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감

김   경   수
                       본원 사무국장

  이 글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에 수록된 내용 중 남명선생의 사적지에 대한 서술에 있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도로 쓴 것이다. 물론 유 교수의 이 저서가 우리나라 답사여행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공감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 해에 약 30만 명에 이르는 답사객들이 덕산에 소재한 남명선생의 사적지를 찾고 있는 실정을 고려할 때, 많은 사람들이 답사의 길잡이로써 유 교수의 답사기를 토대로 사전 지식을 가지고 현장을 방문하여 잘못된 부분을 사실로 확인한 것처럼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본 연구원의 사무국장으로서 한 해에 수십 차례가 넘게 덕산을 찾아오는 단체 학술답사객들에게 남명선생의 사적지에 대해서 안내하고 있다. 이런 경우 위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는 사례가 너무도 빈번하여 부득이 지면을 빌어 그 오류를 바로 잡고자 이 글을 쓴다.

  유 교수의 이 책은 1994년 7월 11일 초판이 나온 이래로 2000년 2월 25일 초판 34쇄가 나오기까지 이러한 잘못에 대한 수정없이 계속 간행되었다. 그 책의 55쪽부터 63쪽까지에 남명선생과 그 사적지에 대한 집중적인 안내가 들어 있고, 71쪽에 남명선생의 시 한 수가 언급되어 있다. 이를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한다.


  그런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버렸다.(P.56)

  회갑을 맞은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양성에 전념하였다.(P. 56)

  덕산에 복거한 지 5년 되었을 때 남명에게 다시 판관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5월에도 불렀고 8월에 또 불렀다. 때는 문정왕후가 명종을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남명은 한양으로 올라가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는 “임금이 성년이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지 아녀자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덕산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때 문정왕후를 아녀자라고 한 것이 훗날 큰 문젯거리로 되었다. (중략)  그의 영정에는 처사라고 적혀졌다.(P. 57)

  지금 덕산에는, 정확히 시천면 사리(絲里) 덕천강가에는 남명의 서재였던 서너칸짜리 산천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의 빛바램 속에 산천재는 낡고 헐어 또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것이 남명 당년의 모습에서 과장되지 않았음을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P.58)

  남명 선생의 묘소는 산천재 맞은편 동산에 모셔져 있다.(P. 58)

  타계 후 영의정에 추증된 남명이었지만, 그를 어떻게 기릴 것이냐를 두고 참으로 말도 많고 일도 많았다. 삶의 겉치레와 허명을 싫어했던 남명에게 호화로운 장식을 하려고 했던 데서 벌어진 것이었으니 어쩌면 땅속의 남명이 노하셨던 모양이다. 남명 묘소 앞쪽에 깨어지고 엎어진 세개의 비석이 그를 말해주고 있다. 내 여기서 이 쓰러진 비석들의 내력을 소상히 말할 여유가 없지만, 비문을 4개씩이나 받아두는 제자와 후손의 잘못이 누대에 걸치면서 일어난 소설 같은 얘기라는 사실만 적어두고 지나가련다.(P. 60)

  지금 서원 뒤 사당에는 남명과 그 제자 되는 최영경(崔永慶)을 모셨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연한 기품만은 여느 서원 못지 않다.(P. 60)

  덕천서원 대문과 마주한 덕천강변에는 남명 선생 생전부터 있어온 남루한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름하여 세심정(洗心亭)이다. 강가로 올라앉아 있기에 마음을 닦는 세심정이라 했을 것이니, 저 아래 강가의 너럭바위는 마땅히 탁족대(濯足臺)가 될 일이다.(P. 60)

  남명의 일생을 보면서 나는 우리 시대엔 남명 같은 처사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누구인가, 혹은 남명 같은 위치를 차지하던 분이 출세길로 빠지는 바람에 처사로서 영원히 존경받을 축복을 스스로 박차버린 분은 없었는가…… 그런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재야의 그런 어른을 어른으로 모실 수 있는 문화풍토가 뿌리내릴 때 우리에겐 제2의, 제3의 남명이 가까이 있게 된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잘 모르지만 인간 남명은 무한히 존경하고 덕천서원 산천재를 지리산 동남쪽 답사의 숙박지로 삼았던 것이다.(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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