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6)

겨울에 본 스승의 여름 지리산(4)
- 화개에서 악양까지 -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고귀한 생각과 함께 있는 자는 결코 고독한 것이 아니다 - P. 시드니

  청학동에는 청학이 없다. 청학이 사는 골짜기란 뜻에서 청학동이라 했을 터인데, 청학이 없어졌으니 지금의 청학동은 껍데기인 셈이다. 우리의 황량한 정신을 보는 듯 하여 슬프다. 신의 계시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휴머니즘을 내세웠으나 지금의 우리 정신은 도구화된 껍데기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율성과 진실성이 추구되는 속이 튼실한 의식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의식은 표류하고 있다. 가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부정되고 존엄한 생명조차도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다. 진지하게 추구하여 가던 꿈이 사라진 뒤의 공허,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한다.

  스승은 청학동에서 청학을 보았다. 알맹이를 본 것이다. 청학은 불일암 일대의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을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어쩌면 청학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스승이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승이 청학동을 찾은 것이 1558년, 이로부터 약 82년 뒤인 1640년에 허목(許穆)이 청학동을 찾았을 때는 이미 청학이 떠난 뒤였다. 그는 당시 산 속에서 살던 노인들로부터 청학에 대한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지리산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에서 제시한 허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처럼 산 속에 사는 노인들은 청학이 오지 않은 지가 거의 백 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허목이 청학동을 찾아간 것은, 스승이 이곳을 찾은 것과는 근 백년의 시차가 나니 산중 노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학은 스승이 보았을 그 학일 수도 있다. 일찍이 최표(崔豹)는『고금주(古今注)』에서 '학은 천 년이 되면 푸른 빛으로 변하고, 또 천 년이 되면 검은 빛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이로 본다면 스승은 천년을 넘게 산 학을 본 셈인데, 이것이 물론 천 년이라는 객관적인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시간이 의미하는 깊이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끝닿는 곳 없는 푸른 깊이의 시간 말이다.

  우리는 청학동과 쌍계사를 등 뒤로 하고 시장기를 따라 화개장터의 동백식당에 들렀다. 그리고 참게탕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이곳은 조영남의 <화개장터>란 노래에 의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그리고 '광양에서 삐걱삐걱 나룻배 타고 산청에서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사투리 장단에다 입씨름 흥정 오순도순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하동과 구례, 산청과 광양에 사는 사람들이 경상도나 전라도라는 지역성에 구애되지 않고 생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으니 동서간의 화합을 꾀한 셈이다. 이 노래에 고도의 수사학적 기교나 높은 정신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개'라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완충지역을 화합의 표본으로 거칠게나마 제시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웃사촌'이나 '전상도 경라도'로 이어지는 의도적인 노랫말에서도 이것은 찾아낼 수 있다.

  화개는 김동리가 그의 소설 <역마(驛馬)>의 무대로 설정한 곳이기도 하다. <역마>는 역마살로 표상되는 당사주(唐四柱)라는 동양인 혹은 한국인의 깊은 운명관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求禮)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친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본류(本流)였다.'며 화개장터의 지리에 대한 묘사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남자 주인공 성기는 역마살이 끼여 있다. 집을 떠나 객지로만 떠돌아 다녀야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역마살을 눌러볼 심산으로 그는 화개장터에서 술을 파는 어머니 옥화를 떠나 근처 쌍계사에서 중노릇을 했다. 외할머니는 남사당패와 단 한 번 만나 옥화를 낳았고, 어머니 옥화는 떠돌이 중과 인연을 맺어 성기를 낳았다. 성기는 장이 서는 날에는 장터에서 책장사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체장수 영감이 과년한 딸 계연을 데리고 주막에 와서 당분간 맡기고 어디론가 떠난다. 성기와 계연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알고 보니 체장수와 옥화는 부녀지간이었다. 이모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된 성기는, 계연을 구례(求禮)로 울며 떠나가게 하고 그는 심각한 병에 걸린다. 병이 회복되자 성기는 옥화에게 엿판 하나만 사 달라고 부탁을 하여 역마살에 따라 하동을 향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걸음을 옮길수록 성기의 마음은 한결 경쾌해졌다.

  이 소설에는 원심력이 작용되는 떠돌이 남자와 구심력이 작용되는 붙박이 여자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외할아버지는 남사당패였고, 아버지는 떠돌이 중이었다. 이같은 역마살이 성기에게도 있음을 보고 이를 누르기 위하여 외할머니는 쌍계사에 중질을 시켰고, 그것도 여의치 않자 어머니 옥화는 책장사를 시켰다. 그러나 성기의 기구한 운명은 계연의 등장으로 보다 구체화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였고 이로 인해 역마살이 사그라들 조짐이 보였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그의 역마살은 사실상 공식화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성기가 엿판을 들고 떠난 길이다. 즉 역마살을 누르기 위한 쌍계사 길도, 계연이 울며 떠난 구례 길도 아닌 아픔을 극복하는 새로운 길, 즉 하동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경쾌해지는 마음과 함께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성기를 통해 변증법적 질서 속에서 아름다워진 비극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동백식당에서 익어가는 참게의 고깃살 사이로 소주는 향그럽다. 어쩌면 우리가 잠시 깃든 이곳이 옥화가 술을 팔던 그 주막인지도 모른다. 지금 화개장터는 오순도순 하거나 왁자지껄하지도 않다. 상가는 현대식으로 바뀌었고 상가 앞에서 조그마한 좌판을 벌여놓은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성기가 엿판을 들고 떠났을 하동을 향해 우리도 떠났다. 1558년 4월 23일 당시 스승은 신응사를 떠나, 마을 사람과 노복인 청룡 등으로부터 술과 고기 대접을 받으면서 배를 타고 하동쪽으로 내려갔다. 특히 청룡은 스승의 일행이었던 이공량(李公亮, 1500-?), 이정(李楨, 1512-1571)과는 특별한 관계였다. 이들은 그의 아내 수금(水金)이 예전에 서울에 살았을 때 자신과 혼인을 맺어 준 은혜가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스승은 배에서 점심을 먹고 박경리가 지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지금의 평사리를 조금 지나 배에서 내려 악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현창(縣倉)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인 24일부터는 올 때와는 길을 달리하여 통점재(해발682m)를 넘어 삼가식현(三呵息峴, 지금의 삼화실재)을 지나 횡포역(橫浦驛)과 두리현(頭理峴),  다시 옥종의 정수리, 칠송정을 거쳐 25일 저녁때쯤 당초 출발지점이었던 삼가의 뇌룡사(雷龍舍)로 돌아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승의 뒤를 악양까지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그 대신 화개와 악양 사이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와 동정호(洞庭湖), 그리고 고소성(姑蘇城)과 한산사(寒山寺)를 찾아보기로 했다.

 『삼국사기』에는 하동을 한다사(韓多沙), 악양을 소다사(小多沙)라 했고 이 일대를 다사현(多沙縣) 이라 했다. 소다사는 757년(경덕왕 16)에 악양(嶽陽)으로 고쳐 하동군의 영현으로 삼게 되고, 다시 악양(岳陽)으로 한자가 바뀌면서 이후 이와 관련된 중국의 지명 여럿을 빌려오게 된다. 두루 알다시피 악양현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정호의 물이 양자강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특히 현성(縣城)의 서문(西門)인 악양루는 동정호와 양자강의 웅대한 전망을 볼 수 있어 유명하다. 그리고 한산사는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에 위치하고 있는 절로 502년 건립된 고찰이다. 역대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다섯 차례나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가 청나라 말기에 재건되었다. 당나라의 승려 한산이 이 절에 산 후부터 그의 법명을 따서 한산사라 개명되었다 한다. 악양루는 두보(杜甫), 한산사는 장계(張繼)의 시가 알려지면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졌다.

옛날 동정호를 들었더니,
오늘 악양루에 올랐네.
오나라 초나라는 동남쪽으로 나뉘어 있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있네.
친한 벗에게는 한 자의 소식도 없고,      
늙고 병든 이 몸은 외로운 배에 있다네.
중원엔 아직도 전쟁이라,
난간에 기대니 눈물이 자꾸 흐르네.

  앞의 작품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이다. 악양루에 오름 → 동정호를 바라봄 → 외로운 자아 → 나라를 위한 근심으로 시상은 전개된다. '오초동남탁, 건곤일야부'라고 노래한 함련은 천고의 절창(絶唱)이다. '오초'를 통해 시간적 변화를, '건곤'을 통해 공간적 광활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두보는 동정호의 광활한 모습에 비해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왜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병'이나 '고주' 등에서 이같은 사실은 약여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나라에는 전쟁까지 계속된다고 하였으니, 자연과 대비되는 인생무상 혹은 전란으로 인한 서정적 자아의 고뇌가 심도 있게 표출되고 있음을 본다. 이로써 북송(北宋) 때 사람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는 더욱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백성의 부모인 군자는 백성의 걱정보다 앞서 걱정하고, 백성의 즐거움보다 늦게 즐거워해야 한다고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보의 고뇌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뒤의 작품은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풍교에 정박한 객선에서 가을 밤의 쓸쓸한 정취와 그 객수(客愁)로 잠못이루는 밤의 정서를 감각적 글쓰기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원래 '풍교'는 단풍으로 물든 다리로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시의 유명세로 인하여 어느 호사가가 풍교를 만들었고 다시 후대의 지도책에도 이 다리가 등재되게 되었다고 한다. 달지자 서리로 가득찬 하늘, 고기잡이 배와 횃불로 대하는 선 잠, 그리고 객선에 들려오는 한산사의 한 밤 종소리로 시상을 전개시켜 '근심(愁)'을 극대화시켰다. 근심의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가을밤과 나그네 등의 이미지가 말해 주듯 존재론적 고민에 다름 아니다. 이같은 고민을 작자는 풍교에서 하면서 시방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동의 악양 일대는 역대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요새가 될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교역에 필요한 교두보의 확보를 위해 이곳을 탐내었다. 신라는 이같은 백제의 진출을 막기 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백제의 고이왕 때 백제가 다사성, 즉 하동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후 대가야가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신라 땅이 되었다. 특히 무열왕 때는 해발 300미터 평사리 뒷산에 돌로 고소성을 쌓았다고 한다.

  현대사에서도 악양은 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지리산 일대에서 곡창지역으로 이름난 악양은 빨치산에게는 놓칠 수 없는 식량 보급 장소였다. 빨치산은 추수철을 전후해서 남부군과 각 부대들을 연합하여 투쟁을 벌였고, 일주일 동안 악양을 해방구로 장악해 탈곡까지 했다. 이에 백선엽 장군이 이끌었던 빨치산 토벌군은 이곳에서 심각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많은 주민들이 쌀을 등에 지고 빨치산을 따라 입산했다고 한다. 강압을 이기지 못해 따라나선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은 아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견디지 못하고 스승 남명이 넘어서 그렇게 이름되었다는 회남재(回南峙)를 넘어 청암으로 퇴각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상자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악양은 빼어난 자연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악양(岳陽)으로 한자가 바뀌면서 악양루를 건축하고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고 하는 등 중국의 여러 지명을 따오게 되었다. 이지역 사람들은 미점리 아미산 아래에서 동정호까지의 넓은 들판을 '무딤이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규모면에서 중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운치나 풍경은 중국의 것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설정하기도 했다.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의 소강과 상강이라는 두 줄기 강이 합쳐지는 동정호의 정경을 읊은 노래인데, 이것을 흉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동의 악양루, 동정호, 고소성, 한산사 등은 모두 이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악양이라는 명칭과 함께 누각과 호수가 그렇게 이름되었을 것이고,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신라가 고소성을 축성하면서 후대에 다시 한산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소중화(小中華)로 자부하면서 중원을 그리워했던 우리 선조들의 의식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정의 이러함이야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팔공산(八公山)이나 아미산(蛾眉山) 등의 산명, 이천(伊川)이나 사수(泗水) 등의 수명에 이르기까지 그 수는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중국화된 우리의 내면 의식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는 가운데 우리는 하동에 도착했다. 거기서 송준식·사재명 선생님과 헤어져야만 했다. 그 선생님들은 진주로, 설석규 선생님과 나는 대구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되돌아오는 길은 충만한 경험으로 노곤하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시간이 참으로 빨리 흘러갔고, 하늘은 유리알 같은 별들로 깨득거렸다.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설선생님과 나는 장계가 그러했듯 상념에 빠져들었다. 누구는 어쩌구, 누구는 저쩌구, 또 누구는 어쩌저쩌구, 다른 누구는 저쩌어쩌구, 그리고 우리는 ……. 어떤 때에는 문제라는 울창한 숲 속을 똑바로 걸어가서 그 숲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꼬불꼬불한 길을 헤매면서 들어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구의 불빛이 보일 즈음 뇌룡사에서 출발하여 다시 뇌룡사로 되돌아온 스승의 지리산 여행길을 정확히 따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번 답사에 아쉬움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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