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즈믄해의 문턱에서

남명정신과 새 천년

權 淳 纘
(本院 理事長)

경(敬) 의(義)사상

예부터 강좌(江左)는 퇴계(退溪)요, 강우(江右)는 남명(南冥)이란 말이 회자되어 왔다. 대체로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퇴계학이 주류이고, 서쪽은 남명학이 주류라는 뜻이다. 과거 근 400년 동안 퇴계학에 비해 남명학이 침체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근래 남명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동시에 그 대중화에 노력하는 물결이 크게 일고 있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은 합천 삼가에서 탄생하였고 중년에는 김해 산해정(山海亭)과 삼가의 뇌룡정(雷龍亭)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만년에는 산청군 산천재(山天齋)에서 문인들을 지도하였다. 선생은 당시 유학(儒學)의 주류였던 성리학이 관념적 이론에만 매달렸던 폐단을 익히 알고 그 이론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소위 실천유학을 제창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된다. 자기 스스로 수양을 통하여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을‘경’, 밖으로 실천을 결단하는 것을 ‘의’로 표현하였다.(內明者敬 外斷者義) 즉 경은 자기존중, 가능성 자각, 주의집중 등 내면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의는 이를 실행한다는 행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선생의 생활자세는 입신영달이나 세속적인 야망은 아예 포기하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렇다고 청담이나 논하는 현실도피자도 아니다. 야인의 선비입장에서 언로를 통해 국정을 비판하고 백성의 구제에 몰두하였다. 선생의 이같은 학문과 사상을 추앙하여 오건, 정인홍, 최영경, 곽재우, 김우옹, 정구, 하항 등 기라성같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민본사상과 言路

남명사상 중 크게 돋보이는 것이 민본정신이며 이것이 언로를 통해 실천되었다. 선생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란 확고한 민주 민권의 신념을 가졌다. 백성의 곤궁함에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백성을 걱정하여 임금에게 무려 7차례나 상소(上疏)를 올려 잘못된 국정을 신랄히 비판하고 절실명쾌한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중에서도 목숨을 걸고 상소한 단성소(丹城疏)가 특히 유명하며 조야를 크게 진동시켰다. 민주·민본 나아가 외민(畏民)정신과 더불어 누차 상소를 올려 언로의 길을 턴 선생의 비판정신과 불굴의 기상은 오늘에도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선생은 민암부(民巖賦)란 시(詩)에서 왕을 배, 백성을 물로 비유했다‘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백성은 군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정권을 뒤엎기도 한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어디까지나‘물 위의 배’이지‘배의 물’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는 물의 이치를 잘 파악하고 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나라의 대권이 백성의 손에 있다고 언로를 통해 이를 확인시킨 선생의 신념에는 선각적 진보성이 역력하며 앞으로도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다.

대의(大義)정신

남명선생은 우리나라 교육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꼽힌다. 선생은 당시 학계의 주류였던 관념적 주자학에서 벗어나 실천유학을 자기의 삶으로써 수범하였다. 우선 덕성을 함양하는 삶의 과정 그 자체를 교육이라고 보고 수기(修己)와 극기를 강조하였다. 선생은 제자들을 각기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스스로 터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요체를 파악하여 꼭 실천에 옮기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교육방법은 그 당시의 교육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으로 요즘 주목을 받는‘특성화 학교’설립취지와 상통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강직과 정의의 신념이 투철하며 출처(出處)가 분명했다.

특히 선생은 김해 산해정 시절 왜구의 노략질을 목격하면서 멀지 않아 왜적이 침범할 것을 예견하여 제자들에게 충과 의로써 국난에 대처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성리학 외에도 지리, 궁마(弓馬), 행진(行陣)등 병법(兵法)도 아울러 가르쳤다. 선생의 서거 2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자인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을 위시한 50여 명의 의병장(義兵將)들이 영남지방에서 궐기하여 재산과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워서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의병장들의 정신적 지주는 스승의 경의사상에서 비롯한 대의(大義)적 실천정신이며 남명선생의 삶의 교육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남명정신 현재·미래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그 제자의 참변으로 근 350년간 연원가(淵源家) 이외는 거의 매몰되다시피 하였다. 남명선생에 관한 자료들도 일실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근 20년 전부터 남명학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학문적 성과는 상당히 올랐지만 일반인의 인식이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영우지방인 김해, 합천, 산청(당시 진주의 행정구역)에서 발원하였으며 그 중심이 진주다. 때문에 진주시에는 남명로(南冥路)라고 이름 붙인 거리가 있다(MBC에서 산청간 도로). 오늘날 남명정신은 경남인의 정신적 고향이요, 자존심의 상징이다.

옛부터 영우의 기질을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했다. 자기확립의 개성이 강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절의(節義)의 기풍이 높다. 대의(大義) 앞에서는 목숨을 던지는 기개도 드높다. 이러한 기질은 남명정신에 의하여 한층 고양되어 오늘까지 면면히 역사를 수 놓았다.

임진란 때 영남 의병장들이 남명문인이었고, 1862년 압정에 항거한 진주민란(民亂), 1923년 민권개혁을 절규한 진주의 형평(衡平)운동,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의거 등은 남명정신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학의 폐단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정보화시대에서 개인이나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들은 당연히 청소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인성중시, 저항정신 등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요소들도 많다. 유학을 비판계승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남명사상이 이와 맥을 같이한다는 견해가 많다. 새 천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한국유학의 거목인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오늘과 내일에 접목되는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 이 글은 <신경남일보> 제 13685호 (1999년 12월 25일자)에 특집으로 게재한 것인데, 전문을 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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