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5)

겨울에 본 스승의 여름 지리산(3)
- 불일암과 청학동 -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유토피아, 가짜가 하나도 없는 사회 - T. 모어

1999년 1월 9일 밤, 여여식당을 나온 우리는 섬진강의 흐름이 내려다보이는 강변타운으로 갔다. 바로 김국장님의 자택이다. 다양한 술향기가 어지러이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오늘 있었던 '신응사 → 칠불암 → 쌍계사' 답사에 대한 평가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승의 두류산 기행에 대한 성격문제에 대한 담론을 펼쳤다. 초점은 당시 스승의 지리산 기행에 '시위적 성격'이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문제였다. 역사학자 설석규 선생님이 당대의 시대적 상황, 즉 곤폐한 민생 등을 거론하면서 이 문제는 제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수유람을 하면서도 민생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집단적인 힘의 과시를 통하여 치자들의 각성을 촉구하자는 의도가 스승의 지리산 등정에는 잠복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국장님 역시 이 발언에 동의하였고 이것은 다시 이후에 나온 그의 논문 <남명의 불교관>으로 이어졌다. 조야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와 그로 인한 스승의 위상과 입장의 강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인식하면서 행한 지리산 등정, 이같은 시각에서 볼 때 스승의 산수유람은 일종의 시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준식 선생님과 나는 시위적 성격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사림파의 성장과 관련한 당대 유산문화(遊山文化)의 한 형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윤남현이 편집한 《잡저기설류기사색인》(1982년)에 의하면, 조선조를 통틀어 유산기 혹은 유산록이란 제명 아래 쓰여진 작품 수는 560여편에 달한다. 특히 영남출신 사림의 정치적 소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하겠는데, 퇴계를 비롯한 영남사림들이 중앙에 대거 진출한 선조 년간에 이들의 작품이 쏟아진다는 것은 그 좋은 방증이 된다. 물론 스승의 산행에 곤고한 민생을 의식한 치자들에 대한 시위적 함의가 일정부분 개재되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사림의 성장과 그로 인한 자부심 등이 당대의 산놀이 문화와 결부되면서 스승의 지리산 등정이 이루진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는 성리학적 질서체계와 양반계층의 풍류정신이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자연을 통한 심성 수양의식과 기생들과 어울려 가무를 즐긴 것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무리지어 산행을 감행한 스승이라는 입장에서 스승의 지리산 등정은 시위의 한 형태일 수 있으며, 이같은 시각이 어쩌면 스승에 대한 일종의 경직된 이해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스승의 지리산 등정은 당대 사대부 문화의 한 형태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문제는 보다 치밀하게 따져야 하겠지만 담론은 자못 치열하였고, 급기야 사재명·박라권 선생님이 중재하며 정리해 주었다. 나중에 합류한 최갑용 선생님 역시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기자생활을 할 때 체험했던 스승과 관련한 지역민들의 정서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섬진강은 깊게 바다로 빨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횡설과 수설로 언어의 비단을 짜들어가다가 한 필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건너 방으로 건너갔다. 거긴 남명학연구원 김충렬 원장께서 김국장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서증(書贈)한 '기오화삼(箕五華三)'이라는 글귀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인이 즐기는 중요한 놀이 가운데 하나인 다섯(五) 마리 새 잡기를 세(三) 명이 참가하여 실시하였다. 원장님은 우리의 오늘 이 처사에 대하여 이미 예견하신 것 같았다. 일행 가운데는 고수도 있었고 초보도 있었다. 점수계산법을 겨우 아는 나는 당연히 왕초보였고 이 게임에 김지미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현란한 놀이 규칙으로 인해 섬진강과 함께 흥건히 흐르던 우리의 의식은 겨울 대나무처럼 곧추서기 시작했고, 격렬한 머리 싸움 너머로 졸음이 기습해오자 하나 둘씩 다른 방으로 건너가 깊은 잠의 수렁으로 스스로를 방기(放棄)시켰다.

섬진강이 맑은 겨울 햇살로 얼굴을 씻으며 눈을 들어올릴 쯤, 어젯밤에 새를 가장 많이 잡은 송선생님이 아침 식사를 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계획을 세웠다. 설석규·송준식·사재명 선생님과 나는 어제 해가 저물어 갈 수 없었던 불일암과 청학동을 찾기로 했고, 다른 분들은 모두 각자의 일에 따라 흩어졌다. 김국장님은 《사람과 산》이라는 잡지에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연재하는 신정일씨가 이덕일씨 등 여러 명과 함께 답사차 산청(山淸)의 신등(新等)으로 온다며 갔다. 이덕일씨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 1997),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석필, 1998)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박라권·최갑용 선생님은 진주로 간다고 했다.

다시 스승의 계시가 있는 곳으로 정신을 집중할 때가 되었다. 1558년 4월 18일, 비가 와서 쌍계사에 머물렀던 스승 일행은 다음 날 아침, 비가 개자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을 올랐다. 이때 스승의 자형인 이공량(李公亮, 1500-?)과 훗날 절교하게 되는 이정(李楨, 1512-1571)은 병 때문에 등반을 포기했다. 이를 두고 스승은 승경(勝景)을 보는 데는 그만한 연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나아가 자신을 고려말 지리산에 은거했던 한유한과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불철저한 낙도정신에 대하여 반성하기도 했다.

하동에서 작별한 사람들보다 승경과 더욱 연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가파른 청학동길을 재촉하며 올랐다. 유사이래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Utopia)를 찾아 나섰고 우리의 선조들은 지리산 청학동을 그것으로 보았다. 신선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학동을 구체적으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 위치에 대한 이론(異論)도 많이 생겨났다. 불일암 일대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양면 악양천 상류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덕평봉 선비샘 아랫 쪽이나 연곡사 골짜기, 세석고원 일대, 덕산면 일대, 청암면 묵계리 일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가운데 불일암 일대로 보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김일손·서산대사·허목, 그리고 스승이 대표적이며, 현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청암면 묵계리 학동의 청학동은 유불선합일갱정유도교(儒佛仙合一更正儒道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청학동이라며 찾아든 곳이니 최근의 일이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인생이 험난할수록 유토피아는 더욱 그리운 법이다. 저 위난의 시기 신라말에는 최치원이 이곳을 찾아와서 학을 불렀고, -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쌍계사와 불일암 중간쯤 있다 -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여서 종자를 남기지 말자'며 무신들이 난(1170)을 일으켰을 때는 이인로가 청학동 찾기를 원하기도 했다. 최치원은 '속세를 멀리 떠난 것은 비록 즐거우나(遠離塵世雖堪喜), 풍정을 막을길 없으니 어이하리!(爭奈風情未肯 )'라며 세속과 선계 사이를 방황하였고, 이인로는 '지팡이 짚고 청학동 찾으려 하였으나(策杖欲尋靑鶴洞), 속절없는 짐승 울음소리만 숲속에서 들리네(隔林空聽白猿啼).'라며 청학동을 찾지 못하여 탄식하고 결국 최씨정권에 철저히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스승이 살았던 16세기는 사화로 얼룩져 더욱 험난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청학동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건강한 눈으로 현실을 보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잠시 스승 일행이 청학동을 등반 할 때의 풍경을 엿보기로 하자.

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스승 일행이 쌍계사 스님인 신욱의 안내에 따라 수십명이 상·중·하대로 나누어 청학동을 등반했다는 것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앞에서는 북을 두드리고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산행을 독려하였고, 중간에서는 스승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힘겹게 올랐으며, 그 뒤는 요리사와 음식을 운반하는 종들이 짐을 지고 따랐다. 스승은 당시의 산 오르는 모습을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듯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파르게 오르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산을 오르다 바위에 음각 되어 있는 '이언경(李彦憬) 홍연(洪淵)·시은형제(枾隱兄弟)'라는 글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같은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산짐승이 사는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기 보다 훌륭한 일을 하여 사관에 의해 역사서에 기록되고 그것이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주석서인 《좌씨경전집해(左氏經傳集解)》 등을 지어 후대에 널리 알려진 진(晋)의 무장(武將) 두예(杜預)를 들었다. 두예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가 자신의 공적을 전하기 위하여 새겨둔 비석에 있지 않고, 그의 사업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일단의 체험을 하며 마침내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에 올랐다. 이때의 감회는 스승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청학동의 바위는 하늘에 매달린 듯하고 동쪽으로는 향로봉이, 서쪽으로는 비로봉이 만길 낭떠러지로 솟아 있었다. 청학 두 세 마리가 바위틈에 살면서 하늘을 오르내리며 이곳이 바로 청학동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고리처럼 이어지는 절벽은 갈래지다 합쳐지고 청학의 그림자가 비치는 학연은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스승은 천지창조의 신비감 속에 휩싸였다. '바람과 천둥이 뒤얽혀 서로 싸우니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라 하면서 거기서 부단한 창조의 변전(變轉)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스승은 또한 어느 시대 누가 새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끼낀 바위에서 '삼신동(三神洞)'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삼신은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염두에 둔 표현이고, 이것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방장산 가운데서도 신선이 사는 청학동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선이 사는 초월의 세계 청학동은 수많은 질곡이 있는 현실세계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부조리로 얼룩진 현실과 사절하고 자신의 내적 정신적 초월만 강조되는 이 신선의 세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스승은 청학동에서 여기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고민을 스승은 <청학동(靑鶴洞)>이라는 7언절구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이 작품에서 스승은 하늘과 현실의 매개자로 청학동을 제시하고 초월 공간인 이곳을 들어 오히려 세속적 현실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역설적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1구에서는 청학동에서 학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고, 2구에서는 청학동에서 구슬같은 한 가닥 시냇물이 인간 세상으로 흐른다고 했다. 청학동은 학을 통해 하늘과 연결되고 물을 통해 인간세상과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스승이 하늘과 연결되는 '학'을 중시하는가, 인간 세상으로 이어지는 '물'을 중시하는가가 문제이다. 스승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는 스승이 일찍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세상의 얽매임이 없을 수 없다(<讀書神凝寺>)고 한 생각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논리이다. 불일암 동쪽에 있는 폭포를 보면서도 이같은 생각은 지속되었다.

위의 작품은 <청학동폭포를 읊조림(詠靑鶴洞瀑布)>으로 지금의 불일폭포를 보고 노래 한 것이다. 스승은 <유두류록>에서 '물길이 만 길 구렁을 향해 내려 가는데 곧장 내려만 갈 뿐 다시 앞을 의심하거나 뒤를 돌아 봄이 없다 하더니 여기가 바로 그와 같은 곳이다'고 하면서 동행한 이희안(李希顔, 1504-1559)과 함께 폭포에 대한 감상을 주고 받은 적이 있다. 위의 작품은 아마도 당시에 구상한 것일 터인데, 여기에는 창조를 위한 부단한 변전과 도를 이룩하기 위한 강한 의지가 함의되어 있다. 특히 3구에서 지향한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요임금이 구슬 버린 것'이라 한 것은 '요임금이 임금 됨에 산에 금을 버렸고, 순임금이 선양을 받음에 구슬을 골짜기에 버렸다'라는 《포박자(抱朴子)》의 말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명이나 부귀 등 물욕을 버린다는 것이겠는데 이것을 '싫어' 한다고 하였으니, 공명과 부귀 등 현실적 욕망만을 제거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보였다. 도는 바로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구도(求道)와 구세(救世)가 스승의 의식체계안에 동질의 의미로 설정되어 있는 바, 도의 실현이란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곳에 자신의 정신을 높히 걸어두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힘으로 현실 공간을 쇄신하고 거기서 복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스승이 항상 주장한 쇄소응대지절(灑掃應對之節)이나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의 제시는 그 구체적 방법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지리산 청학동, 거기서 고요히 살핀 창조의 힘과 그 구도를 통한 현실세계에로의 지향, 이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는 불일평전을 지나 불일암을 찾았다. 이 암자는 1205년경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한 곳이라 하는데 지눌이 입적하자 국왕이 지눌의 시호를 불일(佛日)로 내려 암자 이름도 그렇게 되었다 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암자가 1983년까지는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불타 없어지고 그 터만 허전하게 남아 있다. 불일암은 또한 상·중·하불일이라는 세 암자로 나누어져 있다. 세 불일암 가운데 스승이 잠시라도 머물렀던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불일암지(佛日庵址)는 안내판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불일암 주변에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집 터나 산을 개간한 흔적이 그것이다. 이곳을 청학동이라 생각한 일련의 신선사상가(神仙思想家)들이 거기서 청학과 더불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이 찾았던 청학동의 여름 폭포는 우리가 갔을 땐 얼음으로 뒤덮혀 또 다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주위엔 스승의 눈으로 보았을 굳센 적처럼 층진 벼랑이 막아서 있고, 그 벼랑사이엔 바람소리가 웅성거리며 건너 뛰고 있었다. 바위에 서식하던 청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는지 보이질 않고, 얼음 아래로 흐르는 유리알 같은 맑은 물만 인간세상을 향하여 흘러내렸다. 저 물은 우리의 비겁한 일상이 곁눈질하는 하토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 무어라 말할까? 청학동을 마음으로 느끼고서 보지 않았다고 할까? 이같은 스승식 발상을 하며 우리는 얼음과 햇살이 부딪는 빛, 혹은 얼음과 얼음이 부딪는 빛,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부딪는 빛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쌍계사로 내려갈 때가 된 것은 이로 알았다.

당시 스승은 쌍계사로 내려가며 불일암 뒤쪽 언덕길을 더듬어 지장암(地藏庵)에도 들렀었다. 지금은 이 역시 암자의 터만 남아 있다. 이 암자에서 스승은 모란을 감상했었다. 그리고 그 모란이 은으로 만든 구슬을 한 말 모아 놓은 것같다고 생각했다. 그 곳에서 쌍계사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라 한 번에 몇 리를 달려 간 다음에야 겨우 쉴 수가 있었다. 여기서 스승은 산 오르기의 어려움과 산 내려가기 쉬움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행하기의 어려움과 악행하기의 쉬움이 그것이다. 구체적 현상을 통한 보편적 원리를 이렇게 연역해 낸 것이다. 훗날 한강 정구(1543-1620)가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스승의 이 말을 기억해 내게 한다. 그리고 그 말의 진실됨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품게 한다. 청학동 등반을 마치고 쌍계사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신병 때문에 동행하지 못했던 이공량과 이정이 팔영루 위에서 스승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유토피아 청학동에 대한 안부도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내심 유토피아란 사람의 위대함이 끝까지 추구되는, 우리의 존재가 현실 속에서 마음껏 발현되는 세계라고 생각하곤, 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조용히 웃고 계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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