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川書院 踏査記

趙 仁 元
(顯正會員)

1. 德川書院을 찾아서

단기 4332(1999)년 9월 11일.

顯正會에서 주관하는 열한 번째 역사유적 답사 여행에 참가하였다. 이번에 답사하는 곳은 慶南 山淸郡 失川面 院里 所在 南冥 曺植선생을 主享으로 뫼시는 조선 삼대서원의 하나인 덕천서원을 1박 2일 예정으로 찾는 것이었다. 오전 7시 50분경 서울 탑골 공원 西門 앞에 모여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비는 오지 않고 흐리기 만한 날씨여서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顯正會에서 朴成壽 副理事長과 尹汝德 이사께서 引率者로 나오셨다.

이번 답사에 同參한 人員은 35명이었는데 이 중에는 전, 현직 교수가 16명이나 되었다. 다른 때에 비해 참가 인원은 좀 적은 편이나 참가자 水準에 있어서는 만만치가 않았다. 마치 잉어들이 노는 틈에 피라미 한 마리가 끼여 든 기분이다.

정현택 남명학연구원 이사가 서울에서부터 동승하여 시종 안내 말씀을 해 주었는데 텁텁한 경상도 사투리로 유머를 섞어가며 통과하는 지역의 역사와 인물에 관해 구수하게 설명을 해주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이사의 안내나 설명이 없을 때에는 동행 석학들이 돌아가며 좋은 말씀을 들려주었다.

김호일 중앙대 교수는 書院의 역사와 기능에 관해 말씀하였고, 이응백 교수는 한글 한자혼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며, 한글 전용 교육으로는 일등 국민은 커녕 이등 국민도 만들 수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버스는 어느 사이 움직이는 강의실로 변해 있었다. 지루한 줄 모르고 가는 사이 벌써 거창 땅에 도달하였다. 男根石에 얽힌 신수근의 전설을 들으며 준비해 간 도시락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소풍 나온 기분으로 먹었다.

점심 후 함양의 學士樓와 上林을 찾았다. 학사루는 孤雲 崔致遠 선생이 이곳 太守로 계실 때 노닐던 정자이고, 上林은 護岸林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원래는 上林과 下林이 있었는데 下林은 日政 때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고 상림은 공원으로 잘 조성되어 있었다. 역사유적도 保存하고 住民의 휴식공간을 제공하니 일거양득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溪書院과 靑溪書院을 찾아가 焚香하였다. 一 鄭汝昌 선생과 濯纓 金馹孫 선생을 각각 主享하는 곳이었는데 약 50미터 거리를 두고 나란히 이웃해 있었다. 서원이 이렇게 가깝게 나란히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산청 땅에 들어서 綿花始培地를 둘러보았는데 始培地 史蹟 건립문제로 남평 文氏(文益漸 後孫) 문중과 진양 鄭氏(장인 鄭天益 後孫) 문중 간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다. 양 문중이 합심해서 조성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2. 반갑게 맞아주는 書院 關係者들

면화시배지에서 덕천서원까지는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였다. 냇가를 따라 잘 정돈된 포장도로였다. 서원 못미처 약 1킬로 지점 좌측에 山天齋가 보이고 우측 산기슭에는 남명 선생의 墓林이 보였다. 이 곳은 내일 찾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바로 덕천서원으로 올라갔다. 서원은 도로 오른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좀 넘어 서원에 도착하니 曺又煥 덕천서원 내임(남명 12대손)과 金敬洙 南冥學硏究院 事務局長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曺內任께서 “남명 유적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박 시설이 불편한 점 이해해 주시고 보람있는 답사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간단한 인사말을 하셨다.

일행은 書院本堂(敬義堂) 대청 마루에 旅裝을 풀고 容衣를 가다듬은 다음 남명 선생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崇德祠로 올라가 박성수 교수가 대표로 분향을 하고 일동은 재배로 참례하였다.

이어 경의당에서 김경수님의 “덕천서원의 역사와 남명 선생의 敬義 철학”에 관한 강의가 약 50분간 있은 후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강의 요지는 덕천서원은 남명 사후 4년뒤 제자들에 의해 덕산서원으로 창건되었고 그후 사액서원이 되면서 덕천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日軍에 의해 燒失된 것을 1920년대에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다.

남명 선생 제향은 매년 3월과 9월의 上丁日에 올리고 양력 8월 18일에는 선생의 탄신을 추모하는 南冥祭가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다 한다. 이 때에는 全國 各地에서 수천 명이 찾아와 밥쌀을 십 수말(斗)해도 부족하다고 한다. 그리고 각처에서 수시로 수련을 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아오는데 방학기간에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서원 이용이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남명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6월 26일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인천 李氏 외가에서 태어나 1572년 2월 8일 지금 산천재가 있는 곳에서 72세를 일기로 별세하시었다. 퇴계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나시고 퇴계보다 1년 2개월 뒤에 돌아가시었다.

이 두 선생님은 朝鮮朝 儒宗으로서 영남유학의 左退溪 右南冥의 쌍벽을 이루며 많은 학문업적을 남기고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남명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요약하면 “敬義” 두 글자로 집약된다고 한다. 안으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修己가 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實踐이 義라는 것이다. 선생은 공허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실천과 궁행을 중시하여 實學 鼻祖로 꼽기도 한다. 이러한 선생의 문하에서 당대의 名儒, 碩學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高弟인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3대 의병장을 비롯해 수 많은 의병장이 討倭 唱義로 7년간의 전란을 승전이 되겠끔 크게 공헌하였다.

강의가 끝난 후 서원 측으로부터 지리산 청정 산채 비빔밥과 약주 술을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우리 서원을 찾아온 손님에게 素食과 一杯溥酒나마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이 서원의 인심이었다. 군데군데 모여 앉아 남은 술을 마시며 밤 늦도록 환담하다가 유서 깊은 敬義堂과 東, 西齋에 나뉘어 잠자리에 들었다.

3. 德川書院의 이모저모

다음 날 (9월 12일) 아침 6시경 기상하여 유덕골을 거쳐 중산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書院 北쪽으로 지리산의 主峰인 天王峰이 웅장한 모습으로 한 눈에 들어오고 안개 낀 골짜기에서는 맑다 못해 푸른 玉水가 소리치며 흘러 내려 서원과 산천재 앞으로 흘러가고 있어 말 그대로 綠水靑山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 잡은 덕천서원의 風景은 한 폭의 동양화요 仙境이었다. 이렇듯 좋은 환경과 淸高한 스승 밑에서 영재들이 수학하였으니 인재들이 배출될 수 밖에 없겠구나 생각되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즐겨 암송하던 時調가 떠올랐다.

이곳 일대는 남명 선생이 61세 되는 해에 일생의 마지막 道場으로 지리산을 바라보는 德山 絲綸洞에 山天齋를 짓고 平生 동안 갈고 쌓아 올린 자신의 학문과 도덕,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臨終時까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선생의 地理와 景勝을 보는 넓고 깊은 안목에 감탄이 나왔다.

덕천서원의 배치를 보면 냇가에 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서원 맨 앞쪽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그 뒤에 수령 43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나그네를 맞아 서원의 역사를 無言으로 말해주며 서 있었다. 外三門(時靜門)을 들어서면 목백일홍이 반겨주는 左右便으로 東西齋, 正面으로 本堂인 敬義堂이 대위에 우뚝 서 있다. 敬義堂을 돌아 내삼문(神門)을 들어서면 남명 선생 신위를 모신 숭덕사가 있다. 위패에는“남명조선생”이라고 五字만 적혀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그리고 서원 서편에 관리사가 있고, 현대식 화장실(좌변기)과 샤워시설을 갖춘 별도건물이 便利하며 다른 서원과 특별한 점이다.

아침밥을 맛있게 먹은 후 南冥 幽宅과 山天齋를 찾았다. 묘소는 소나무 숲 속에 남향이었다. 선생의 생전 뜻을 받들어서인지 墓碑와 床石만을 갖추어 검소하였다. 묏자리는 선생께서 생전에 직접 정한 자리라 한다. 선생의 묘소 바로 밑에는 두번째 부인 恩津  宋氏의 묘가 있었다.

일행은 남명의 묘소에 참배하고 산천재로 내려왔다. 남명 선생께서 직접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산천재는 前面 3間 側面 2間의 팔작 기와집이었으며 옆으로 남명 문집의 목판을 보관하는 藏板閣과 관리사가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산천재의 내력과 함께 남명 선생의 시 2수가 적혀 있어서 선생의 체취를 느끼게 하고 친근감이 들었다.

4. 다시 찾고 싶은 南冥 聖地

지금까지 남명 선생에 관해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알았던 것을 이번 답사기회를 통해 조그만 수박 한 쪽을 맛보았다고나 할까.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발로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곳 덕산 일대는 남명 선생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聖地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요즘 보기 드물게 서원의 기능이 활발한 곳이어서 마음이 흐뭇하였다.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나만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오고 싶은 곳이다. 청소년들에게도 전통문화 학습도장으로, 어른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흐트러지고 때묻은 심성을 새롭게 가다듬는 수양도장으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다시 찾아올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합천 가야의 孚飮亭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음정은 산림영상인 來庵 鄭仁弘 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곳인데 본래의 위치는 현재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부음정에 도착하였다는 전갈을 받은 사손 정상원씨와 鄭琪哲(향토 사학자)씨가 門中墓域의 벌초를 하다 말고 달려왔다. 人事를 나눈 뒤 鄭琪哲님의 ‘來庵과 임진왜란’에 관해서 약 30분간에 걸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來庵 山所를 참배하였는데 이 곳에서도 찾아온 손님을 그저 보낼 수 없다며 서둘러 떠날려는 길손을 붙잡고 점심과 동동주로 우리를 접대하는 것이었다. 명현의 후손 후학들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천서원에서도 부음정에서도 名賢의 후손 된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생활하는 것으로 보였다. 훌륭한 선현을 가졌다는 것은 후손의 자랑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자랑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짧은 1박 2일 간의 답사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여태까지 미처 몰랐거나 편향되고 굴절하게 기술된 우리 역사 즉, 壬亂前後의 主敬果義의 江右學風과 그 儒脈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참으로 유익한 답사 여행이었다.

귀경 길에 고령 가야대학교 內의 高天原 故址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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