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산청을 다녀와서(山淸之行)

                                       韓   梅
中國 山東大學 전임강사,
한국성균관대학 고전문학박사생

번역  韓  相  德
경상대 강사

  경진년 삼월 어느 이른 아침,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차를 타고 성균관으로 갔다. 조선유도회에서는 회원을 모아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을 고찰하러 가기 위해 여기서 출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고향은 중국의 공자 맹자의 고향인 산동에 있다. 이전에 여러 차례 한국 손님들을 모시고 공자의 고향인 곡부를 유람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은 외국인 신분으로 처음으로 한국에서 유교의 역사유적을 고찰하게 되어 흥분도 되고 호기심도 일었다.

  날이 막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길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성균관에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상당히 일찍 도착하였다. 성균관 앞의 길에는 이미 두 세 명씩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몇몇 어르신은 고대 유생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그 용모가 단정하고 기풍이 유아하여 대번에 오랜 전통문화의 분위기가 더해졌고, 보자마자 바로 이분들이 노 서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저절로 공경의 마음이 일어났다. 나는 다시 둘레둘레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아주 평범한 차림을 한 일반적인 시민들로 서로 점잖게 예의를 표하곤 했으나, 회원들 중 젊은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았다.
  정선생님과는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정신이 아주 정정하신 한 어른이 나의 눈앞에 서 계셨다. 큰 키에 짧은 소매의 조끼를 입었는데, 두 눈에 담긴 영롱한 영채는 사람의 정신을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 정말로 연세가 이미 환갑을 넘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나는 정선생님께 동행한 친구들을 소개하였다.

  아침 여덟 시, 우리가 탄 큰 차는 출발을 하였다. 차안은 뜨뜻하였다. 요 며칠 계속 제대로 쉬지를 못했고 또 아침에는 너무 일찍 일어났었기 때문에 차에 타자마자 위 눈꺼풀이 아래 눈꺼풀에 달라 붙어버렸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떤 흔들림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흐릿한 눈으로 창 밖을 보니 "추풍령"이란 세 글자가 나의 눈으로 비쳐 들어왔는데, 이는 바로 고속도로변에 있는 한 휴게소였다. 차의 문을 열자 한 줄기 찬 공기가 얼굴을 확 스치는데 잠이 확 사라져버렸다. 차에서 내려 맑은 바람을 훅하고 마셨다. 휴계소에서는 사람들이 오고가는데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중국과 다른 것은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다음 휴게소와의 거리가 가깝고, 휴게소 내의 상점이나 식당·식료품점 등이 즐비하게 있으며, 또 자동판매기가 있어 아주 편리하다는 점이다.

  점심은 우두령 휴게소 이층 식당에서 간단하게 한국 "정식"을 시켜 먹었는데, 사방의 푸른 산을 감상하며 맛있는 김치를 먹었다. 김치는 한국의 전통적인 식품으로 한국에는 전문적인 김치 박물관이 있기도 하다. 막 한국으로 유학을 왔던 그 해에는 익히지도 않고 맵기도 한 김치에 습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일년이 지난 뒤, 특히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을 때는 상상외로 김치맛에 애인과 같은 정이 들어 버렸다. 그 후 한국으로 출장을 오게 되면 김치는 끼니마다 반드시 먹어야만 했고 귀국을 할 때는 좀 사 가지고 가야만 했다. 한국에는 "남남북녀"란 말이 있고, 한국의 총각들은 아주 잘 생겼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김치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차를 타고 계속하여 달렸다. 끝없이 연이어지는 청산은 계속 봐도 물리지가 않았다. 가는 길에 정선생님이 들려 주시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지방 전설로부터 고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또 지명에 대한 유래 등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해박한 지식은 참으로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설명을 통해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한국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오후에 차는 학사루에 토착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인 최치원이 이 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최치원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였고 과거에 참가를 하여 관리가 되었던 적이 있으며, 또 《檄黃巢書》 때문에 유명하기도 하다. 옛날에 최치원이 지은 《秋夜雨中》이란 시를 읽어보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에는 그리 깊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뒤에 최치원의 생평에 대한 소개를 보고 나서 이 시는 시인이 만년에 느꼈던 고독한 심경과 처경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최치원은 중국과 한국의 고대문화를 교류시켰던 대표적인 인물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때에 우리 일행은 목적지인 경상남도 산청군의 덕천서원에 도착하였다. 산청군은 지리산 아래 있는 하나의 조용한 산촌으로, 첩첩 산중에 있으면서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임해 있다.

  서원의 대문을 들어서니 먼저 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힘차게 쓴 "덕천서원"이란 네 글자였다. 짐을 푼 뒤 우리는 뒤로 가서 남명 조식 선생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순서는 아주 엄격하였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유건에 도포를 걸친 다음 두 줄로 서는데 연장자는 중간에 서고 젊은 사람과 여자들은 뒤에 섰다. 그런 뒤 고유서를 읽고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지낸 후, 다시 서원의 본채로 돌아와 바닥에 앉아 남영학 연구원의 김경수 사무국장의 강의를 경청하였다. 한국의 서원 중 가장 기원이 빠른 것은 16세기 중엽으로, 과거의 서원은 사숙과 같으며, 官에서 만든 학교는 향교였다. 서원이 주로 하는 일은 공부를 가르치고 자제를 배양하며 이미 돌아가신 유명한 유학가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당시 경상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서원이다. 수 년 뒤에 명종은 유명한 유학자 이황의 건의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원에 수많은 특혜정책을 폈는데, 예컨대 면세와 부역을 면해주었던 것 등이 그것이다. 덕천서원은 1576년에 건립이 되었는데, 조식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학생들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의 명칭은 덕산서원으로, 도산·옥산과 병칭하여 "삼산"이라 하였는데, 이 중 덕산서원의 규모가 가장 컸다.

  저녁밥은 전형적인 한국 음식이었다. 중국과 다른 것은 한국에서는 매 끼니마다 반드시 국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막 한국에 온 사람들은 아마도 아직 습관이 되지 않겠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국이 없이는 밥을 먹어도 그렇게 맛을 못 느낄 것이다. 저녁상에 오른 콩나물국은 아주 별난 맛이 있어 나도 큰그릇에 한 그릇 가득 채웠다. 주인은 또 특별히 한국의 전통 민속주인 탁주를 내왔다. 술 색깔은 유백색으로 약간 신 맛이 있고 약간 미주맛과 비슷한데, 도수는 아주 높은 것은 아니었다. 삼키고 나니 아주 시원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남명학연구원에서 출판한 《남명 조식 선생 행장 및 사적》이란 책을 펼쳐 보았더니, 책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생평과 사상, 그리고 역사 사적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조식 선생의 역사 유적을 고찰하는 일은 우리들이 이번에 나들이를 나온 주된 목적 중의 하나였다. 조식 선생은 조선조 연산군 시대에 출생한 아주 유명한 유학가로 수많은 책을 널리 읽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경"과 "의"를 주장하면서 교육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만년에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시폐를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함으로써 조정과 민간을 진동시켰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단성소》인데, 이는 조식 선생의 "묘당의 높은 곳에 거해서는 그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 멀찍이에 처해서는 그 임금을 걱정하는" 간절한 애국심을 표현한 것이다. 훗날 일본의 침략에 항거할 때 조식 선생의 제자였던 정래암·김송암·곽망우당 등등이 각지에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의병을 소집하여 침략에 대항함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또 전쟁 중에 주력군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다. 조식 선생의 학덕은 당시 사람들에게 조선 유학의 원천으로 불렸으며, 그는 봉황이 높이 비상하는 멋과, 봉두의 옥 같은 아름다움, 수면의 달과 같은 호연함을 가지고 있는데, 대의에서 나온 학덕이라 그 향기가 만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아주 풍부하고 상세하며 수식이 화려하지만 어휘가 너무 전문적인 것이라 중국사람으로서 한자로 된 어휘는 당연히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독자들, 특히 한국의 젊은 학생들은 어쩌면 이해를 하는데 힘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만일에 심오한 내용을 좀 알기 쉽게 표현을 해서 보통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게 한다면 남명 선생의 사적과 미덕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발양·선전할 수 있지 않을까?

   밤중에 우리 몇 사람은 서원 밖으로 나와 야경을 감상하였다. 사방은 고요한데 하늘의 별들만이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난 마치 또 다른 세계 무릉도원에라도 온 것만 같았다. 걸어서 시냇가에 다다르니 안개가 촬촬거리며 냇물에 비치고 있는데 마치 한 바탕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봐도 확실하게 보이지를 않았는데, 이 때문에 안개 색이 더욱 아름답게 보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맑은 냇물을 퍼 올려 보니 아주 차가운데, 이 시냇물로 하루에 쌓인 먼지와 피로를 씻을 수가 있었다. 시골의 밤은 고요하고 평온한 채 속세의 시끄러움을 떠나 있었다. 현대문명은 발전을 해 가지만, 인류사회는 또 수많은 전통문화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훗날 언젠가는 인류가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보배를 진정으로 인식할 날이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이번 나들이에서 나와 몇몇 친구들에게 가장 깊게 인상을 남겨준 것은 역시 잠잘 때 베는 베개였다. 이른바 베개란 바로 장방형으로 된 하나의 나무토막이었는데, 그 길이는 십 몇 센티, 높이와 너비는 오 센티 정도 되었는데, 고대의 유생들은 이것을 베개로 사용했다고 한다. 평소에 일반적인 베개에 습관이 되었다가 딱딱한 나무토막을 베니 아주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친구는 "목침을 베어 보지 않으면, 자기 두상에 종기가 얼마나 많은 지를 알 수 없다."고 아주 감개한 듯 말하였다.

  꿈속에서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낭랑한 책 읽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소리의 높낮이와 곡절이 아주 리드미칼하게 원내를 울리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해서 귀를 의심해 보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역시 틀림이 없었다. 몽롱한 중에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지만 더 이상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이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밀고 보니 해는 아직 뜨지 않았는데 먼 산은 검푸른 빛을 띠고 아침 노을에 동쪽 하늘은 서서히 붉어지고 있었다. 서원의 본 채에 한 노 선생이 단정하게 앉아 정신을 모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침에 차를 타고 지리산 산허리쯤까지 가서 산보를 하였다. 지라산은 한국에서 두 번째 가는 높은 산으로 산세가 아주 웅장하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노라면 사방으로 산들이 첩첩으로 둘러 있고 구름과 안개가 산허리에 가득 걸려 있다. 미풍이 불어오면 이 하얀 운무가 천천히 날리며 움직이는데 여차하면 산봉우리를 빈틈없이 가려버리고, 여차하면 살그머니 천왕봉을 드러내 보여주곤 한다. 산을 감돌아 오르는 구불구불한 길은 계속하여 멀리 뻗어 있었다. 산의 끝자락에서 한 굽이를 돌아 다시 산의 뒤쪽에 다다랐는데 깊고 큰 산 뒤에는 끝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듯 겹겹의 산에 울창한 삼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봄추위가 쌀쌀하기는 하였지만 연한 나뭇잎들은 이미 기다릴 수가 없다는 듯 나와 사람들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산허리에서 산 정상까지는 아직도 열 시간 넘게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한 부인이 흥미진진하게 그 전에 자기가 걸어서 등산을 하였던 경험과 느낌을 젊은이에게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사람이라고 다 천왕봉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직 그런 용기와 끈기가 있는 사람만이 "절정에 올라 群山의 작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는 모두 조식 묘비를 참배하러 가고, 그 후 산천재를 구경하였다. 찬천재는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사방으로 촘촘한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뒤에 내암 정인홍 선생의 옛터에 도착하였다. 내암 선생의 옛터는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내암 정인홍 선생은 조식 선생의 제자 중 가장 출중한 인물로 인품이 올곧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법을 숙지하고 있었으며 작전에 뛰어나 당시의 의병을 인솔, 일본군의 침략에 항거함으로써 국가와 사직을 보위하고 민생의 평안을 보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바 있다. 당시 중국 명나라도 역시 군대를 보내 협동 작전을 펼쳤는데, 명나라 장군 중에 세 장군이 절강성에서 왔었다. 이들은 내암 선생과 같은 성씨였던 관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해인사의 불교 "팔만대장경"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내암 정인홍 선생의 후예인 가암 정기철 선생의 강의를 경청하였다.

  점심식사는 특별히 마련한 풍성한 토속 반찬과 가야산의 민속주였는데, 우리들은 이 순박한 민풍과 손님을 열정적으로 맞이하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점심 후, 차를 타고 귀가를 하게 되었다. 모두가 우연히 만나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하루를 같이 지내는 동안 마음이 너무 잘 통하게 되었다. 서로 싸 가지고 온 음식들을 꺼내놓고 서로 정중하게 권하였다. 어떤 사람의 건의로 각자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한국의 부인이 유행가를 조용하면서도 구성지게 불러서 아주 감동적이었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 노래 때문에) 삼개월 동안은 (다른 노래의) 맛을 모를 것이다."

  나의 한 친구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한국어도 잘 몰랐지만, 며칠 전에 배운 민가 "아리랑"을 끝까지 불러 그칠 줄 모르는 박수를 받았다. 이틀 동안의 여행을 통해 우리는 한국 친구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우정을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서로 만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만, "천하엔 헤어짐이 없는 자리란 없는 것", 선량하고 명랑한 친구와 이별을 하였다. 짧은 이틀간의 산청 나들이가 끝나 우리는 작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여행 중 그 아름다운 기억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동방 예의지국의 열정은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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