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7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임고서원(臨皐書院)

韓 相 奎
(부산동주대 교수)

1. 생애

경북 영천군 임고면 우황리 포은 정몽주의 유서지에 자리 잡은 임고서원은 1999년 9월 18일 이 서원을 성역화하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포은의 神道碑와 詩碑 제막식이 전국서원향교서당 발전협의회 주최로 전국 유림의 대표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학술대회를 가졌다. 서원이 자리 잡은 터는 팔공산, 보현산, 운주산이 둘러져 있는 아래 청계와 석벽이 고을을 안고 돌아가는 곳, 옛날 부족시대 骨伐國의 근거지로 用武地之의 요충지로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은 신라에 와서 임고로 불리다가 고려 때는 永州, 조선 태종 13년에 永川이 된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런 곳에서 정몽주는 1337년(고려 충숙왕 6) 아버지 云瓘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임고면 우황동에서 출생했으니 고려 知奏事 鄭襲明의 후손이다. 어머니 이씨는 태몽에 난초화분을 들고가는 꿈을 꾸었다 하여 ‘夢蘭’이라고 불렀다. 그후 소년시절에 낮잠을 자던 어머니가 꿈에 배나무에 용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夢龍’으로 불렀다. 그후 18세 무렵 아버지가 역시 꿈에 周公을 만나면서부터는‘夢周’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포은이 성장한 고려 후기의 정국은 몽고의 침입 이후 元의 내정간섭으로 인적, 물적 손실이 극심한 가운데 조정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관직에 나간다는 것은 여간 지혜롭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입지가 강한 포은은 1360년 공민왕 9년 봄, 三場에 걸쳐 장원으로 과거 급제하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가 응시한 과거는 製述科(東堂試)로 文科 최고의 등용문으로서 사서오경을 풀이하는 經義와 스스로 포부를 피력하는 賦, 경국제민을 위한 對策을 깊은 통찰력과 光風霽月의 문장으로 당대 교학의 지침을 유감없이 풀어서 밝혀으니, 知貢擧 政堂文學 金得培가 흥분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이런 재주라면 소년 등과해도 넉넉할 터인데’ 하고 김득배가 특별히 불러 그 연유를 알아보았더니, 포은이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간 여묘를 하였기에 응시할 기회를 놓친 것을 알고는 더욱 그 인간됨에 감탄하였다. 포은은 관직 출발에 앞서 소년시절 어머니가 <白鷺歌>를 지어 훈도한 것을 가슴에 떠올리며 읊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어릴 때부터 지혜롭게 처신할 것을 가르친 어머니의 교훈은 그의 성품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학문과 관련 있는 예문관검열로 시작하여 얼마 뒤 女眞정벌의 명을 받고 병마사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여 개선하였으니, 그는 무인으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보여 주었다. 그 공으로 전농시승, 통직랑으로 승차하였으나 어머니의 喪을 당하여 이후 3년간 廬墓를 하였다. 탈상한 해가 공민왕 16년 12월에 예조정량겸 성균박사에 부임하였다. 이때 성균관 대사성은 牧隱 李穡으로 文名이 높았던 대학자였으며, 김구용, 정도전,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등 고려 유학자들이 전부 성균관에서 교수직으로 있었으니 과히 고려 유학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포은은 공민왕 21년 5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성균관에서 직강, 사성, 지제교 등 교학을 담당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아마 이 기간이 그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명나라와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을 풀 수 없었으므로 포은은 1372년 명나라에 서장관의 소임을 맡아 洪師範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무인도인 許山島 해변에 밀려와서 이 곳에서 11일 만에야 중국 해적선을 겨우 만나 抗州 근처인 明州까지 도움을 받아 명 조정에 자신이 맡은 소임을 간신히 전달하고 귀국하여 복명하였다. 1374년 경상도 안렴사의 직책을 받고 지방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살피며 안동지방에 이르렀을 때 공민왕이 9월 22일 시해되었다는 급보를 받았으니 이해 9월 27일이였는데 공민왕은 9월 22일 시해된 것이다. 포은은 말을 몰아 주야로 달려가서 10월 3일 개경에 당도하였다. 공민왕의 시해는 고려사에 간략히 기록되고 있으나 정확한 사인 전말은 알 수 없다. 뒤를 이은 우왕은 10세의 소년으로 조정에서는 이인임 일파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포은은 예문관직제학, 춘추관수찬, 성균대사성으로 있었으나 이인임 일파의 농간으로 경상도 언양에 유배되었다. 이때 대규모의 왜적이 침입하니 조정에서는 포은같은 뛰어난 전략가가 아니고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여론에 밀려 이인임은 포은에게 판도판서겸 助戰元師 직책을 맡겨, 이성계를 도와 전라도 운봉으로 가게했다. 여기서 포은은 왜적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는 문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상호군의 직책을 내렸다. 이후 최영 집권시 정2품의 삼사우사로 경제부처의 수장직을 맡아 민심을 수습하고 義倉을 세워 빈민구제를 하는 등 그 공이 지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조민수 등이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은 이성계 일파에서 독점되면서 우왕은 폐위되고 9살의 소년 창왕이 왕위를 계승하니 명목상의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1390년 포은은 수문하시중벽상삼한삼중대광의 정1품직을 제수받았으나 이성계와는 정국운영에서 그 방법을 달리하여 수차례 정도전으로부터 신왕조의 필연성에 대한 협조를 받고도 거절하였다. 1391년 4월 4일 이성계를 문병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서 난국을 풀어보려고 했으나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을 받고 돌아오는 길목인 선죽교에서 격살당했다. 방원(태종)은 포은의 초지일관된 고려조에 대한 충절에 반감을 품고 그의 심복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으로 하여금 시해하게 하였다 포은은 56세로 비운을 맞아 세상을 고했지만 한 시대를 장식한 높은 학문과 외교적인 식견, 뛰어난 전력가로서 고려사는 그를 평하기를 天分至高, 豪邁絶倫한 성품과 성리를 깊히 통달한 대학자로 보고 있다. 그의 시신은 그의 충절을 애도한 禹玄寶가 몰래 감추어 황해도 海豊에 가매장했다가 뒷날 향리 영천으로 운구 도중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 이르러 명정이 바람에 날리고 운구가 움직이지 않자, 생각하고는 이곳에 묘소를 정하였다. 고려는 정몽주 사후 3개월을 못넘기고 공양왕이 추방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니, 고려 475년간의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포은의 절의정신은 조선 태종마저 어쩔수없이 그에게 최고의 벼슬을 증직하고 文忠公의 시호로 받들고 후세에 문묘에 배향하는 등 그의 충절을 기렸다. 동시에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균관에 배향하고, 개성에 숭양서원, 용인에 충렬서원, 임고에 임고서원을 세워 그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

2.서원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포은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임고면 고청동에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555년에 <임고>라 사액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 36) 현재의 위치로 재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는 서원철폐로 훼철당하였다. 이후 1919년에 정부지원으로 다시 건립하여 祠字 文忠詞, 由正門, 興文堂, 유물전시관인 尋眞閣, 典祀廳, 修省齋(동재), 涵育齋(서재), 永光樓(문루)와 1999년 9월 18일 제막한 신도비각, 임고서원 사적비, 백로가·단심가·시조비, 유허비각(경북유형문화재 제272호)이 있다. 심진각에는 포은 선생영정(보물 제1110호), 소장전적(보물 제1109호), 포은집, 지봉실기 선죽 판본이 보관되어 있고 경내에는 4백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임고서원은 창립 이래 건물이 오랜 역사와 더불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방문풍의 쇄신과 교학에 큰 이바지를 하였으며 1643년(인조 21)에는 張顯光을, 1727년(영조 3)에는 芝俸 皇甫仁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포은은 성미가 매우 호방하였고 성리학을 깊히 연구하여 당대 李穡 다음으로 가는 학자였으며 五部學堂, 鄕校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장현광(1554-1637)은 안동인으로 조선중기 대학자이며 호가 旅軒이다. 재상 柳成龍의 추천으로 1595년 보은현감을 지냈으나 그는 관직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숙종이 내린 글에 포은의 정신을 읽을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