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5)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11월에 모부인의 상사를 당하고, 12월에 선대부의 묘소 동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한 다음날 산 밑 옛 여막에서 거처하면서 궤연을 모시기를 전날의 상사와 같이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일 없이 계실 때라도 집사람은 감히 함부로 떠들며 즐기고 웃지 않아서 안밖이 엄숙하였다. 효우(孝友)에 독실하여 정위(庭圍)간에 모심이 화열하면서도 조심하였다. 봉양을 잘하되 오직 그 심지를 기쁘게 하여 상중에 있어서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애모하고 전후 상사에 모두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하였다.

선생이 46살 되던 해(1546, 명종원년), 봄에 선부인 이씨의 묘에 비를 세웠다. 비문은 규암 송인수(1499-1547)가 지었다.

그 대략을 살피면,

라고 하였다.

47살 되던 해 규암 송인수의 부음을 들었다. 이 해에 이기(李 )의 무리가 봉성군을 모함해 죽이고 을사(乙巳)의 여러 선비들에게 죄를 가중하여 규암도 화를 당하였다. 선생께서 상심하고 애도해 마지 않았다.

48살 되던 해 2월에 상제를 벗었다. 전생서 주부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안분당 권규(1496-1548)의 죽음에 곡하였다. 안당분은 자(字)가 자유(子由), 안동인(安東人)으로 단계에 살았는데 남명과 종유하였고, 안분당실기(安分堂實記)가 남아 전한다.

이 해에 합천군 삼가면 토동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계부당과 뇌룡정이 낙성되었다.

이 때에 선생에게 와서 배우는 사람이 많아졌기에 계부당과 뇌룡정을 지어 강학하는 곳으로 삼았다. ‘계부’란 함양하기를 닭이 알을 품듯 한다는 뜻을 따온 것이다. 실로 남명의 계부당 명을 보고 퇴계는, 금계 황준량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런 글은 노장서에서도 못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퇴계는 남명의 계부당 명을 보고, “텅비고 아득하여 노장서 가운데서도 일찍이 보지 못했다”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남명이 지향한 정신세계의 역동성과 기상에 대하여 당시의 순정한 주자학 일변도 위주의 퇴계학문과는 상당한 일탈을 보이는 남명의 노장사상의 수용을 비판한 것으로 주목된다.

또한 뇌룡정의 당호에서 취한 ‘뇌룡’은 연못 속에 깊이 침묵하여도 도리어 우뢰와 같으며 시동처럼 죽은 듯이 앉았으나 도리어 용을 보리라는 장자의 구에서 따온 것이다.

무오년 기미년 이후로 세도(世道)가 일변하여 선비들이 나아간 곳을 정하지 못하니 이 때 선생께서 사방의 선비를 이끌어 가르쳤다.

그 가르침의 통서는 대개 소학을 기본으로 세우고 대학으로 그 규모를 넓혔으며 더욱 의(義)와 이(利)의 분별을 통하여 각자의 기질을 변화시킴으로써 요령을 삼았다.

경서를 풀이 하다가 긴요한 곳에 이르면 반드시 반복 분석하여 듣는 자가 환하게 알고 난 뒤에야 그만 두었다.

일찍이 선생이 말씀하시길, “내가 학자에게 대해서 그 혼미한 잠을 깨워줄 뿐이다. 이미 눈을 떴으면 스스로 천지와 일월(日月)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고 또 “사색하는 공부는 밤중이라야 더욱 전일(專一)하니, 배우는 자는 잠을 많이 자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또 말씀하시길, “학문을 하려면 지식이 고명하기를 요구할 것이니 마치 동대(東岱)에 올라 만가지가 모두 낮게 보인 다음이라야 내가 행하는 바가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문생 중에 외도(外道)로 달리고 차례를 뛰어넘어 실천하기를 구하지 않는 자를 보면 반드시 억누르고 경계하였다.

일찍 말씀하시길, “오늘날 폐단은 흔히 높고 먼 곳에 힘을 쓰고 내 몸에 절박한 병을 살리지 못하는 자가 많다. 성현의 학문이란 애초부터 날마다 쓰고 항상 행하는 동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엉뚱하게 이를 버려두고 갑자기 성명(性命)의 오묘한 것을 엿보고자 한다면 이는 인사(人事)위에서 천리(天理)를 구하지 않고 성(性)을 구하고 명(命)을 알고자 하면서 효제에 근본을 두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네거리의 큰 시장에 다니면서 진기한 보화를 보는 것과 같다. 종일토록 거리를 오르내리며 공연하게 그 값만 논할 뿐 마침내 나의 물건은 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근본과 양단을 파헤치고 증세에 따라 약을 줌이 이와 같았다. 대곡(大谷)은 말하기를, “수많은 학도들이 경서를 안고 와서 물을 때, 단 한마디 말로 의혹을 덜어주어 환하기가 해를 보는 듯 하였고 뭇사람이 하수(河水)를 마셔 사람들마다 배부른 듯 하였다.”라고 했다. 죽유 오운은, “선생께서 사람을 가르침은 유행하는 시속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이상의 「남명선생편년」에 실린 남명의 교학사상과 학문방법을 살펴보면, 상달(上達) 위주의 공부보다는 하학(下學) 위주의 실천적 학문을 중시하여, 문생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특성에 따라 긴요한 공부를 하도록 이끌었다고 보여진다.동시에 남명의 학문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전일(專一)한 수양방법에 기초한 의리의 강명은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이 배출되어 나라가 위란에 처할 때 이를 몸소 실천하는 구국운동의 사표가 된 것은 조선 시대의 성공한 교육자로서 선생의 한 면모를 엿보게 한다.

사실 남명이 문하생을 가르칠 때 스스로 깨달음을 주어 교육효과를 극대화시킨 예화를 더러 볼 수 있는데 비유와 간접적 교화는 그의 교육방법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

약포 정탁이 진주교수로 있으면서 남명에게 집지(執贄)한 뒤 서울로 갈 때 남명이 소 한마리를 주면서 이를 타고 가도록 한 다음의 이야기는 약포의 민첩한 언행을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신유년에 공(약포)이 남명 선생을 뵙고 수학하였는데, 깊이 추허(推許)를 입었다. 공이 돌아갈 즈음 선생께서 소 한 마리를 주시면서 타고 가게 하였다. 공이 그 뜻을 미쳐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그대는 말이 너무 급하니 천천히 말함으로써 앞날을 기약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전화면

초기화면