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穗-南冥先生 陰德으로

鄭 鉉 澤
(本院 理事)

1950년 한국전쟁의 그 모진 傷痕이 채 아물지도 않은 그 해 늦가을에도, 山村 즉 근 70~80여 集姓村이 世居하는 우리 동네는 예년과 같이 원근의 학식 깊고 德望이 높은 접장(訓長)을 모셔오고자 집안의 어른들이 나들이를 하시고, 재실(齋室)이 퇴락했다 보니, 동네 큰 사랑방을 물색하여 약 4개월 여를 거처할 곳과 음식이며 옷가지, 이부자리 걱정을 하시던, 반세기 전 집안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해 지워지지 않는다. 가을 타작이 끝나고 선영묘사도 끝날 무렵부터 새해 이른 봄 못자리 준비할 때까지의 약 4~5개월의 閑村 靑少年들에게 의무적으로(?) 眞書(漢文)를 배우도록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한여름 2~3개월간 할때도 있었다. 국민학교, 중·고등학교의 동하기 방학기간과 맞아 떨어지니 동네 글방에는 7살 철부지 소년부터 20대의 旣婚 형님이나 叔行들이 그 학력 수준이 맞게 천자문에서 經傳이나 詩文, 예컨대 古文眞寶나 律詩를 講하고 배워야 했다.

1. 남쪽 어두운(南冥) 先生이 누군가?

이와같이 집성촌 향당의 수장들이 결정한 교육 節目에 따라 9살배기 나 역시 6.25 나든 그 해는 그전 해에 通한 기실 뜻도 모르고 달달 외웠든‘명심보감’‘사자소학’에 이어서‘史略’을 배워야 했다. 그 당시의 순서는 아마 通鑑, 論語, 孟子…….이런 순이었을 것이다.

그 해 어느 차가운 겨울 한밤 중 제일 큰집 사랑채 글방에는 學童(?)들이 이미 귀가하고 집안 어른들과 접장(훈장) 어른만이 남아서 古談 野話를 즐기시고 계셨는데 그럴 때면 집안 大小가에서 돌아가며 술, 김치감, 고구마(삶은)를 큰 대그릇에 담아 어른들에게 갔다 드리곤 했다. 그런 심부름을 노상 하다보니 국민학교 3-4년 草童에 불과한 내 귀에‘南冥先生과 來庵先生, 南冥門下 48家’등의 낯설은 어휘가 자주 자주 자리 잡게 되었으나, 그 무서운 접장이나 어른들에게는 감히 물어볼 엄두도 못내고, 방학이 끝나서 젊은 총각 담임 선생에게 망서리다 물어보니 曰“남쪽, 어두운 선생! 나도 모르겠는데!”

한참 세월이 흘러 중학교에 들어가 국어(시조)시간과 국사시간에서야 겨우 남명조식 선생과 내암 정인홍 대감이 누구인지는 어름풋이 해독하게 되었다.

却說하고, 약 10餘年 成均館 선비학당에서 周易을 수강하는데 어느 가정주부 학생이 曰 “鄭선생님,‘남쪽 먼 바다’(南冥)가 무슨 뜻이요?”기가 찼다.

평소 내 딴에는 그래도 오기가 철철 넘쳐서 ‘退栗’일변도의 칭송에 무조건적 부정 내지 반항의식과 낡은 지역정서나마「嶺右學脈」의 후손된 긍지로 자못 아마추어로서는 그런대로 學的 무장이 되어 있었다. 해서 강사‘S’선생의 양해를 구해 莊子 逍遙遊하며, 敬義의 실천철학이 어떻고 光海期 大北과 龍蛇之亂의 討倭義將이 몇십명이 배출됐다느니……. 하면서 어설픈 홍보役을 자청했다. 그렇게 畿湖나 江左 출신의 유림들에 맞서 외로운 고전을 숱하게 했는데 게중에는 몇몇의 굳은 참선비들도 있었고, 그간 수삼차 진주나 덕천에 현장견학을 사실상 내가 안내하면서 소루한 학문적 밑천이나마 눌변으로 설파해서 그런대로 이제는 성균관을 상시 출입하는 유림들은 거의 남명선생을 상당수준 깊이 있게 알거나 아니면 그전같이 거부적 반응은 많이 稀釋 내지 解消된 경향이다. 去月의‘H’단체, 한국 최고의 석학들로 구성된 조직에서 德院과 來庵 故址를 다녀갔다. 물론 내가 주선하고 서원과 연구원에서 지원했고 瑞山門中에서도 밀어주었는데 그 분들은 성장기에 인습적으로 왜곡되게 머리속에 박혀있던 江右學脈과 그 철학, 仁祖反正에 관한 의식을 많이 自省하게 됐다고 실토했다.

어쩌다가 유림과 더불어 野遊會에 참가하여 自己소개를 종종하는데 나는 감히 건방지게 자칭‘남명학연구원 서울연락소장’을 거창하게 과시한다. 지금도 翰林院 박사과정생은 날 호칭해서‘鄭所長任’, 정녕 듣기 싫은 감투는 아니더라!

2. 거! 조(曺)현택氏 나와서 남명선생 이야기 좀 하소.

어느 핸가 이른 초봄 寒雪이 첩첩이 쌓인 박달재를 넘어 순흥땅 文成公 安珦 先生의 紹修서원에 무슨 행사가 있어 관광버스 가득히 유림단이 가게 됐다. 일행중에 나서기 좋아하는, 이미 고인이 되신‘A’선생이 먼 길에 심심하니 나를 앞자리에 세워서 지나가는 차도의 관광안내를 시키고자 불러세워 가로되, 나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고귀한 진양정씨(晋陽鄭氏)를 그만 깜박잊고 나를 남명조식 선생의 후손으로 착각하고는“남명학회(?) 서울사무소장이시고, 외국도 많이 나들이 해서 박학다식하신 조현택 이사를 소개합니다.”

이런 자리, 이런 계제에 내가 무슨 말로 항변, 정정을 하겠나? 이래서 만부득이 마이크를 잡고는 시근방지게“따쟈 니먼 하오? 워 밍쯔 쟈오 챠오시엔쪄”(大家 們好? 我名字 叫 曺鉉澤) 우리말로 차마 성(姓)을 바꾸는 不孝는 내 입으로 할 수 없고, 분위기가 또 그렇고 그러하니 서투른 漢語로 시선을 모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내 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태반이 넘지만 그저 그렇게 그 날은 넘어갔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유림들이 무슨 행사로 모일 때는 방명록, 무슨 時到記 하면서 참석자 이름을 쓸제 반듯이 거주지와 관향 및 성명을 쓰는데 내가 마침 이름을 안 썼더니 그 누군가가 代筆하면서 친절히도‘瑞山人 鄭鉉澤.’일이 끝나고 헌성금 집계를 내가 하다가 이것을 발견하고는 하도 기가 막혀“누가 또 우리 할배 팔아먹었네!”某人이 應對曰“어 영상 내암 정인홍 선생 후손아니오? 현택氏는 남명과 내암 빼고 나면 날라간 파랑새 아니오!”

3. 남명이 뭐 했던 분이요?

잘 알다 시피 지난 1990년 7월부터 文體部가 민족문화발전에 공이 크고 국난극복과 개혁에 큰 업적을 남긴 선인들을“이달의 문화인물”이라고 지정해서 문화진흥 행사를 매달 해왔다.

94년 말께 총회 참석차 진주에 갔다가 문체부가 95. 2. 22에 남명선생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돌올히 외쳐 그 행사 장소는 필히 성균관 유림회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더니 동석하신 천하호인 伽庵 鄭琪哲 先生 즉 진짜 영상 후손 鄭博博士님도 적극 지지찬동하시고, 권 이사장님과 조옥환 사장님 등 열석하셨던 거유들이 그런 방향으로 서울서 일을 추진해 보라고 하찮은 저에게 하명하셨다. 이리하여 1995. 1. 1. 새해 초부터 2월 하순까지 생업에 쫓기면서도 열심히 뛰었다. 지나고 보니 내 딴에는 든든한 배경(남명관계 조직과 자금) 덕으로 제법 어깨 힘께나 썼던 모양이다.

당시 문체부 문화진흥과, 문예진흥원, 성균관 사무처, 한국 한시(漢詩)협회, 성균관 동문회, 성균관 예절학교, KBS 제1라디오의 작가, MBC 특집 드라마 편성PD, 국립중앙도서관 열람봉사과, 성균관 유림회관 지하식당, 호텔물색등……. 이런 관계처에 사전 교섭이나 행사준비를 협의해서 그 결과를 진주의 김경수 국장님에게 통보하고 추가 지시를 받곤 했다. 한데 당초 생각대로 일이 잘 진척안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니 걱정이 되서, 이를 때는 응당 내가 잘 써먹는 비장의‘時務策’이 있는데 바로 영상 후손 가암 정기철 선생을 上京토록해서 같이 획책하고 상의하는 것이다.‘南冥門下 48家 后孫間의 世代之交’가 유별난 것은 이래서 좋았다.

몇차례 문체부 실무진과의 세부적 협의가 진전이 잘 안되서 담당 계장(사무관?)‘L’ 某氏를 영상 후손과 같이 정중히 배알 했는데 이 正五品通德郞 어른께서 첫 말씀이 曰“남명(선생 칭호를 했든가?)이 뭐 했던 분(사람)이요? 나는 체육분야에 근무 했기에 우리 역사는 사실 잘 모릅니다.”듣고 있든 천하호인 영상 후손의 안색과 눈빛이 그만 일그러진다. 내가 얼른 가로채서 대충 설명드리고 明日 재차 오겠노라 하고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領相 후손 曰“참으로 한심하데이!”, “참! 그 양반 나무라다가 무슨 꼼수가 있오? 이게 다 來庵先生의 廢母殺弟 덕이요, 덕원이 강건히 버티고 있는 한 나는(남명선생) 결코 죽지 않는다 했지 않오. 그러니 내암이 즉 남명아니오. 중앙청 正五品이 그 소리하니 내암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오래가오?”내가 짐짓 알면서도 정선생의 生氣를 건드려 청진동 수육집에서 추운 겨울 날씨에 어한을 하고자 수작을 건 것이다.“鄭兄(현택), 에라! 어디가서 점심이나 먹자” 그 당시 진주에서 업무추진비 상당금이 이미 나에게 송금되어 있었지만 맨맨한 영상후손의 그 썰렁한 호주머니를 털고자 한 고약한 후배의 심술이었다.

4. 名賢의 후손이 저 정도는 되어야 해!

95. 2. 22일 당일 이른 아침, 昨日 上京한 鄕儒와 같이 드디어 성균관 大成殿 공부자님에 南冥行事 告由祭 奉香을 하니 사실 나도 어깨가 으슥해졌다. 지난 날 성균관 陞 를 30여회 시도하다가 결국 성취하지 못한 그 남명선생의 추모행사가 지금에 와서야‘가장 큰 규모, 제대로의 격식과 의례(儀禮)를 갖추고’성균관에서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으니 신바람이 나고 특히 學脈의 경쟁의식(라이벌)있는 者들에 대하여 당당이 그 진면목을 현시했으니 말이다.

한국한시협회와 성균관 사무처의 도움으로 250여명이 참석한 白日場은 근래의 성균관 백일장으로서는 제일 큰 성황이었다. 장원과 차상, 차하에 입상한 도합 9명의 시상식은 관장과 협회장이 수여했지만, 물경 參榜 20명의 시상은 남명후손이 수여키로 사전 성균관 某氏와 협의 했기에 유림회관 3층의 세미나실에서 후손 조옥환 사장님을 겨우 찾아서 白日場으로 뫼셔 오는데, 평소 지극한 겸손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조사장님이 한사코 사양만 하고……. 시간은 급박하고……. 如此如此하여 장장 20명을 일일히 시상하게 되었으니 아마 조사장님도 다리께나 저리었을 것이나 한편 후손된 보람도 흡족히 만족했을 것이다.

이 관경을 지켜보던 유교신문사 首席‘K’某氏 曰“과연 남명선생의 큰 器局이 살아 있기에 29명이나 거상을 주고, 詩狀의 글도 모두 주옥 같으니……. 명현의 후손 역시 저 정도는 (힘이) 되어야 돼.”

이런 일이 있은 후 여타 학술단체나 학파에서 이곳에 백일장등을 가지면서 남명제 행사를 하나의 矜式으로 일삼았다.

이런 전차로 지금도 젊은 漢詩大家인‘Y’氏는 남명제 때의 백일장 같은 제대로의 백일장 한번 더 갖자고 제촉아닌 제안을 하곤 한다.

5. 덕천서원 답사 신청 面接試驗問題

면접구두 시험치고는 별난 시험을 나는 종종 갖는 편이다.

성균관이나 그 주변 숱한 단체나, 연구기관에서 오다 가다 종종 나에게 덕천서원 진주성 지리산 답사의 편의를 요청받는데, 그럴 때마다 아무 代理權이나 결정권 조차 없는 한갖 卒夫인 내 주제에 가로되,

이 세 항목을 즉석에 답하면 내심 제법 알고서 가고자 하는구나! 덕산 유덕골 찐한 막걸리 한잔 대접해도 보람이 있겠구나 하고는 내심 1次 면접은 통과로 보고, 이어서 좀 깊히 들어간다.

이 질문에는 3가지 답 즉 是, 非, 兩門 중의 하나가 보통 나온다. 해서 그 대답이 내 기분이 들면

이쯤되면 상당한 관심과 공부도 했고 장차 南冥學에 최소한 우호적이 될 것으로 나름대로 판단 작심한다.

그런 별난 Test 과정과 참가인원, 일정 등을 짐작하고서는 연구원의 김국장이나 서원의 내임 조선생에게 협조를 당부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좀 고고하게 짚고 넘어가는데는 기막힌 사연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늦가을 감이 주절주절 익어가는 南道의 某某서원에 伽庵 鄭博博士를 뫼시고 同行했다가 문전박대 아닌 척출을 당한 사례가 있었고, 조선팔도 유명하다는 서원에 숱하게 찾아 갔다가 냉수 한 그릇도 인색하게 대하는 그런 야박스런‘선현을 뫼시고 爲人之學’을 강마하는 신성한 곳도 더러 당해봤기에 좀 까다롭게 따져보는 것이다.

또 각설하고, 來年 6월 26일이면 南冥선생의 탄신 500周年이 되고, 따라서 창녕曺門 후손과 관련 연구기관에서 알찬 사업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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