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3. 講學과 自我定立(6)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선생께서 49세가 되던 해 (1549) 8월에 여러 문생을 데리고 감악산에 가서 鋪淵을 구경하였다. 감악산은 경남 거창에 있는데, 이때 함양의 선비 林希茂와 朴承元 등과 더불어 여러 날을 노닐며 음풍농월하였다. 임희무(1527∼1577)는 字가 彦實, 호는 남계로 본관이 羅州로 당시 함양에 살고 있었으며 초기에 唐谷의 문인으로 이때 남명에게 나아가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으로 남계집이 남아 전하며, 박승원은 字가 伯胤이며 본관은 潘南으로 자세한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감악산에 노닐며 선생은‘浴川’詩 한 수를 남겼다. 이 칠언절구는 선생의 정신세계를 극명하게 살필 수 있는 작품으로 선생의 과단한 氣節을 표상하고 있다. 사욕을 끊어 불혹의 나이를 넘어가려는 한 선비의 삼엄한 정신기조가 시퍼런 칼날처럼 번득이고 있으며, 청정한 마음의 본연지성을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표상되어 있다.

  이 절구를 새긴 詩碑가 경남 산청군 시천면 德川書院 앞 洗心亭 옆에 세워져 있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서늘한 기상이 한결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앞서 본 선생의 인욕을 끊어내려는 과감한 정신구도는 선생께서 일관되게 立言하고 실천적으로 수렴한 학문과 행위에서도 두드러진 바 있다. 선생의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에서 사욕을 끊어 한결 같은 마음으로 正理와 直道를 추구하여 만가지 일에 대응하여 참다운 행의를 구현하려는 발아는 이미 선생께서 합천의 토동 뇌룡사에 계실 때 활화산처럼 분출하고 있었다.

  선생의 언행총록에 보면,

  이와 같이 선생이 일관되게 추구하신 인욕의 퇴척과 본성의 회복이라는 기본적인 규범은 일상의 모든 생활 곳곳에서 그대로 발현되어 실천적으로 드러남으로써 학문과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이 둘이 아니라 바로 하나로 통일됨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기 쉬운 사욕으로서‘塵土’와‘꺬行??항상 경계하여 끊임없이 끊어내고 자아를 성찰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직함으로써 참다운 正士의 바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上達로 나아가는 下行은 실로 소박한데서 출발하는 점에서 선생께서 견지한 일관된 삶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선생께서 50세 되던 해, 단성현 배양에 살던 竹閣 李光友와 그 종형 松堂 李光坤이 와서 배웠다.

  일찌기 산청군 단성지방은 남명학이 만개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적 기반은 대체로 여러 가문에서 家學으로서 남명의 학문이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까지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독특한 면을 살필 수 있다.

  남사와 더불어 배양은 남명학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지역과 가문을 토대로 오늘날에도 유훈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이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합천 이씨 문중에서 배양을 중심으로 하여 근역에서 남명학파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淸香堂 李源, 松堂 李光坤, 竹閣 李光友, 日新堂 李天慶, 黃江 李希顔 雲圃 李瑚, 紫圃 李瑛, 隱庵 李珉, 李希閔, 李希曾 등 무려 10여인이 넘으며 근대 말 眞庵 李炳憲에 이르기까지 배양을 중심으로 전개 계승 된 남명학의 수용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죽각 이광우(1529∼1619)는 字가 和甫로 청향당의 조카인데 竹閣集이 남아 전한다. 또 이광곤(1528∼?)은 字가 厚仲으로 청향당의 아들이다. 죽각과 송당은 청향당의 주선으로 남명의 문하에 들게 되는데, 청향당은 당대의 명유인 남명과 퇴계와 동갑으로 일찍이 ‘四同’으로 칭송이 되었다.

 ‘사동’은 네 가지가 같은 것으로, 세 분 선생이‘나이가 같고, 도가 같고,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 는 것을 말한다.

  柳致明이 쓴 청향당실기 서문에 보면 청향당은 寒棲庵(퇴계의 예안집으로, 퇴계를 말함)으로부터 사귐과 허여함을 이루었고 또 산해정(남명의 김해집으로, 남명을 말함)으로부터 四同으로 일컬어졌으니, 선생을 징험함에 있어서 의심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한편 죽각의 행장에 드러난 바를 미루어 보면 청향당이 남명에게 그의 아들 광곤과 조카 광우를 입문시켜 家學의 토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남명이 誠·敬·性·道 등의 질문을 하면 두 공이 풀이하기가 매우 자상하고 밝으니 선생께서 기뻐하시며,“너희 노둔한 재질로서 견해가 이러할 줄 몰랐다”고 하셨다.

  이 해에 玉洞 文益成(1526∼1584)이 와서 배웠다. 옥동은 字가 叔栽, 본관이 南平으로 당시 합천에 살고 있었는데 남명과 퇴계 양문에 들었고, 玉洞集이 남아있다. 옥동은 고령현감을 지낸 이희안의 맏형인 이희증의 아들 彭年의 사위가 되는데, 아마도 남명과 아주 가깝게 지낸 이희안 집안과의 혼맥으로 남명의 문하에 들게 되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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