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7)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선생께서 51세가 되던 해, 신해년(1551)에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德溪 吳健 (1521~1574)이 와서 배움을 청했다. 덕계는 山陰에 살았는데 일찍이 自發하여 성취가 있었다. 少時에 함양에 있던 唐谷 鄭希輔(1486~1574)에게 나아가 배웠으나 이때 남명에게 大學, 中庸, 心經, 近思錄 등을 다시 배웠다.

남명 문인 가운데 座長에 속했던 덕계는 매우 과단성이 있는 독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집근처 淨水寺에서 근 10년 동안 글을 읽고 스스로 얻은 바가 컸으므로 이때 선생께서 그의 공부한 바에 대하여 강론과 발명이 절실하고도 철저함을 보았다. 그는 특히 大學과 中庸에 뛰어났으며 선생의 義理思想을 뒤에 벼슬에 나아가 公道를 체현한 인물로서 남명의 義理精神을 잘 계승한 首門으로 평가된다.

후에 그가 선생을 祭한 글에서‘학문하는 방도와 時務를 판별하는 뜻으로서 귀를 잡아 게으를까 경계하고 이끌어 도와 주심이 반복하고 지극하셨다’고 하였다.

또 뒷날 덕계가 벼슬길에 나아가 있을 때 出處에 대하여 엄중하게 처신할 것을 당부하고 시속의 폐단을 바로 보고 그 폐단을 구제 하기가 쉽지 않음을 편지를 띄워 경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남명은 당시의 시속이 上達을 위주로 하는 虛學을 중심으로 흐름을 지적하고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下學의 실천적 방도를 찾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玉溪 盧 과 介庵 姜翼과 함께 花林洞에서 노닐었다.

노진(1518∼1578)은 字가 子應, 호는 옥계, 본관은 豊川으로 함양에 살고 있었는데 뒤에 옥계집이 남아 전하며 강익(1523∼1567)은 字가 仲輔, 호가 개암, 혹은 松庵으로 본관은 晋陽으로 당시에 安義에 살고 있었는데 少時에 오덕계와 더불어 함양에 살던 唐谷에게 나아가 배웠다. 뒤에 남명에게 배웠으며 介庵集이 남아 전한다.

남명선생께서 만년에 德川에 들어가 강학할 때 공이 선생을 찾아 뵙고 易學을 질강하면서 몇 개월을 보내고 돌아오기도 하고 개암이 죽자 선생께서는 만사를 지었다.

개암이 옥계와 화림동에서 선생을 모시고 노닐며 시를 지었는데 "남명 노인께서 옥계를 이끌고 우리들까지 불러일으켰네"라고 읊었다. 당시에 때로 선생은 여러 선비들과 함께 산수간에 노닐며 흥기시키는 바가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해에 七峰 金希參이 방문하였다.

김희삼 (1507∼1560)은 字가 師魯이며 호는 칠봉이고 본관은 義城으로 당시에 星州에 살면서 남명과 더불어 從遊하였다.

칠봉이 敬差官으로 와서 강우지역의 여러 고을에 재난을 둘러보러 왔다가 이 때 선생의 계부당으로 찾아왔다.

선생은 일찍이 정사는 까다롭고 부세는 무거운데 흉년이 겹쳐 백성의 살림이 곤궁함을 걱정하고 탄식하여 마치 몸소 당하신 것처럼 여길뿐만 아니라 김공을 보고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방도를 말씀하시어 남김없이 털어놓으셨다. 이에 김공이 시를 지어 '고인은 靜坐하시기를 좋아하더니 오늘에야 이 분을 보았네'라고 하였다.

김공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선생은 만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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