랑, 正言, 칠원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길 좋아하지 않고, 짧은 벼슬살이를 이내 사양하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고자 하였다. 그래서 청도 雲門山 牛淵에 三足堂을 짓고 우거하다가 병을 얻어 이곳에서 마치자, 삼족당 북쪽 金谷에 장사지냈다.

聽松 成守琛의 편지에 답하였다.

成守琛(1493-1564)은 字가 仲玉이며 청송은 號이다. 그는 昌寧이 본관이며 靜庵 조광조의 門人으로 坡州에 살았으며, 『聽松集』이 남아 있다. 牛溪 成渾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그는 己卯士禍의 참상을 보면서 평생을 고향에 은거하여 마쳤는데, 뒤에 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평소에 공과 선생은 인편으로 더러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 그리워하면서 지냈다. 공과의 교류를 살필 수 있는 『남명집』에는 시 한편과 편지글 3마리가 남아 전하는데, 이 해 임자년 11월에 띄운 편지에 보면, 남명 선생께서 虛名을 쫓지 아니하고 은일하는 處士의 몸가짐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동시에  詩를 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즉 선생은 欺世하는  당시의 세태를 은근히 自重하는 겸사로서 드러내고, 詩 짓는 일은 교만한 죄를 더하는 것으로 다만 사물을 읊으며 정신을 딴 데로 빼앗겨 뜻을 잃는 일임을 경계하고 있다.

  이때 성수침에게 보낸 古風 사언시는 『남명집』에 남아 있는데, 청송이 原韻을 띄우자 이에 선생께서 화답하여 보낸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시를 살펴보면,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老境에 道를 걱정하며 山林에 숨어사는 뜻을 절실하게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德川師友淵源錄》에 보면 청송에 대하여 '평소에 선생과 공은 교유하여 그 사귐이 특별히 깊었으며, 늙도록 쇠하지 아니하였다. 왕복 詩書가 있으며, 또 퇴계는 그를 일러,  '高遯'이라 칭하고,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잘 마쳐, 진실로 말세에 보기 드문 인물로 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같이 청송은 당대의  은일군자로서 둔세지사이며, 이름을 숨기고 평생을 出處의 大節을 견고하게 지키며 淸高한 삶을 살았다. 그의 집은 파주 白岳山 아래 있었는데, 소나무 숲에 집을 짓고 은거하기를, '솔바람 소리를 듣는 일'을 餘事로 여겨 '聽松'이라 편액하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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