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정(2)

스승이 놀던 옛터와 다시 찾은 벗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회상으로 된 거미줄 - A.A. 숄

때는 1998년 가을, 합천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월여산(月如山)은 단풍으로 야단이다. 옛날 잡가(雜歌) 가운데 금강산 단풍유람 한 대목이 생각났다. "저기 가는 저 길손 말 물어보세. 한로(寒露)철 풍악(楓嶽) 풍광 곱던가? 밉던가? 곱고 밉기 전에 아파서 못 노닐레라. 가지 마오. 가지 마오. 풍악엘랑 가지 마오. 만산홍엽(滿山紅葉) 불이 붙어 살을 데고 오장(五臟)이 익어 아파서 못 노닐레라. 못 노닐레라." 길손은 금강산 단풍이 너무 붉어 살을 데고 마침내 오장이 익으니 가지 마라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가지 마라 하고 있지만 꼭 가보라는 의미가 이 대목에는 잠복해 있다. 오장이 익을 만큼 뜨겁게 여겨지는 단풍, 그 단풍을 보고 '아프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단풍 감상법이 예사롭지 않고 묻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더욱 촉발시켰다.

단풍이라면 마땅히 금강 혹은 설악의 단풍이라고 해야겠지만 사정이 꼭 그러한 것도 아니다. 월여산 돌틈 사이로 조용히 번지고 있는 잎들의 붉은 소멸,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보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항쟁, 붉은 혁명에 끓어오르는 열정을 말이다. 이것은 단풍의 많고 적음 혹은 짙음과 옅음에 있지 않다. 감상자가 물질적 요소 그 뒤에 있는 어떤 계시를 묵상할 때 비로소 그 소리는 우리의 귀를 열어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적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언저리로 흥건히 번져드는 황홀은 이렇게 찾아드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하며 사미(四美) 문경충(文敬忠, 1494-1555)이 강산풍월(江山風月)의 네 아름다움과 함께 누워있는 무덤을 찾았다.

산(山)은 기묘한 모습을 연출하며 편안한 듯 의지로 가득한 듯 우뚝 서 있다. 그 사이로 강(江)은 아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흐르고, 바람(風)은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흐른다. 밤이 되면 하늘엔 달(月)이 뜰 것이다. 그리고 형상이 있는 곳에는 그의 모습을 빛으로 환원시켜 드러내고, 삼라만상은 비로소 떨림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가운데 사미 문경충의 무덤이 있었다. 그의 아내 밀양 박씨의 무덤과 나란히. 송림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언뜻 언뜻 보이는 고가(古家)와도 같다. 그 오래 된 집 앞에는 '사미남평문선생지묘(四美南平文先生之墓)'와 '판겸동지의금부훈련원사호음선생문공지묘(判兼同知義禁府訓鍊院事湖陰先生文公之墓)'라는 이름의 두 빗돌이 있었고, 그 하나엔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겸부는 사미 문경충의 자이다. 위에서 보듯이 스승은 그의 문인에게 박송당 이후 가장 군자다운 사람으로 사미를 떠올렸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호음 정사룡이 사미가 소요하던 정자에 와서 시를 지었고, 당대 도학의 수장이었던 스승 역시 그의 시에 화답하였다. 이것은 사미에게 있어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스승은 사미를 '애경(愛敬)'했다고 한다. 더욱이 스승이 사미의 학문을 인정하여 그를 자주 찾아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고 했다. 그 허여와 신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허여와 신뢰가 이같았으나 그는 1555년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죽음은 스승으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승은 사미와 놀던 옛터를 찾아와 호음 정사룡이 사미정에 쓴 시의 운자를 따서 칠언율시 세 마리나 남겼다. 「차호음제사미정운(次湖陰題四美亭韻)」이 그것인데,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1517-?)은 그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스승의 이 시는 말이 높고 뜻이 깊어 견해가 얕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평가했던 작품이다.

작품 (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스승이 현실세계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사미의 뜻을 칭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승의 의식은 현실성과 아울러 초월성이 역동적인 운동을 벌이면서 차원변화를 하고 있다. 두 성질이 때로 갈등하고 때로 화해하면서 보다 높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작품 (가)는 수련에서 보듯이 '망세(忘世)'와 '미망기(未忘機)'를 병립시키고 있다. 전자는 현실을 잊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현실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중구도 속에서 스승은 옛 친구를 떠올렸다. 옛 친구는 다름 아닌 사미 문경충이다. 그는 무예를 닦았기 때문에 문익공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추천받기도 하고, 1516년에는 결국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며 후에 구녕(仇寧) 만호(萬戶)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년에 현인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을 완전히 끊고 월여산 하 대지촌(大枝村) 후에 정자를 지어 사미라 하고 학문을 닦았던 것이다. 미련은 바로 스승이 이같은 사정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다.

작품 (나)에서는 이 시가 스승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스승은 61세에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삼가의 뇌룡사에 있었다. 이곳에서 약 12년간 강학활동을 하였는데, 단성소(丹城疏)로 널리 알려진「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자신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신명사명(神明舍銘)」 등을 이 시기에 지었다. 스승은 뇌룡사에 살면서 자주 사미를 찾았다. 이 시가 창작되던 시기는 수련에서 보듯이 대를 이을 아이가 태어난지 석달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이것은 이 시의 창작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결정소다. 스승이 44세 되던 해 남평 조씨 부인 소생의 차산(次山)이 죽었고, 52세 되던 해에는 은진 송씨 소생의 차석(次石), 57세에는 차마(次磨), 60세에는 차정(次 )이 태어났다. 함련에서 자신의 '대를 이을 아이'라고 했으니 맏아들 차석이 태어난 해인 52세이라고 해야겠으나 이 때는 지리산으로 들어갈 계획이 확실하게 섰던 때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차마나 차정이 태어난 때라고 해야겠는데, 그 가운데 차정이 태어난 해인 1560년, 그러니까 60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사전 답사한 것이 58세였다는 점, 경련에서 보듯이 당시 지리산 여행에서 여러 기생들을 데리고 가 노래를 불렀다는 점, 스승의「유두류록」에 다소 출입이 있기는 하나 이 작품의 미련에 보이는 '두류십파사우협(頭流十破死牛脇)'이라는 구절이 있다는 점, 역시 미련에서 보듯이 마음은 정해졌으나 지리산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로 보아「유두류록」을 쓰고 난 후, 지리산에 들어가기 전에 이 작품이 창작되었고, 세 달된 아이라고 하였으니 차정이 태어났던 1560년밖에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작품 (다)는 스승이 지리산 가운데서도 덕산동으로 들어갈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일찍이 스승은 만년에 살 곳으로 지리산의 여러 곳을 염두에 두고 답사하였다.「유두류록」에서 보듯이 '내 일찍이 이 두류산을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 간 것이 세 번이었고, 청학동(靑鶴洞)과 신응동(神凝洞)으로 들어 간 것이 세 번이었고,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 간 것이 세 번이었으며,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 간 것이 한 번이었으며,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 간 것이 한 번이었다.'라는 대목에서 사실의 이러함은 약여하게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스승은 덕산동을 택했다. 그 이유는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원시반본(原始反本)이 이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마지막 귀착점을 찾았던 것이다. 유가에서의 근원에 대한 탐색은 사물의 시원을 말하는 원두(源頭)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스승이 이 작품 함련에서 지적하였듯이 주자의「무이구곡」에 잘 나타나는 바다. 수련에 보이는 것처럼 심성의 근원에서 천리를 획득하는 것은 여기서 비로소 자연스러워진다.

덕산동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지었다는 측면에서 위에서 예거한 시편들은 중요하다. 스승의 지리산 덕산동에로의 입동은 가정이나 사회와 관련한 현실적 질서 저편에 있는 자유에 대한 구가 혹은 생명 근원에로의 회귀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연보』61세조에 의하면 스승에게는 적자가 없었으므로 가정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일을 아우 환(桓)에게 부탁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는 덕산동에 들어가 토지를 개간하여 거기서 나는 곡식으로 양식을 삼았다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합천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선산과 토지, 이와 관련된 제사 등을 모두 동생에게 맡긴 것이며, 이와 함께 장자로서의 여러 권리 역시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다 사미까지 세상을 떴으니 합천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작품 (다)에서「무의(無衣)」를 떠올린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무의」는『시경(詩經)』의「당풍(唐風)」과「진풍(秦風)」의 편명으로, 이 가운데 스승이 읊조렸던 것은「진풍」의「무의」가 아니었나 한다. 여기에는 동지적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첫장에서 "어찌 옷이 없어, 그대와 솜옷을 함께 입으리오. 왕명으로 군대를 일으키시거든, 우리 창을 수선하여, 그대와 한 짝이 되리라.(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脩我戈矛 與子同仇)"고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모서(毛序)'에서처럼 진나라의 용병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 이같은 기법으로 노래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스승은 이를 단순한 풍자시로 보지 않았다. 편안할 때 솜옷을 나누어 입기보다는 전쟁이 일어나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무부였던 사미에게 적용시켜 더 큰 동사(同事)의 정을 나누는 의미로 이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의 사미에 대한 신뢰감을 다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미는 5년 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허연 머리로 다시 왔으나 옛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회상은 여기서 시작되어 스승으로 하여금 '한'을 갖게 하고 스스로 '나그네'처럼 여기게 했다. 사미와의 친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회상으로 인한 이같은 정서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이 알아서 스스로 갈만큼 자주 찾았던 사미정, 그만큼 스승은 사미에 대한 회상도 많았다. 그야말로 회상은 거미줄처럼 얽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거미줄이 스승을 향해 칭칭 감돌아들지는 않았다.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확보해 나가고 있는 데서 이같은 사실이 감지된다. 작품 (가)와 같이 무부와 서생을 넘나들었던 사미를 그리워 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침몰되지는 않는다. 작품 (나)에서 지리산을, 작품 (다)에서 덕산을 떠올리고 있는 것에서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형식의 삶을 맞이하려는 스승을 읽을 수 있다. 즉 아우와 관련하여 가정적인 혹은 친구와 관련하여 사회적인 일련의 일들을 청산하고, 보다 근본적인 측면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근원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질서에로 편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커다란 종착점을 주시하면서 취한 스승의 이같은 태도는 사미의 무덤 주변으로 흐르는 가을 빛과 함께 아득한 후생의 눈 앞에서 반짝거렸다.

 

필자주:
이 글은「사미정(1), 강산풍월의 무언설(無言說)」(『남명원보』 제12호, 1998.11)을 이어 쓴 것이다. 여기에 사미정 가는 길과 사미정 전경이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 바란다. 그리고 이 답사에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사미선생의 아름다운 후손 문병춘(文炳春), 문점환(文点煥), 문기주(文琪柱) 씨에게 감사드린다. 즈믄해 그 새 빛을 맞아「남명문학 현장답사기」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아울러 감사드린다.
건승과 행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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