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淵源 私淑人物考9

추담(秋潭) 윤선(尹銑)

史  載  明
(경상대 강사)

  윤선(尹銑, 1559∼1639)의 자는 택원(澤遠)이고, 호는 추담(秋潭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삼가(三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59년 명종 14년 4월 계미에 삼가(三嘉) 구평(龜坪)에서 아버지 참판공 언례(彦禮)와 어머니 밀양(密陽) 박씨(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문집으로는『추담선생문집』 3권 1책이 남아있으며, 권1에는 시(詩) 15수가 있고, 그 중에는 오운(吳澐), 이흘(李屹), 이윤서(李胤緖), 안극가(安克家), 강덕룡(姜德龍), 박서구(朴瑞龜), 이희옹(李希雍), 변혼(卞渾), 이승지(李承旨), 노극성(盧克誠) 등에게 지어준 만(挽)이 포함되어 있다. 제문(祭文)은 4편이 있는데, 이는 권집(權潗), 강여중(姜汝中), 허홍재(許洪材), 권극량(權克亮) 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소(疏) 3편, 서(書) 1편, 묘갈명(墓碣銘) 1편, 행장(行狀) 1편이 실려 있다.

  권2에는 부록으로「제현찬록(諸賢纂錄)」에는 조한영(曺漢英), 강대수(姜大遂)의 일기, 박세당(朴世堂)의 남유록(南遊錄), 송정렴(宋挺濂), 이광사(李光師) 등의 기록에서 발췌한 글이 있고,「만사(挽詞)」에는 박인(朴絪), 강대수(姜大遂), 조계명(曹繼明), 송상(宋? 등이 지은 글이 있으며, 그 외에도「제문(祭文)」, 「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근서추담윤공행장후(謹書秋潭尹公行狀後)」가 실려 있다.

  권3에는「시장(諡狀)」,「신도비명(神道碑銘)」,「신도비비각기(神道碑碑閣記)」,「신도비비각상량문(神道碑碑閣上梁文)」,「문집고성문(文集告成文)」,「발(跋)」등이 있다.

  그의 세계는 고려태사(高麗太師) 화달(華達)을 시조로 다음과 같은 세계도를 살펴볼 수 있다.
※『秋潭集』,「秋潭先生世系圖」 참고.

  그는 남명학파로서 정인홍의 문인이기도 한데,『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그 [尹銑]는 시골사람으로서 집안을 일으키고 양사(兩司)의 장관에 이르렀는데, 이는 모두 정인홍의 힘이었다."(『光海君日記』, 卷70, 3년 9월 1일 병진; 이 외에도 내암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광해군일기』, 卷44, 3년 8월 5일 임신;『來庵集』, 卷下,「門人錄」및「孚飮亭重修쭝鬼뮤滑?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그는 정인홍의 영향으로 청요직에 두루 발탁, 제수되었던 문도(門徒)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에 대한 기록을 문집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5세 때(1573년, 선조 6년) 소요당(逍遙堂)에서『서경(書經)』을 읽었고, 17세 때(1575년, 선조 8년) 참판(參判) 장문(長文)의 딸인 전의(全義) 이씨(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20세 때(1778년, 선조 11년)에 경사(經史)와 염락(濂洛) 정주서(程朱書)에 통하여 오리(奧理)를 탐구하였다.

  과거는 18세 때(1576년, 선조 9년)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24세 때(1582년, 선조 15년) 봄에 진사(進士: 司馬試)시험에 합격하였으며, 30세 때(1588년, 선조 21년) 봄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고, 여름에 회시(會試)에 등제하였다.

  벼슬은 31세 때(1589년, 선조 22년) 성균관학유학록학정박사(成均館學諭學錄學正博士)에 예부(例付)되었고, 33세 때(1591년, 선조 24년) 2월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월에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에 부임하였고, 7월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에 제수되었으며, 10월에 홍문관부교리지제 교겸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弘文館副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으로 옮겼다. 12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다. 34세 때(1592년, 선조 25년) 정월에 부모를 모시러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4월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5월에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상경하여 선조가 이미 의주로 떠나자 즉시 쫓아갔다. 선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하고,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수행하게 하고, 묘주(廟主)를 봉행하게 하였다. 8월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다가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배되었고, 10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배하였으며, 12월에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었다. 35세 때(1593년, 선조 26년) 3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배하였다.

  36세 때(1594년, 선조 27년) 세자(世子)가 명을 받들어 영호남(嶺湖南)의 군무(軍務)를 정비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그로 하여금 조정에 문안드리게 하자 그가 입알(入謁)할 때 임금께서 손을 잡아 위문하였다(『秋潭集』, 卷3,「神道碑銘」)고 한다. 이 해에 악견산성(岳堅山城)에서 조종도(趙宗道)와 만났으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배하였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올랐다. 37세 때(1595년, 선조 2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배하였고, 38세 때(1596년, 선조 29년) 군기시정(軍器寺正)을 배하였으며,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배되었으며,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배해졌다. 3월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배하고, 5월에 부이독향관(副貳督餉官)으로 남원(南原)에 내렸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배하였다.

  39세 때(1597년, 선조 30년) 명장(名將)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으로 가자 참판 이광정(李光庭)이 독향관(督餉官)이 되매 이 공(李公)이 조정에 청하여 그와 추관(秋官)인 강항(姜沆)을 부관으로 삼았다. 일을 마치고 이공이 말하기를, '우졸한 내가 윤공(尹公)의 지휘를 많이 힘입어 중책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남하(南下)할 때, 세자를 금강(錦江)의 배 위에서 만나니 세자가 울면서 대전, 중전의 안부와 임해군(臨海君)의 숙식(宿食)을 물었다. 그가 이르기를, '저하(低下)의 효우가 이 같으니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로소이다.'(『秋潭集』, 卷3,「神道碑銘」)라고 하였다. 40세 때(1598년, 선조 31년) 판서공(判書公)에 별세하였다.

  41세 때(1599년, 선조 32년) 모부인(母夫人) 박씨(朴氏)가 세상을 떠났다. 42세 때(1600년, 선조 33년) 판서공과 모부인 박씨의 묘갈을 지었다. 43세 때(1601년, 선조 34년) 겨울에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부임하니 거듭 겪는 난리에 열집 중에서 아홉 집이 비었으며 백성은 생업이 없었다. 그는 쓰다듬고 구제하니 유민(流民)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44세 때(1602년, 선조 35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12월 홍문관교리지제 교겸 경연시강관춘추관기사관(弘文館校理知製 敎兼 經筵侍講官春秋館記事官)에 이배되었다. 45세 때(1603년, 선조 36년) 정월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배하였으며, 그가 사헌부감찰로 옮기자 관리와 군민이 은혜를 생각하여 비(碑)를 세워 그 공덕을 칭송하였다.

  46세 때(1604년, 선조 37년) 3월에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어 시폐(時弊)를 상소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가을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배해졌다. 병형조참지참의(兵刑曹參知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배되었다. 12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배해졌다. 47세 때(1605년, 선조 38년) 2월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배되었다. 3월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배하였다. 48세 때(1606년, 선조 39년) 4월에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에 배하였다. 7월에 좌승지(左承旨)에 이배되었다. 9월에 도승지(都承旨)를 배하였다. 11월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배하였다.『대학연의』1부 10책을 하사받았다. 49세 때(1607년, 선조 40년) 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배하였다. 여름에 추담정사(秋潭精舍)가 완성되었다. 50세 때(1608년, 선조 41년) 가을에 예조참판(禮曹參判)를 배하였다.

  51세 때(1609년, 광해 1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배하였다. 52세 때(1610년, 광해 2년) 병조참판(兵曹參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다. 53세 때(1611년, 광해 3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배하였으나 사직하고 소를 올렸다.

  그는 호패를 시행하는 절목에 대해 아뢰면서,

라고 '호패를 차고 다니는 기한을 넉넉히 정하자는 뜻은 지난번 탑전에서 영상이 아뢰었다. 이제 백관(百官)은 내년 1월 1일부터 차고 다니고 그밖의 외방도 차례차례 물려서 정하라고 하였다.

  54세 때(1612년, 광해 4년)에는 자헌(資憲)에 오르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배하였다. 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지제 교겸 경연참찬관춘추관기사관(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知製 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記事官)에 이배되었다.「동성회화병진」이 완성되었다. 동성료우 11人은 박이장, 윤선, 박여량, 박사제, 이대기, 김응성, 유중룡, 강익문, 손린, 이종문, 유세온 등이다.

  그는 군기(軍器)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 해에 조천종이 만든 화포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비치하도록 다음과 같이 아뢰기도 하였다.

라고 하였다.

  55세 때(1613년, 광해 5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배하였다. 이 해에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연흥에서 피살되자, 그 화가 대비(大妃)에게 미치니 그가 변(變)을 듣자 마자 즉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시사(時事)가 크게 그릇됨을 보고 밤에 회곡(晦谷) 조공(曺公)에게 답하기를,

라고 하였다. 그가 듣고 그렇게 여겼다. 이 해의 계축옥사로 인해 그는 인목왕후(仁穆王后)가 구금되자 위졸을 시켜 미육(米肉)을 헌납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그는 공궤(供饋)를 하지 않으면 만세(萬世)에 불효의 이름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광해군을 설득하여, 광해군이 공궤를 끊이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라고 하였다. 56세 때(1614년, 광해 6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배하였고, 주문사(奏聞使)로 중국을 다녀왔고, 송경(松京) 만월대(滿月臺)에 올랐다.

  57세 때(1615년, 광해 7년)『춘추』 1부 12책, 용연(龍硯) 일사(一事)를 하사받았다. 이 해에 왕이 선정전에서 좌의정 정인홍을 인견하고 국정을 논하였다. 정인홍은 나이가 많고 정신과 기력이 쇠퇴하다고 하면서 극구 물러날 뜻을 표하자 그가 아뢰기를

라고 하였다.

  58세 때(1616년, 광해 8년) 7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을 배하였다. 아림(娥林)의 봉황대(鳳凰臺)에 이르러 제현(諸賢)과 함께 찬양하였다. 이 때 함께한 이로는 문위, 변혼, 유중룡, 오덕홍 등이다. 59세 때(1617년, 광해 9년) 봄에 의정부우참찬겸세자좌빈객(議政府右參贊兼世子左賓客)을 배하였다. 10월에 오장(吳長)이 세상을 떠났다. 오운(吳澐)에게 만(挽)하였다. 60세 때(1618년, 광해 10년) 관학유생을 신구하였다.

  63세 때(1621년, 광해 13년) 영남 유생 김시추(金是樞) 등이 소를 마련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이이첨(李爾瞻)의 목베기를 청(請)하였다. 이첨(爾瞻)이 이 사실을 듣고 복병(伏兵)을 시켜 도륙하려고 꾀하니 그가 유생을 성 밖에 피신시키고 사람을 시켜 유희분(柳希奮)을 달래게 하여 희분(希奮)이 그 복병을 거두게 하여 갱유(坑儒)의 화를 면하였다. 이에 있어 흉당(凶黨)들이 크게 노하여 그를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내쫓았다(『秋潭集』, 卷2, 附錄,「墓碣銘」및「神道碑銘」참고) 고 한다. 65세 때(1623년, 인조 1년) 우참찬(右參贊)을 배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朴瑞龜에게 挽하였다. 종부형(從父兄) 참판공(參判公)의 행장을 지었다. 68세 때(1626년, 인조 4년) 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에서 놀았다. 하혼(河渾)의 만(挽)을 지었다. 69세 때(1627년, 인조 5년) 가을에 이흘(李屹)에게 곡하였다. 강덕룡(姜德龍)의 부음을 들었다(만시와 제문이 있다). 70세 때(1628년, 인조 6년) 덕천으로 가서 원록(院錄)을 수정하였다.

  71세 때(1629년, 인조 7년) 허홍재(許洪材)의 제문을 지었고, 81세 때(1639년, 인조 17년) 산야(山野)에서 한거(閒居)하면서 스스로를 즐기다가 9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11월에 도구산(陶丘山)에 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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