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淵源 私淑人物考10

노파(蘆坡) 이흘(李屹)

史 載 明
(本院 硏究委員)

이흘(李屹, 1557∼1627)의 자는 산립(山立)이고, 호는 노파(蘆坡)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삼가(三嘉)에 거주하였다. 그는 부친 사과공(司果公: 副司果公)과 어머니 이씨(李氏: 廣平君 휘 能의 후손으로 海南縣監 휘 順祖의 손녀요, 副司直 휘 士訓의 따님) 사이에 가정(嘉靖) 36년 정사(1557, 명종 12년) 6월 30일 신해에 선생을 함안군 가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시문집으로는『노파집(蘆坡集)』 5권 3책이 있는데, 그의 문집에는 조임도(趙任道)가 지은 서(序)와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를 비롯하여 권1에는 시(詩) 81제 117수가 있으며, 권2에는 시(詩) 50제 64수와 부(賦) 2편이 있다.

권3에는 표(表) 2편, 론(論) 1편, 책(策) 1편, 소(疏) 2편, 서(書) 6편, 서(序) 6편, 발(跋) 2편, 기(記) 1편, 설(說) 1편, 잡저(雜著) 2편이 있다. 권4에는 제문(祭文) 12편, 통문(通文) 1편, 묘비문(墓碑文) 3편, 행장(行狀) 3편, 상량문(上樑文) 2편이 있으며, 권5에는 부록으로 만장(輓章) 47편, 제문(祭文) 12편, 행장(行狀) 1편, 묘갈명(墓碣銘) 1편, 고암서원상량문(古巖書院上樑文) 3편, 봉안문(奉安文) 1편, 상향문(常享文) 1편, 환안문(還安文) 1편, 발(跋) 1편, 기(記) 1편이 있다.

고려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悤言)을 시조로 하는 그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蘆坡集』,「世系圖」 참조.

노파 이흘의 생애에 관하여 문집을 통해 살펴보면 7세 때(1563년, 계해) 백부(伯父) 진사공(進士公)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진사공은 남명선생의 문인이다(「年譜」).

8세 때(1564년, 갑자) 능히 글을 지었으며, 말은 어눌하나 본 것을 기억함은 매우 민첩하여 비록 숙독하고 공력을 쌓은 선비라 할 지라도 거의 따라가지 못하였다.

11세 때(1567년, 정묘) 산재(山齋)에서 독서하였다. 이 때 합천 주국신(周國新)과 더불어 같이 배웠는데, 하룻날 밤에 주(周)가 가위에 눌림으로 인하여 기절하니, 이불로 신체를 덮어주고, 굳게 그 곁에 앉았다가 자정이 지난 뒤에 사람이 바깥에서 오는 것을 보고 알려주었다. 그가 처음부터 달려가서 알려주지 못한 것은 본가가 멀고 곁에 다른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에 주가 이내 소생하였다. 대개 그가 어린 나이로 비상의 변란(變亂)을 만나서도 처리하기를 조용히 하니 그 정신과 기백을 가히 상상할 수가 있다.

14세 때(1570년, 경오) 사기부(史記賦)를 지었다. 그가 사략부(史略賦) 150여구를 지으니, 외종숙 황곡(篁谷) 이칭(李 )이 가지고서 갈천(葛川) 임훈(林薰)선생에게 보였다. 갈천선생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장차 크게 성취함이 있으리니 힘써 가르쳐라.' 하였다.

31세 때(1587년, 정해) 가을에 향해(鄕解: 鄕試)에 응하여서 양 시험(생원진사과초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32세 때(1588년, 무자) 봄에 김의원(金義元) 방(榜)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33세 때(1589년, 기축) 읍의 군수가 향임(鄕任)으로써 사과공에게 맡기니, 선생이 그 때 모친 상중이라 글을 올려 사정을 말하니, 읍의 군수가 편지의 글을 보고 선생의 효도에 감동하여 간절한 예로써 그를 보내고 어버이를 봉양할 필수품을 대주었다(「行狀」)고 한다.

36세 때(1592년, 임진) 봄에 외종숙 황곡(篁谷) 이칭(李 )을 배알하러 갔다. 39세 때(1595년, 을미) 봄에 사과공(司果公)을 배행하여 비어천(飛魚川)을 유람하였다. 사과공(司果公)이 과거공부 폐할 것을 허락하자 그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옛 말에 이르기를, 아들을 아는 데에는 아버지만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하더니, 진실로 그러하다.'하고, 드디어「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이라는 부를 지었다. 뒤에 또「죽정주인종국설(竹亭主人種菊說)」을 지어서 그 뜻을 보였다. 그는 이로부터 오로지 낯빛을 잘 받드는 효도에 힘을 써서 좌우에서 어김이 없었다.

40세 때(1596년, 병신) 진사(進士) 정건(鄭 )이 와서 배웠고, 41세 때(1597년, 정유) 왜구가 들어닥치자 성주로 피난하였다. 42세 때(1598년, 무술) 성산(星山)에서 금릉(金陵)으로 이우(移寓)하여 호서(湖西)로 향했다.

그는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과 진사(進士) 정건(鄭 ) 등이 함께 하였다. 길에서 성리서(性理書)를 얻었다. 또한 고인(古人)의 잠(箴)과 명(銘)의 도서를 구하여 한 권을 만들어「숙흥야매(夙興夜寐)」,「경재(敬齋)」 2잠을 일생토록 수용하였다.

병화로 인해 서적을 모두 잃었는데, 우연히 성리(性理)의 여러 책이 길위에 책권에서 빠져 나온 것을 얻었다. 그것은 주렴계의『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강절의『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관물내외편(觀物內外篇)」이었다. 그 글이 무릇 10편인데 있는 것은 아홉에 그 하나는 파괴되고 흐려지고 없어진 것도 있었다. 선생이 그것을 아까워해서 다른 책에서 찾아서 손수 써서 메꾸었고, 또 고금명유들이 지은 바의 잠(箴), 명(銘) 도서 등을 구하여 모아 한 권을 만들어 책상위에 놓고 말하기를, "숙흥야매(夙興夜寐)와 경재(敬齋)의 두 잠은 때때로 의거해야 할 것이요, 학자들이 진실로 능히 마음으로 얻어서 체험해야 할 것(「行狀」)"이라고 하였다.

43세 때(1599년, 기해) 봄에 고향으로 돌아와 대평리(大坪里) 회향촌(回鄕村)에 복거(卜居)하면서 희정당(喜靜堂)을 만들고, 여름 4월에 막수동(莫愁洞)을 유람하였다.『벽진유고(碧珍遺稿)』를 지었고 가을 7월에 동계(洞 )를 고쳤다.

44세 때(1600년, 경자) 여름에 남산 아래에 죽정(竹亭)을 지었다.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와 창주(滄洲) 허돈(許燉)이 와서 배웠다.

45세 때(1601년, 신축) 비암서당(鼻巖書堂)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부터 선비라고 일컫는 자들이 독서가 어떠한 일인지를 알지 못하자 그가 이에 근심하여서 집에서 서숙(書塾)을 차려서 생도들을 가르쳐 인재를 성취시키는 것으로써 자기의 의무를 다하였다(「行狀」).

46세 때(1602년, 임인) 순찰사(巡察使) 김신원(金信元)에게 상서(上書)하였다. 그가 방백(方伯: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서 한가한 청년들을 모아 학업을 닦아 지키게 하였으니, 허굴(虛窟)의 죽정(竹亭)과 비암(鼻巖)의 서당(書堂)이 이것이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의 학자들이 다투어 학업을 물으러 와서 서재가 넘쳤다. 바른 길로 가르치고 재능을 따라 장려하여 나아가게 하였다(「行狀」).

48세 때(1604년, 갑진) 고암서당에 있었으며, 다음해(1605년, 을사)에 진사(進士) 정이도(鄭以道)가 와서 배웠고, 50세 때(1606년, 병오) 죽정(竹亭)에 머물렀다.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 창주(滄洲) 허돈(許燉), 이준(李浚), 정이도(鄭以道) 등과 덕성을 훈도하였다.

51세 때(1607년, 정미)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가 와서 뵈었고, 다음해(1610년, 경술) 봄에 황계(黃溪)에 갔으며, 55세 때(1611년, 신해) 비암서당에 있었다.

56세 때(1612년, 임자)『입암조공식시가록(立巖趙公埴詩歌錄)』 및『추모록서(追慕錄序)』를 지었다. 겨울에 부친 사과공이 천수(天壽)로써 마치니 향년 81세였다.

58세 때(1614년, 갑인) 아들 회일(會一)에게 명하여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신구하는 소를 지었고, 60세 때(1616년, 병진) 설중(雪中)에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유람하러 갔다. 61세 때(1617년, 정사) 초여름에 동지와 더불어 남호(南湖)로 배를 띄워 유람하였다.

65세 때(1621년, 신유) 노파(蘆坡)로 이사하였다. 그는 장자(長子)가 살아있을 때에 일찍이 이곳에 새로 거처할 몇칸의 집을 지었으며, 차남의 묘가 또 집 뒤 산기슭에 있었다. 그런고로 미리 한 묘자리를 정하여 죽은 뒤에 만고(萬古)의 집으로 삼았다. 악견(岳堅) 박서구(朴瑞龜)와 더불어 여름에 용문사(龍門寺)를 유람하였다. 66세 때(1622년, 임술) 「노입재시집발(盧立齋詩集跋)」을 지었고,「정죽곡극순우연정기(鄭竹谷克順友蓮亭記)」에 발(跋)하였다.

67세 때(1623년, 계해)『강목절요(綱目節要)』를 고쳤는데, 이는 문생 정이도(鄭以道) 등과 더불어 뽑아 취하고 베껴 써서 몇 권의『사기(史記)』를 만드려고 하였고,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의 행장과 주부(主簿) 송덕형(宋德馨)의 묘지를 짓기도 하였다. 양원내내(梁原奈內)로 이거하였다. 동계(東溪) 권도(權濤)와 더불어 진양(晋陽)으로 능허(凌虛) 박민(朴敏)을 방문하였으며, 박민을 방문하고 배를 띄어 침류정(枕流亭)으로 유람하였는데, 이 때 동계(東溪) 권도(權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과 함께 며칠간 유람하였다.

68세 때(1624년, 갑자) 봄에 삼산(三山)으로 돌아왔으며, 용암서원(龍巖書院)에 가서 머물렀다. 그는 원중(院中)의 장이 되어 일들에 마음을 다하고 구비구비 마땅하게 하였으며,『고려사(高麗史)』와『퇴도문집(退陶文集)』을 인쇄한 것이 모두 그의 지휘하에 나왔다. 이 해에 무금정(無禁亭)을 만들었다. 이는 제자 어화곤(魚化鯤)과 최중해(崔仲海)가 산 아래에 풀집을 얽어서 그를 위해 은거하여 휴식할 곳으로 하였으며, 그가 무금(無禁)으로써 이름하였으니 대개 동파(東坡)의 적벽부(赤壁賦) 가운데의 말을 쓴 것이다. 몽계사(夢 寺)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덕암(德庵) 허홍재(許洪材) 및 창주(滄洲) 허돈(許燉)이 참여하였다.「하창주묘지행장(河滄洲墓誌行狀)」을 지었다.

그가 원장(院長)이 된 후 무엇보다 치중(置中)한 일은『퇴계집(退溪集)』의 인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인측(南人側)과의 화해였던 셈이다. 이는 북인(北人) 몰락 후의 우도(右道)에 있어서는 시세(時勢)의 필연적 추이이기도 하였지만,『변무록(卞誣錄)』에 수록된「대구소유삭적김영통문(大丘疏儒削迹金瑛通文)」이나「영주통문(榮州通文)」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반정 직후부터 실제로 퇴계학파측에 의해 우도(右道)의 대북잔당에 대한 색출 및 징계 행위가 빈번히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며, 일단 그들에 의해 지목되면 그 본인과 문중은 사족(士族)으로서의 입지(立地)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으니, 인조(仁祖) 즉위 초년의 용암서원(龍巖書院)의 피폐한 상황도 이러한 여건들과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吳二煥,「『南冥集』 諸板本の成立とその思想史的背景―17·18世紀の刊本を中心として―」, 京都大學博士學位論文, 1997, 85쪽 참조).

69세 때(1625년, 을축) 봄에 능허(凌虛) 박민(朴敏)과 더불어 아림(娥林)으로 모계(茅溪) 문위(文緯)를 방문하여 수승대(搜勝臺)를 유람하였다. 70세 때(1626년, 병인) 여름 4월에 바람의 사특한 질병을 빌미로 1년을 침면(沈綿)함에 침과 약이 효력이 없었다. 71세 때(1627년, 정묘) 정월에 능라동(綾羅洞)으로 병을 피해 거처하였고, 2월20일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사후 1691년(숙종 17년, 신미)에 사림(士林)이 금성산(金城山)아래에 고암서원(古巖書院)을 세웠다. 영묘(英妙) 5년 기유(己酉)에 한계(寒溪)로 이건(移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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